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 작가님과 글쓰기, 계절의 날씨로 분위기 있는 글쓰기
단풍이 물들 듯이 마음을 빨갛게 달구었던 글쓰기가 한 페이지를 넘기고, 낙엽 떨군 나무의 빈 가지에 눈이 쌓이는 겨울에 도착했습니다. 오늘은 계절의 날씨로 분위기 있는 글쓰기입니다.
[정윤 작가님 강의 내용]
https://brunch.co.kr/@without258000/292
[저무는 여름]
겨울 방학보다는 여름 방학을 좋아한다. 여름 방학에는 곤충 채집이나 탐구 생활 숙제를 핑계로 집에서 가까운 천변과 산을 오르러 나서기가 좋았다.
밤이 되어도 춥지 않은 계절, 여름이 오면 해의 존재가 두드러진다. 눈으로 볼 수 없는 환한 빛을 화살을 쏘듯 쏘아 땅으로 내리꽂는다. 그러면 땅의 열기를 식히기 위해 뿌려놓은 물들에게 명중하고, 물자국은 옅어지고 작아지면서 사라진다. 해의 화살은 한 두 개가 아닌 듯 하루 종일 지치지도 않고, 물러서지 않는 전쟁과도 같이 땅을 고슴도치처럼 만들어 놓은 후에 제 할 일을 다했다는 듯 천천히 사라진다.
여름 방학의 아침 녘에는 슬슬 나갈 준비를 하다가, 점심을 먹고서는 화살을 맞아낼 패기가 없어 조금 기다린다. 해가 지치고 땅의 열기가 식기 시작하는 시점에 집을 나선다. 그래도 해가 지기까지 한참을 쏘다니다가 올 수 있는 시간이다. 나의 걸음은 집 뒤편으로 향하고, 그 길을 따라 다리 밑을 지나면 우리 동네를 관통하는 천이 하나 나온다. 그 천은 강이라고 부르기에는 작지만, 그렇다고 졸졸 흐르는 것이 아니라, 생기 있게 콸콸 흐르는 맑은 물이다. 그 천위로 징검다리가 있다. 징검다리라고 해야 하나, 작은 둑이라고 해야 하나. 그 징검다리는 정갈한 빗처럼 생겼다. 그래서 풍성한 머리칼을 빗어 내리는 느낌으로 물이 그 징검다리 사이사이로 물을 튀겨가며 흐른다. 그 천에는 작은 민물 새우도 있고, 물고기도 있고, 경상도에서 골뱅이라고 부르는 다슬기가 다닥다닥 붙어있다. 다슬기는 까맣게 맨들맨들거려서 까만 작은 돌과도 구분이 잘 되지 않는다. 그 징검다리 위로는 깊어서 물에 빠질 수 있으므로, 그 징검다리 아래에서만 놀 수 있다. 그 징검다리를 지나 남산이라고 부르는 작은 공원이 있는 산으로 갈 수도 있고, 그냥 물에서 놀 수도 있다.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그곳에 멈추던가, 지나치던가 하며 여름방학을 보냈다.
중학교 1학년에는 식물 채집 숙제가 있어 천변과 남산을 자주 드나들었다. 그리고 초등학생과는 다르게 물에 쉽게 들어가지지 않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때는 이미 여성으로 겪어야 하는 꽃이 피는 시기였고, 조금은 조심스럽게 물에 발만 담그고 오는 날이 시작되던 시기였다. 그렇게 물에 발만 담그고 있으면 동네 동생들은 들어오라고 성화였고, 아직 철없는 짓궂은 남학생들이 물을 튀기거나 끌고 들어가려고 힘싸움을 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물에서 놀기가 어려우니, 걸음은 점점 남산으로 향하거나, 아예 도서관으로 향하는 날이 많았다.
아이들의 소리가 넘쳐나던 그 여름, 그 차가운 물에서 한기를 느낄 때쯤의 풍경을 나는 유독 좋아했다. 아마 집으로 돌아가는 아쉬움처럼, 나의 밝은 시절이 저물어 가는 것을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시간, 해가 땅 위에서 붉게 보이는 시간. 내 그림자가 엄마의 한숨처럼 길어지는 순간. 나는 모르는 척했지만 그 변화는 멈추지 않았고, 나는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고, 우리의 행복은 저물고 있었다. 한가로웠던 나의 마지막 여름 방학... 나는 해가 땅으로 몸을 숨기기 시작하고, 조금씩 어둠이 몰려드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는 그렇게 넋을 놓고 그 노을이 사라지는 순간까지 해가 넘어가는 것을 자주자주 쳐다보곤 했었다. 어떤 예감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