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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어여뻐하는 한 사람만 있다면

도련님, 나쓰메 소세끼

by 설애

별명이란 누구에게 붙이는 것인가?

무릇 직장인이라면, 나를 괴롭히는 상사나 동료의 이름을 부르며 당당하게 뒷담화하기보다는 우리끼리만 아는 암호로 만들어 마음의 죄책감을 조금 덜어가며 소곤거리는 것을 해보지 않았겠는가?


혹은 이 책의 도련님처럼 만나는 사람마다 별명을 짓기도 하는가?

교장 선생은 너구리, 교감은 빨간셔츠, 영어 선생은 끝물호박, 수학 선생은 거센바람

주인공이 가족과 헤어진 후, 작은 어촌 마을로 교사로 임명받아 가서 만난 사람들이다.

교장 선생은 거무 튀튀한 얼굴에 수염이 희끗희끗 나고 눈이 부리부리한 것이 영락없이 ‘너구리’다. 그는 유별나게 거드름을 피웠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우리 반에 아사이 다미라는 애가 있었는데 그애 아버지 얼굴색이 꼭 저런 색이었다. 그애 아버지는 농사꾼이었기 때문에 어느 날 기요에게 농사꾼이 되면 얼굴색이 저렇게 되느냐고 물었더니 기요는 “아니에요. 저 사람은 끝물 호박을 하도 많이 먹어서 저렇게 된 거예요.” 하고 가르쳐주었다. 그 날 이후로 난 얼굴이 창백한 사람만 보면 끝물 호박만 먹어서 저리 됐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 영어 선생도 맨날 끝물 호박만 먹어서 저리 됐을 것이다. 그런데 끝물 호박이란 건 뭔가. 지금도 모르겠다.




가족들보다 집에서 일하는 '기요'라는 할머니 정도 나이의 하녀가 더 가족 같은데, 어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와 형과는 달리 주인공을 아껴주고, 믿어주는 사람이다. 주인공은 부모님을 닮아 성격이 급하고 짜증을 잘 낸다. 항상 부딪히는 아버지와 계집애 같고 교활한 형과 지내는 동안 칭찬하면서 훌륭한 사람이 될 거라고 해주는 유일한 사람이 '기요'다. '기요'는 성공해서 같이 살자고 하는데, 당장 돈이 없는 주인공은 '기요'와 떨어져 도쿄를 떠나 기차를 타고 배를 타고 멀리 있는 한 어촌 마을의 중학교에서 수학교사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난 시골 마을은 어딘지 무섭다. 그 무서움은 마을에 형성된 권력 구조의 뿌리가 튼튼하고,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에서 오는 막막함이기도 하다. 동네사람끼리 비밀도 없고 소문도 금방 나기도 하고. 튀김국수를 네 그릇 먹었다고, 경단 두 접시 먹었다고 온천 다닌다고, 주인공의 별명이 매일 바뀐다.


오랜만이라 튀김국수를 네 그릇이나 깨끗이 비웠다.
다음날 아무 생각 없이 교실에 들어서자 칠판 한가득 ‘튀김 선생’이라고 써 있었다. 내 얼굴을 보자 모두들 “와아” 하고 웃었다. 머쓱해져서 튀김국수 좀 먹었기로 그게 뭐 그리 우습냐고 물었다. 그러자 학생 중 한 명이 “그래도 네 그릇이나, 그건 너무한 것 아닐랑가요.” 하고 대답했다. 네 그릇을 먹든 다섯 그릇을 먹든 내 돈 내고 내가 먹는데 뭐가 잘못됐느냐고 생각하며 서둘러 수업을 끝내고 교무실로 돌아왔다.
그 다음날 학교에 가서 첫 수업에 들어가니 칠판에 “경단 두 접시 7전”이라고 쓰여 있다. 실제로 나는 경단 두 접시를 먹고 7전을 냈다. 정말이지 신물나는 녀석들이다. 그렇다면 둘째 시간에도 뭔가 써놓았겠지 예상하고 들어갔다. “유흥가에서 먹은 경단. 맛있다. 맛있어.”라고 쓰여 있다. 정말 진절머리나는 놈들이다.
이 동네 어딜 가도 도쿄에 비하면 발뒤꿈치에도 따라오지 못하는 수준이지만 온천 하나만큼은 알아줄 만하다. 모처럼 온 것이니 매일 다녀야겠다는 생각으로 저녁식사 전에 운동 삼아 걸어서 온천에 간다. 그런데 온천에 갈 때는 꼭 큰 수건을 매달고 간다. 이 수건에는 빨간 줄무늬가 있어서 물에 젖으면 언뜻 빨간색으로 보이기도 한다. 나는 이 수건을 길을 걸을 때도 기차를 타고 오가면서도 언제나 매달고 다녔다. 그런데 애들이 그것을 보고 “빨간 수건, 빨간 수건” 하고 부르는 것이다. 정말이지 좁아터진 촌구석에 살자니 별게 다 성가시다.

이렇게 하나하나 트집 잡혀서 튀김 우동도 맘껏 먹지도 못하고, 교장 선생님 비위도 못 맞추고, 그 와중에 끝물호박이 쫓겨나고, 신문에는 학생을 선동하는 불량 교사로 기사가 실린다.

비합리적이고 비열한 일들 속에서 결국 '욱'하고야 마는 이야기




첫 사회생활을 하는 애송이 선생이 구렁이 같은 교장을 이기기는 쉽지 않지만, 그냥 당하고만 있지 않는 그 결개가 주인공을 응원하게 만든다.



그 좁은 어촌을 빠져나와 바로 기요에게로 가서 함께 산다.

나를 어여뻐하는 그 한 사람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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