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강 - 계절을 활용하기
짧은 머리 위로 고동색 야구모자를 눌러쓰고 재현이 집을 나섰다. 현관 앞으로 그의 엄마가 배웅을 나왔다. 이번은 재현의 전역 전 마지막 휴가였다. 휴가를 나온 재현에게 낮에 약속이 있는 날은 으레 선혜를 만나는 일이었는데, 한 달 전쯤부터 끊긴 선혜의 안부 메시지에도 재현의 엄마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입춘의 일기예보에도, 며칠 전엔 눈이 내렸다. 아파트 화단의 검은 흙들 사이로 군데군데 얼룩진 얼음의 형상이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위로 정오의 태양은 유난히 밝았음에도, 내리쬐는 햇살 아래엔 차가운 공기의 입자들이 여전히 웅크리고 있었다. 빠른 발걸음의 재현이 지나가는 자리에 입김이 서린 작은 연기들이 남았다.
만나자는 선혜의 메시지에 재현은 쉽게 답하지 못했다. 어느 날부터 면회를 미루는 선혜는 훈련 중 전화에도 응하지 않는 날들이 늘어났고, 그것에 대해 화조차 낼 수 없던 재현은 찌르는 가시를 참아내느라 마음에 생채기가 났다.
그는 자주 가던 집 앞 카페의 문 앞에서 얼어붙어가는 숨을 들이켰다. 무거운 문을 밀고 들어서니, 구석 자리에 그녀가 앉아 있었다. 청바지에 연보라색 가디건을 걸치고 아이스커피를 손에 쥔 선혜는, 손끝으로 빨대를 천천히 저으며, 고개를 들어 재현을 바라보았다.
"왔어? 살이 좀 빠졌네."
재현은 얼굴 근육을 오므렸다 펴며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그녀를 마주했을 때, 선혜의 얼굴 위로 창가로 기울어진 빛이 옅게 내려앉아 있었고, 반짝이던 입술의 모양을 눈으로 따라가다가 재현은 이내 고개를 돌렸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유리창 너머로 스며들었다.
"나 약속 있어. 할 말 있으면 빨리 끝내." 선혜 특유의 담담한 표정은 예상했던 대로였고, 아이스 커피만큼이나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다.
"그래도… 다섯 해를 함께 했잖아. 예의상 얼굴은 보고 정리하려고."
재현의 가슴속에 억눌려 있던 불길이 치솟았다.
"예의? 그걸 네 입으로 말해? 군대 간 남자친구한테 연락 한 번 안 하고, 면회도 안 오는 게… 이미 끝난 거 아니었어?"
"…미안해."
재현은 왜 이렇게 끝나야 하는지 알고 싶지 않았으므로, 묻지 않으려고 했다. 군대에서 밤을 지새우며 수천 수만 가지의 이유를 떠올렸었지만, 그 어떤 것도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차라리 사소한 오해였길 바랐다. 카페 안의 소음이 잠시 멀어졌을 때, 재현은 선혜에게 이유를 물었고, 선혜는 투명한 컵의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천천히 이어갔다.
"생각해 봤어. 네가 군에 있는 동안. 우리 미래에 서로가 최선일까, 하고."
선혜의 입에서 나온 이별의 이유는 그냥 핑계가 아니었다. 둘 다 집이 넉넉하지 않았다. 식당을 운영하는 재현의 부모님 형편상, 재현의 형과 재현이 결혼을 하게 될 때 넉넉한 지원을 해주지 못할 거라는 말. 그저 그런 대학을 졸업한 선혜와 재현이 그럭저럭 취업을 한다 해도, 집 한 채 없이 시작하는 둘이 가정을 이룬다 해도 평생 허덕일 거라는 말. 선혜의 말들은 화살처럼 꽂혔다. 닫힌 창문 틈 사이로 살을 에는 바람이 들어왔다. 재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선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는 눌렀던 감정을 토해냈다.
"…와. 우리 부모님이 널 얼마나 아꼈는데. 그 말이 나와? 우리가 언제 조건 보고 만났어? 예전에는 나 대학 못 가도 좋다고 하더니, 대학 졸업할 때가 되니 딴 사람이 됐네."
커진 재현의 목소리에도 선혜의 눈동자에는 미동조차 없었다.
"그땐 몰랐어. 난 네가 긍정적이라 좋았거든. 근데 이제 알겠어. 인생을. 솔직히 네가 재수할 때 내가 잔소리 안 했으면 공부했겠어? 넌 그냥 아무 생각이 없어. 현실을 외면하고 괜찮다고 믿고 싶은 거지. 그럭저럭, 중간에 머무는 인생. 우린 거기까지야."
재현은 부딪치려고 했다. 앞으로 인생이 달라질 수 있지 않겠느냐고, 적어도 이십 대의 중반에게는 희망이라고 불리는 가능성 같은 게 있지 않겠느냐고. 재현의 한숨 뒤에 밀려나온 말은 생각과는 달랐다.
"그래서 뭐? 그럭저럭이면 그게… 뭐 어때서."
다 녹지 않은 아이스 커피 속 얼음에서 눈을 떼고, 그가 중얼거리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네 말대로라면, 너도 내 답은 아니네."
그날 그렇게, 서로의 심장을 겨누듯 말을 쏟아내며 막다른 골목 앞에서 선혜와의 끝을 냈다. 창밖의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고, 다섯 해의 시간은 칼바람에 잘려나가듯 허공에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