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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몽 May 18. 2020

# 자유를 향하는 나, 노랑나비

<그리스인 조르바>  읽고 

많은 이들이 고전 중의 고전으로 <그리스인 조르바>를 손꼽는다. '고전은 어렵다'라는 불편함을 가지고 있는 내가 과연 읽을 수 있을까? 거기에 500페이지 가까이 되는 책의 무게에 더럭 겁이 났다. 그러나 인생 책이라 '엄지 척'하며 추천해준 이들이 있기에 용기를 내어 무거운 첫 장을 넘겼다.


'항구 도시 페레에프스에서 조르바를 처음 만났다.' 나도 그를 따라 조르바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어지러웠던 시대를 사는 그리스, 크레타섬이 주 무대다. 주인공인 나는 조르바와 만남 후 탄광 사업을 위해 섬으로 떠난다. 조르바의 연륜에서 나오는 육감적 인사이트가 이 둘의 사업을 이끌어 나간다. 애초 사업을 통한 이윤 추구가 목적이 아니었던 주인공은 조로바와 오르탕스 부인, 과부와 섬 주민들 그리고 수도원의 성직자들과 뒤엉켜 해탈의 길을 찾아간다. 갈탄 사업 중 조르바는 목재 수송 사업에 도전장을 내밀고, 주인공은 백지수표처럼 그를 전폭 지원한다. 주인공 마음속의 회오리처럼 섬마을에서는 일상과 상식을 벗어난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하고 방화, 살인죽음들이 이어진다. 정인이었던 오르탕스 부인의 죽음 후 조르바는 더욱 일에 매진한다. 대차게 완공한 수송 케이블 사업은 개시 첫날 참담한 실패로 끝난다. 주거니 받거니 브로맨스를 나누던 주인공과 조르바는 어쩌면 모든 것을 잃게 된 그 날 바닷가에서 먹고 마시며 춤을 춘다. 미친 듯이... 그리고 비워낸 곳을 채운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 자 유 


'아니요. 당신은 자유롭지 않아요. 당신이 묶인 줄은 다른 사람들이 묶인 줄과 다를지 모릅니다. 그것뿐이오. 두목,, 당신은 긴 줄 끝에 있어요. 당신은 오고 가고, 그리고 그걸 자유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당신을 그 줄을 잘라 버리지 못해요. 그런 줄은 자르지 않으면....
'언젠가는 자를 거요.'
'두목, 어려워요, 아주 어렵습니다. 그러려면 바보가 외어야 합니다. 바보, 아시겠어요? 모든 걸 도박에다 걸어야 합니다....'


자유는 무엇일까? 자연스러운 것이 자유로움일까? 욕심과 두려움을 모두 비워낸 상태, 한 줌 흙으로 돌아간 카잔차키스는 그제야 진정한 자유인, 초인이 된 것일까? 그 의미를 짐작하기조차 자유로운 단어. 이상과 현실 속에서 개혁과 타협을 통해 우리가 손에 넣어야 할 자유라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카잔차키스는 조르바의 모습 속에서 그 힌트를 얻고자 한 듯하다.


책 속의 나, 두목은 끊임없이 붓다의 해탈에 닿기를 원한다. 글과 펜으로 염원하는 진정한 자아를 찾으려 노력한다. 이에 반해 세상의 모진 풍파를 맞으며 기인이 되었으나 누구보다도 인간적인 조르바. 공통점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두 인물은 마치 자석의 N극과 S극처럼 달라붙어 하나의 힘을 서서히 만들어 간다.


내게 조르바는 낯설지 않았다. 카잔차키스가 말하고자 한 자유와는 거리가 있겠으나 젊었던 나의 모습과 분명 겹쳐지는 부분이 있었다. 한바탕 춤으로 그려지는 해방감. 내 안에도 그런 춤사위가 존재함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기에 종교적, 사상적, 성적으로 극 편향적 사고를 보이는 그가 그리 불편하지 않았다.  내게는 오히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는 모습이 더욱 인간답게 느껴졌다. 조르바의 행동이 기이하게 보일 수 있지만, 거짓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행동은 원초적이며 거칠었으나, 그 끝은 양털처럼 부드럽게 그지없었다. 60여 년을 뜨거운 그리스 해풍이 주는 소금 바람을 맨 피부로 버텨냈다. 누군가를 죽이기도 살리기도 했으며, 여인은 취하기도 버리기도 하였다. 비뚤어진 세상과 신을 코를 풀어 꾸겨 버린 한 장의 휴지처럼 여겼다. 그의 아버지가 발끝에 남겨준 그것, 자유. 힘겨웠던 삶의 경험이 그를 자유와 해방에 다가갈 수 있게 해 주었다. 그의 말과 행동에 항상 열정과 몰입이 존재했다. 조르바는 다른 대상에 대한 부정의 표현은 과감히 했다. 그러나 미워하거나 원망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점점 철저하게 홀로 남았으며 자유에 가까이 다가가는 듯 보였다. 이상하리만큼 가까이...


