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업주부, 나라는 자존감 찾기
언제쯤이지? 내 이름으로 나를 소개하는 모습이 아른아른 아지랑이 같이 기억 속에서 찾기 어려웠다. 누구의 엄마와 아무개의 부인이라 나를 불렀다. 다들 그렇게 지내려니 여기며 애써 생각의 끝을 뭉뚝하게 비벼냈다. 종종 인터넷 사이트 같은 곳에 회원가입을 할 때면 난감해질 때가 있었다. 개인정보를 입력하다 보면 직업을 체크해야 하는데, 스크롤 바를 위아래로 아무리 움직여봐도 내가 있을 곳이 없었다. 결국 기타 또는 무직 난에 나를 올려놓곤 했다.
내 이름도 아련해져 가는데 전업주부란 대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라 말할 수 있을까?
직업이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따라 일정한 기간 동안 종사하는 일이라는데 , 지금 나의 직업은 무엇일까? 나는 가정의 살림살이를 도맡아 꾸려나간다. 집안의 여러 가지 일들, 빨래, 식사 준비, 청소, 육아와 남편의 뒷바라지가 내 몫이다. 무려 18년째 이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전업주부이다. 그런데 나의 직업을 반백수 바라보듯 하는 시선들이 있어 맘 한편이 생마늘 씹어낸 듯 아린 것이 현실이다.
자! 지금부터 전업주부라는 직업을 가진 나의 하루를 따라와 보자.
‘삡삡삐...’ 알람 소리에 눈이 번쩍. 남편의 출근을 도와주며 하루를 연다. 쏜살같이 옷가지를 입는 그에게 양말을 던진다. 식탁 위에 꺼내 준 영양제를 입에 털어 넣으며 ‘잘 다녀올께.’ 라는 인사와 함께 차키를 챙겨 바삐 나간다. 이제 꿈나라에 있는 아이들의 등교길을 열 차례이다. ‘사랑하는 쭈니 유니 학교 가자! 기상! 기상!’ 눈뜨기를 필사적으로 거부하는 아이들과 시간을 다퉈가며 불끈 한주먹에 밥을 뭉쳐 입속에 욱여넣어 우당탕 내보낸다. 쾅하고 현관문이 닫히면 휴하는 숨이 절로 난다. 커피를 한잔 내리면 하루 중 가장 달콤한 시간이 내게로 온다. 분주했던 마음의 결을 가다듬고 잠시 다채로운 향속에 나를 담근다. 짧은 휴식을 마치고 청소, 정리, 장보기 등 잡다한 일을 하다 보면 시곗바늘은 총알같이 달려가 있다. ‘어머나, 애들 오겠네.’ 쭈니가 좋아하는 초코빵, 유니가 좋아하는 크림빵과 딸기 셰이크를 드르륵 갈아내며 들어오는 아이들을 맞이한다. ‘저녁으로는 맘메이드 볶음밥 부탁~해요!’ 메뉴 고민을 덜어주니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또다시 분주히 저녁시간을 맞이한다.
이렇듯 집안일이란 해도 해도 끝이 없다. 게다가 희한하게도 한 번이라도 게을리하면 빠진 앞니처럼 티가 나도 나도 너무 난다. 햄스터 쳇바퀴 돌듯 삼시 세끼에 맞춰 전업주부의 할 일은 뱅글뱅글 돌아간다. 생일, 제사, 명절 같은 집안의 각종 대소사가 끼어들면 내 손과 발은 열 배로 바빠진다.
집안일 삼 종 세트인 <요리, 빨래, 청소>
어느 것 하나 특별해 보일 건 없지만 사실 꽤 전문성이 필요하다.
그중 내가 가장 자신 있는 것은 요리이다. 주방은 내 손끝으로 마술봉을 휘두르는 나만의 공간이자 주 일터다. 결혼 전에는 남은 김치에 대충 밥을 넣어 볶아먹던 게 할 수 있는 요리의 전부였다. 여기에 계란 프라이라도 올린 날은 스스로 대견하다 여기며 미소 짓곤 했다. 신혼 초 냉동실 돼지고기로 미역국을 끓이기도 했던 내가 지금은 김장김치도 담가서 먹는다.
