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나는 나다. 그게 문제일 수 있다.
p286, 단편 [팍스 아토미카]
자꾸 로그아웃되는 어머니의 게임 비밀 번호를 찾다가 화를 내는 주인공 남자에게는 강박증이 있다. 집을 나서서 문을 잘 닫았는지, 가스를 잠궜는지, 알람을 잘 켜놓았는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 그래서 문제는 '나'임을 인식하고, '아주' 이상해 지지 않기 위해 '조금' 이상해지기로 한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에게 '조금' 이상하게 혼잣말로 주문을 건다. '나는 문을 닫았다.', '나는 보일러를 껐다.', '나는 관리비를 이체했다.' 등등의 주문이다.
잠자리에서의 마지막 주문은 '나는 잘 살고 있다.'이다.
조금 이상해짐으로써 아주 이상해짐을 막기로 했다.
p279, 단편 [팍스 아토미카]
김기태의 소설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나열한다. 유명한 걸그룹의 팬, 솔로 탈출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여자, 고전 읽기 수업을 하는 선생님, 역도를 하는 여학생. 아주 행복하지 않은, 그리고 아주 불행하지도 않은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이 살아가며 목격하거나 겪는 일을 담담한 어조로 풀어낸다. 그래서 읽으면서 감정 기복이 없었는데, 단편 하나를 끝내고 돌아보면 장면이 떠오르고, 그 글의 의미가 조용히 밀려들어와서, 조금씩 조금씩 아껴서 읽었다.
단편은 모두 9편이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단편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이 가장 좋았다. 어쩌면 고등학교에서 봉투를 받던 주인공들과 나의 기억이 겹쳐져서인지도 모르겠다. 가정형편이 어려웠으므로 나는 종종 기숙사비나 식비가 미납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이 책의 주인공 진주처럼 미납고지서가 들어있는 흰 봉투를 받지는 않았다. 하지만 전달되는 방식이 어떻든 간에 부채를 전해받는 심정은 순간 내가 바닥이 되어 모든 사람이 내 위로 올라가 있는 것 같이 등이 무겁게 밟혀 납작해지는 기분이다. 진주는 가난했고 니콜라이는 외국인이면서 가난했다. 그들은 교무실을 오가며 서로 흰 봉투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선생님은 그들에게 "둘이 친하게 지내"라고 말하지만 그들은 친해지지 않았다. 그렇게 졸업했다.
그들의 고등학교 성적이 1등급이나 2등급이 아닌 것처럼 졸업 후의 인생도 3등급이거나, 점점 낮아졌다. 납작해진 마음이 편지함에 터질 듯이 쌓인 고지서처럼 쌓여가는 가난한 자의 인생이었다. 진주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마트에서 일하며 지방직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다 떨어지기를 반복하고, 니콜라이는 외국인 노동자로 공장에서 일했다.
그들은 우연히 만나 2인분짜리 음식을 같이 먹고, 같이 자고, 같이 산다. 그들이 같이 살면서 처음으로 사는 가구는 네 다리가 있는 식탁이었다. 그 식탁 다리 하나가 제대로 조립되지 않았다.
"혹시"
옆으로 누워 있던 식탁을 함께 들어서 세워봤다. 세 다리로 서는 듯...... 하다가 이내 한쪽으로 기울었고 그러면서도 쓰러지진 않았다.
(중략)
연애가 망하더라도 사랑은 망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몰랐다.
p142
긴 시간을 지나 친해진 그들이 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질 수 있게 했다. 김기태 작가가 전하는 희망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두 사람이 식탁에서 주문한 피자와 치킨 세트를 먹지는 못하지만, 쓰러지지는 않는 식탁처럼 살아갈 것이다. 그 거창하지 않은 작은 행복이 모든 단편 속에서 살아났다.
'나는 나다. 그게 문제일 수 있다.'라고 했지만 읽다보니,
"나는 나다. 그게 문제가 아닐 수 있다."
라고 수정하고 싶어졌다.
[무겁고 높은]에서 고등학교 역도 선수 송희는 대회에서 100킬로그램을 들지 못한다. 하지만, 졸업 전 혼자서 그 100킬로그램을 든다.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것은 '내 몫'을 해낸 것이고, 그렇기에 그것을 아무도 몰라도 송희는 역도를 그만둘 수 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스스로의 몫을 다 하는 삶. 스스로가 인정할 수 있는 삶.
대단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는 삶.
삶은 그것만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의도치 않게 밀려나는 삶이라도, 우연하게 벌어지는 것을 감당해야 하는 삶이라도, 그것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김기태 작가는 끝없이 이야기하고 있다.
눈앞에 벌어지는 일을 받아들이되,
겨우 굴복하지 않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책의 미로> 서른여섯 번째 책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을 읽어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