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는 사람이 없는 편이 좋다, 우치다 다쓰루 / 삶은 도서관, 인자
국민학교 4학년쯤, 우리 집, 옆집, 동네에 있는 책은 다 읽자, 엄마가 한국 및 세계 위인전집 40권을 사주셨다. 그 전집을 대략 10여 일 만에 다 읽어내자, 엄마는 나에게 도서관 카드를 만들라고 하셨다. 전집을 10여 일 만에 다 읽으면 어떻게 계속 책을 사서 주냐는 투덜거림은 나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조금 섞여있기도 했다. 처음 도서관을 갔던 기억이 있으면 좋으련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도서관을 드나들며, 서가 사이를 천천히 지나가며 어디에 무슨 책이 있는지 책 이름만 읽어도 설레고 즐거웠던 기억은 선연하게 남아 있다. 바깥공기와 상관없이 조금 서늘하게 느껴지는 공기. 그리고 아래에 꽂힌 책부터 위로 꽂힌 책까지 훑어가며, 이 책을 읽을까, 저 책이 좋을까 하면서 책을 뽑아 조금씩 읽어보며 대출할 책을 팔에 안고 거닐던 시간들.
처음 만나는 무협의 세계, 김용 작가의 [영웅문]에 푹 빠져 도포 자락이 휘날리는 소리를 안고 잠이 들기도 했고, [동의보감]을 읽으며 위인전을 읽을 때와는 다른 생생한 역사를 느끼기도 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는 가까운 역사를 다시 돌아보게 했고, [제인에어], [폭풍의 언덕]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통해 사랑의 여러 형태를 보았다. 공부를 더 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공부법이나 논리, 기억력, 마인드 맵 등에 관한 책도 빌려 읽으며 적용해보기도 했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들은 앞서 읽은 책들과 싸우고 연결되면서 내면의 세계를 확장시켜 갔다. 도서관 분류에 따라 800번에 주로 머물렀지만, 100번이나 500번을 서성이며 마음에 드는 책을 종종 골라 읽기도 했다. 그 도서관에서 내 독서 취향이 꽤 확고해졌음은 말할 것도 없다.
내게 도서관은 책을 품고 나를 품을 수도 있는 조용한 공간이다. 책을 빌려 나올 수도 있지만, 그곳에서 머무르며, 샅샅이 뒤지는 것을 좋아했다. 가끔은 그림만 있는 책들을 찾아 가만히 들여다보며 시간을 죽이기도 했다. 식물의 사진, 사람의 신체, 유화, 사진, 그리고 삽화가 많은 동화책까지, 글씨가 있는 책을 빌려왔지만 그림이 많은 책은 도서관 한 구석에서 넘겨보기를 즐겼다. 가끔 사진집과 화집을 사서 책장 한 구석을 채우는 취향도 그때 만들어진 것이 분명하다.
도서관이 내게 어떤 곳이냐고 물으면, 아늑한 공간이라고 말할 것이다. 책으로 둘러싸인 방공호. 그러므로, 방공호에는 사람이 없는 편이 좋은 것이 맞다. [도서관에는 사람이 없는 편이 좋다]라는 책은 도서관으로 드나드는 인원 수가 도서관의 평판을 좌우하는 현실을 비판한다. 도서관에 많은 책들이 전하는 지식의 무한함을 느끼게 해주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도서관의 책들이 읽히지 않는 책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고 말한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작품을 통해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과 '가능한 한 오랜 기간 작가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 어느 쪽을 우선해야 하는지 '정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답'이 없는 곤란한 문제를 깊이 생각하는 일은 종종 '정답'에 다다르는 것 이상의 지적 이익을 우리에게 가져다줍니다. p188
책은 읽혀야 한다. 가끔 읽으려고 책을 찾는데, 절판된 경우가 많다. 헤아려봤더니 겨우 12년 된 책이다. 10년을 버티지 못하는 책들도 많을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이 너무 이상했다. 책이 겨우 10년도 못 버티고 사라지다니. 이 책의 저자 우치다 다쓰루는 이렇게 답한다. 책은 상품이 아니다, 책은 지식과 경험의 증여다,라고. 책이 지식과 경험의 증여라고 할 때, 책은 읽혀야 한다. 오래오래 읽혀야 한다. 그 보관의 역할을 하는 것이 도서관이다. 그리고 국가다. 국가에서는 '납본'이라는 제도를 통해 ISBN이 발행된 모든 책을 제출하도록 되어있다. 이 제도를 악용해 AI로 책을 쓰게 해서 돈을 버는 출판사가 있다는 뉴스를 들었다. 책은 이렇게 몰락하고 있는 중일까. 이 뉴스를 보며 아연해졌다. 이렇게 책이 수단이 될 때, 도서관은 어떻게 지속되어야 할까.
내 기억 속의 도서관은 책이 가지런히 꽂힌 조용하게 책과 사람을 지켜주는 공간이었다. 도서관 사서인 인자의 [삶은 도서관]에서는 도서관에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는 바탕으로 사람이 살아가고, 소통하는 공간으로 묘사되었다. 이 도서관은 온기가 있고, 생동감 있었다. 책을 읽는 내내 웃음이 나왔다. 우리 엄마처럼 많은 엄마들이 전집을 산다. 큰돈이 든다. 가끔 아이들의 금반지를 팔야 할 만큼. 그렇게 전집을 사주는 대신, 온 가족을 동원해 전집을 털어가는 <금광을 두고서 금반지를 팔았네>라는 에피소드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선생님이 책을 읽어주자 아이들의 두 눈에서 빛이 났다. 세상을 향한 호기심과 이야기에 대한 설렘이 뒤섞인 그 눈빛이, 꼭 금반지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도서관의 서가가 아이들의 저 눈빛을 품에 안은 거대한 금광이라는 것을.
그때 우리는 이 진짜 금광을 바로 곁에 두고서, 왜 그토록 어리석에 아이들의 금반지를 팔아야만 했을까.
p195
도서관은 이 에피소드처럼, 금광이어야 한다. 책을 보는 눈빛이 반짝일 수 있는 곳. 그래서 진짜 금을 찾아낼 수도 있는 곳. 책이 상품이든, 얼마나 빨리 절판되든, 도서관이 품은 책들 속에서 우치다 다쓰루의 주장대로 한 번쯤 길을 잃는 것도 좋고, 인자의 말대로 가끔 잠든 책을 깨워가며, 오래 머물렀으면 좋겠다.
나는 사람들이 도서관에 오래 머물면서, 그저 서가에 꽂힌 책을 만지고, 넘겨보고, 느끼는 시간이 길었으면 좋겠다. 책의 숲을 거닐며, 사랑하는 사람의 등을 바라보듯 책의 등을 오래오래 바라보았으면 좋겠다.
p142
도서관에서 어떤 추억들이 있는지?
영화에서 보듯, 서가 맞은편에서 책을 뽑다가 눈을 마주치거나, 같은 책을 향해 손을 뻗었던 로맨틱한 추억이 있다면 좋을 것이고, 없다면 만들러 가야지.
잘 생긴 남자는 아니더라도, 멋진 책을 만날지도 모르니까.
도서관에 관한 <책의 미로> 서른일곱 번째 책
[도서관에는 사람이 없는 편이 좋다]와 [삶은 도서관]을 읽어보시길.
<덧붙임>
두 책을 나란히 찍고 나니, 봄에 핀 꽃처럼 색이 곱다.
색만 고운 것이 아니라, 품고 있는 향도 좋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