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주 차~계절의 날씨로 분위기 있는 글쓰기
가야산 들머리에 들어서자 공기가 먼저 달라졌다. 속세의 소음은 등산로 초입에서 발밑에 눌려 사라지고, 오전 아홉 시의 겨울 공기는 막 씻어낸 그릇처럼 차고 투명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 깊숙한 곳이 서늘해지며, 마음속에 남아 있던 찌꺼기들이 하얗게 식어 가루처럼 부서지는 기분이 들었다. 오늘의 겨울은 혹독함보다는, 오래 달려온 시간을 잠시 멈추게 하는 커다란 숨 고르기처럼 느껴졌다.
밤새 내린 눈으로 산은 하얀 옷으로 갈아입고 있었고, 산악회 회원들은 각자의 리듬으로 산을 오르고 있었다. 누군가는 앞서고, 누군가는 사진을 찍느라 잠시 멈췄다. 그녀도 그 무리 속에 섞여 있었고, 자연이 건네는 풍경 앞에서 걸음을 늦춘 채 한동안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나뭇가지마다 내려앉은 눈꽃은 장식처럼 얹힌 것이 아니라, 나무가 하룻밤 동안 견뎌낸 추위를 고스란히 기록한 흔적처럼 보였다. 잎을 모두 떨군 가지 끝에서 눈은 더 섬세해졌고, 가늘게 갈라진 끝마다 흰 결정이 맺혀 있었다. 햇빛이 스칠 때마다 그 결정들은 잠깐씩 빛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사라진 다기보다는, 빛을 다 쓰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듯했다.
발밑에서는 눈이 눌리며 낮은 소리를 냈다. ‘뽀드득.’ 겨울 산이 허락한 최소한의 대답 같았다. 경사가 갑자기 급해지는 지점에서 그녀의 발이 잠깐 미끄러졌다. 몸이 앞으로 쏠리는 순간, 소리를 낼 틈도 없이 손이 잡혔다. 장갑 너머로 전해진 온기는 짧았고 단단했다. “괜찮으세요?" 뒤늦게 따라온 그 한마디. 그는 산악회 회원 중 한 사람으로, 그동안 몇 번의 눈인사만 나누었던 사이였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각자의 보폭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다만 그 짧은 접촉 이후, 발걸음의 간격은 조금 더 조심스러워졌다.
고도를 높일수록 풍경은 오히려 단순해졌다. 폭포가 흐르다 멈춘 자리에는 시간마저 얼어붙은 듯한 푸른 기둥들이 서 있었고, 햇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났다. 겉은 단단했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물의 기억이 남아 있을 것 같은 형상이었다. 그녀는 그 앞에서 잠시 걸음을 늦췄다.
정상 부근에 이르자 바람이 세졌다. 숨이 가빠질 즈음, 그녀는 멈춰 섰다. 그때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조금 쉬었다 가시죠." 배낭에서 보온병을 꺼내는 동작이 자연스러웠다. 종이컵에 커피를 따르자 하얀 김이 천천히 올라왔다. 김은 서두르지 않고, 바람의 방향을 살피듯 퍼졌다. “손이 차네요.” 그는 컵을 건넸다. 그녀는 두 손으로 컵을 감싸 쥐었다. 커피의 온기는 손바닥에 닿았고, 그제야 정상의 풍경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눈은 여전히 내리고 있었지만, 더 이상 차갑게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쌉싸름한 맛 뒤에 남는 미묘한 단맛이, 오늘 산행의 온도를 닮아 있었다.
상왕봉에 섰을 때, 세상은 소리를 줄이고 있었다. 눈발은 가늘어졌고, 풍경은 넓어졌다.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정상에 머물다 내려갈 준비를 했다. 하산길에서 그는 조금 앞서 걸어갔다. 위험한 구간에서는 손짓으로 방향을 알려주었고, 미끄러운 곳에서는 속도를 줄였다. 말은 필요할 때만 짧게 오갔다. 그녀는 그 조용함이 산의 태도와 닮아 있다고 느꼈다.
나뭇가지의 눈꽃은 내려오는 길에서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누군가를 위해 피어 있는 것도, 보여주기 위해 매달린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 자리에서 시간을 견디고, 빛을 받아 잠시 드러날 뿐이었다. 말 없는 길 위에 남은 발자국들은 서서히 눈에 덮였지만, 가지 위의 눈꽃은 한동안 그대로 남아 있었다. 가장 연약해 보이는 것들이, 가장 오래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산 아래로 내려오는 동안 눈은 허공을 유영하며 가장 낮은 곳으로 향했다. 앞서 걷는 그의 등이 눈 속에서 묵직한 리듬을 만들고 있었다. 그녀는 겨울 가야산이 건넨 것이 풍경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나뭇가지에 맺혔다가 바람에 흔들리던 눈꽃처럼, 어떤 감정은 이름 붙이기 전의 상태로 남아 있을 때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하얗게 덮인 길 위로 여러 사람의 발자국이 겹쳐 찍혔다. 그 사이, 두 개의 발자국이 잠시 나란히 이어졌다가 다시 흩어졌다. 겨울은 그렇게 소란 없이 깊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