나에게 요리란? 창조적 예술 행위이자 논리적 사고의 결과물이다. 맛과 멋, 영양까지 놓치지 않으려 평소에 이곳저곳을 넘나들며 레시피와 정보들을 수집한다. 음식을 하기 전 재료를 스캔하고, 조리법을 떠올린다. 여러 개의 음식을 동시에 조리하려면 머릿속에 가상의 주방이 차린다. 10배속 이상의 빨리 감기로 영상을 돌리며 손이 분주히 움직일 우선순위를 정한다.
촤르륵 시원한 물줄기로 재료들을 다듬고, 또각또각 칼질 소리에 맞춰 룰룰루~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아삭아삭 사각거리는 오색찬란한 식자재들이 오늘의 추천 노래에 따라 춤추듯 프라이팬 안에서 달그락거리며 지지고 볶이며 서로의 향과 맛을 뽐낸다. 봄꽃 향내만큼 상큼하고 뒷산 어귀 바람이 전해주듯 고소함이 주방 안에 가득하다. 조리는 시간과 싸움이다. 간단해 보이는 계란 프라이도 조금의 타이밍으로 각자의 입맛을 벗어나 버린다. 두 아이가 원하는 계란의 익힘 정도가 다르다. 심하게 귀찮기도 하지만 녀석들이 맛있고 즐겁게 먹는 모습을 떠올리면 이 과정이 모두 행복이다. 요리의 가장 중요한 재료는 애정과 관심이라는 말이 여기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내 음식에 진정 자신이 있다. 음식을 하는 시간도 즐겁고 유쾌하다. 날마다 주인공인 그들이 좋아하는 음식들을 준비하노라면 임금님 수라상 차림처럼 상다리가 휘어지지 않아도 진정 훌륭한 잔칫상이 차려진다.
빨래와 청소는 또 어떠한가? 물론 나의 엄마 세대 때의 수고에 비할 수는 없다. 세탁기 청소기가 우리를 도와준다. 그러나 여기에도 보이지 않는 수많은 잔일이 산재해 있다. 소재에 따라 따로 빨거나 손빨래를 해야 하는 것들과 구분한다. 하루라도 청소를 쉬면 어디서 그 많은 먼지가 굴러들어 오는지 발걸음 옮기기가 거북스럽다. 항상 청소하기에 다른 식구들은 조금만 정리가 안 되어도 불편해한다. 사실 내게 정리정돈은 주부의 업무 중 가장 자신 없고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그래도 맡은 바에 최선을 다하며 깔끔함을 유지할 수 있게 노력은 한다.
‘맘충’이라는 듣기에 심히 불편한 말이 있다. 결혼하기 전, 아이를 낳기 전에는 그녀들의 마음을 감히 짐작도 못 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왜 저렇게 힘들게 나와서 한 끼 밥을 먹으며 타인의 눈치를 받는지. 내가 아이들을 키워보니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정말 어쩌다 한번 커피숍에서 친구들과 브런치라도 하려면 직장인들의 날카로운 눈빛들이 등 뒤에 꽂힌다. 남편들은 힘들게 나와 일하는데 팔자 좋게 취미생활이나 즐긴다며 색안경을 끼고 보는 이들도 적지 않다.
직장이란 전쟁터에서 돌아온 이들은 주말만은 온전히 쉬고 싶다고 한다. 우리 전업주부에게 휴일이란 없다. 식구들이 전부 있는 주말이나 휴일이면 오히려 24시간 풀타임으로 일하는 날이다. 누가 특별히 잘하고 있다고 알아주지 않아도 내 가족을 위한 일이기에 나의 직업이 부끄럽거나 안타깝지 않다. 다만 엄마와 주부의 일을 당연히 여기고 전업주부의 의미를 과소평가하는 당신의 시선이 조금만 따뜻해지면 안 될까?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내 머릿속에는 오늘의 저녁 메뉴에 대한 고민이 가득하다. 이만하면 나는 꽤 프로페셔널하지 않은가?
ps. 반영이 되어질지는 모르나, ‘브런치’의 직업란에도 주부라는 단어가 쏙 빠져있다.
나의 정체성이 다시금 조금 흔들거렸던 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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