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았을 뿐인데

시 이백이십삼

by 설애
종종걸음도 아닌데 걸을수록 흐트러지는 발걸음
길이 나를 자꾸 넘어뜨리려 한다 나는 휘청거리고,
버스 정거장이 도로 건너편에서 나를 기다리는데
발목이 노인처럼 지쳐간다
이 길이 그의 길이라니

흰 지팡이가 횡단보도를 건넌다 中, 공광복
중부광역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출처 : 중부광역신문(http://www.jbknews.co.kr)


눈을 감았을 뿐인데, 세상이 달라집니다. 그 어지러움, 그 어둠의 세상에 사는 흰 지팡이가 걸어갑니다. 한 사람을 이해하는 일은 다른 세상을 만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이 시는, 눈을 감고 걸어가면서 흰 지팡이를 짚고 걸어가는 사람의 세상을 만나는 순간을 그려낸 시입니다.


무언가를 잃기 전에는 소중함을 알지 못한다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잃기 전에 잃어보는 경험을 하고자 하는 시인의 시도가 시로 탄생했습니다. 시인의 걸음은 어떠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이 시를 읽기 전의 세상과 읽고 난 후의 세상이 달라집니다. 저는 그랬습니다. 발 밑을 밝혀주는 불빛에 감사하고, 앞이 보이는 것에 감사하고, 넘어지지 않고 빨리 걸을 수 있음에 감사했습니다.


눈을 감고, 걷고, 그 경험을 시로 옮겼을 뿐인데, 그 시를 읽고 나서, 저는 감사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당연해서 소중한 것들을 하나씩 떠올려 보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설애가 당신의 행복을 바라며 시 한 잔 나눕니다.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