# 해 방 


  “나는 어느 날 아침에 본, 나뭇등걸에 붙어 있던 나비의 번데기를 떠올렸다. 나비는 번데기에다 구멍을 뚫고 나올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나는 잠시 기다렸지만 오래 걸릴 것 같아 견딜 수 없었다. 나는 허리를 구부리고 입김으로 데워주었다. 열심히 데워 준 덕분에 기적은 생명보다 빠른 속도로 내 눈앞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집이 열리면서 나비가 천천히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날개를 뒤로 접으며 구겨지는 나비를 본 순간의 공포는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가엾은 나비는 그 날개를 펴려고 파르르 몸을 떨었다. 나는 내 입김으로 나비를 도우려고 했으나 허사였다. 번데기에서 나와 날개를 펴는 것은 태양 아래서 천천히 진행되어야 했다. 그러나 때늦은 다음이었다. 내 입김은 때가 되기도 전에 나비를 날개가 쭈그러진 채 집을 나서게 한 것이었다. 나비는 필사적으로 몸을 떨었으나 몇 초 뒤 내 손바닥 위에서 죽어 갔다. 나는 나비의 가녀린 시체만큼 내 양심을 무겁게 짓누른 것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에야 나는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죄악인가를 깨닫는다. 서둘지 말고, 안달을 부리지도 말고, 이 영원한 리듬에 충실하게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안다. 나는 바위 위에 앉아 새해 아침을 생각했다. 그 불쌍한 나비라도 내 앞에서 몸을 뒤척이며 내가 갈 길을 일러 준다면 참 좋겠다 싶었다.”  


새해를 맞이하며 떠올린 주인공의 기억이다. 알, 애벌레, 번데기를 거치는 변태를 통해 비로소 완전한 모습을 갖추는 나비는 끊임없는 변화, 성장, 새로운 삶을 상징한다. 힘겹게 딱딱한 껍질을 연거푸 깨고 나와 크고 화려한 날개를 펼친다. 완벽하게 탈바꿈을 해낸다. 나와 세상의 구속으로부터의 탈피, 해방이다. 주인공은 몰입하여 글을 써내 자유와 해탈에 다가가는 모습 변태를 거쳐 가는 나비의 모습과 비슷해 보였다. 책 속에서 나비는 생과 사의 접점에서 몇 번의 날갯짓을 한다.


부활절이었다. 조르바는 이미 옷을 입고 있었다. 발에는 마케도니아에 있는 여자 친구 하나가 자기를 위해 짜주었다던 두꺼운 가지색 털양말을 신고 있었다. 그는 초조한 듯이 우리 해변에서 가까운 언덕을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이따금 한 손을 짙은 눈썹 위에 올려 차양으로 삼고 시골길을 바라보고는 했다. 「늑장을 부리고 있어, 이 늙은 물개가. 늑장을 부리고 있어, 이 논다니 같은 년이 이 다 찢긴 깃발 같은 년이!」 번데기에서 갓 나온 나비 한 마리가 조르바의 콧수염 위에 앉으려다 그를 간질였다. 조르바는 콧바람을 불었고 나비는 조용히 날아올라 햇살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마을로 들어가면서 나는, 단장에 몸을 의지한 채 봄 풀 위에서 쫓고 쫓기는 두 마리 노랑나비를 바라보며 웃고 서 있는 아나그노스타티 영감을 발견했다. 나이를 먹은 데다 이제는 밭일이니 아내니, 자식 걱정 같은 건 할 필요가 없게 되자 그에게도 주위 세계를 관찰할 시간 여유가 생긴 것이었다.


돌연 환상이 다시 돌아왔다. 파란 나비 떼가 날개를 벌리고 침대 위를 뒤덮었다. 죽어 가는 여자는 조르바의 손을 잡고 팔을 뻗어 목을 끌어당겼다. 또 한차례 부인의 입술이 움직였다.


우리의 삶과 깨달음의 과정이 나비의 성장과 닮아있을지도 모른다. 나비가 카잔차키스가 가고자 한 자유와 해방은 모든 것을 잃은 순간 손에 넣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주머니 털어 나올 먼지 하나 없을 때, 주인공은 허탈함 속에서 분명 찾아낸 것이 있었다. 처참한 패배에서도 무너지지 아니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이가 그가 그리도 경험코자 했던 자유임에 해방감을 느낀다. 자신이 무릎을 꿇지 않으면 무엇도 나를 귀속할 수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삶과 죽음이라는 극명하고 단순한 자연의 법칙 속에서 우리는 인간에 지니지 않으니... 그렇다, 나도 인간일 뿐이다. 자유를 갈망하며 푸른 하늘로의 날갯짓을 꿈꾸는 '작은 노랑나비'이다.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구름의 끝에 나 자신을 끊어내 줄 작은 유리 조각을 찾아내기를 희망한다.


"Den elpizo tipota, Den forumai tipota,  Eimai eleftheros."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카잔차키스가 생전에 준비해둔 묘비명처럼... 어쩌면 죽음이 우리에게 줄 선물이 진정한 해방일지도 모른다. 조르바의 모습처럼 지금 이 시간에 모든 것을 불태우는 것이 자유를 향하는 길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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