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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몽 May 28. 2020

# 좋아한다는 말은 그 일이 우선이라는 뜻이다.

<글쓰기의 최전선> _ 은유 _ 를 읽고.


‘좋아한다는 말은 그 일이 우선이라는 뜻이다.’
울림 단어 : 글쓰기, 각자의 삶, 좋아하는 일.


생각할 틈조차 내주지 아니 하고 코끝으로 들어와 온몸으로 퍼져버리는 향, 온 세계 모든 풍경을 안겨주는듯한 커피향. 작은 하나의 알은 더커억 ~ 칙 ~ 갈아 고압의 기계를 통해 전혀 다른 존재로 내게 온다. 어디에서 왔는지 어떤 손길을 거쳤는지 모른채 잔속에 한 방울 떨어지는 순간, 나는 알 수 있다. 잔을 들어 작은 한 알이 전하는 여행 이야기를 맛본다. 심장이 터질듯한 이 감성과 커피의 카페인. 좋아서 하는 일. 커피의 중독성이 유사하지 않을까? 좋으면 토를 달지 않는다. 그냥 하게 된다. 계속 찾게 된다.

나를 울리는 글을 읽는 순간. 그리고 그 안에서 나와의 고리를 연결했다는 즐거움. 향에 덧대어 혀끝에 느껴지는 감각의 이음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작가와 통하였고 이 속에서 사유한다. 내 삶은 깊이 고민하고 토해내듯 써내는 일. 이 글로 각자의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가며 삶을 나누는일이 글쓰기이다.

잘쓴글과 좋은글, 비슷하며 매우 다르다. 술술 읽히는 글과 목구멍속에서 걸려 넘기지 못하는 엄지 손톱만한 알약같은 글. 온 몸에 찌릿한 전율을 주는 글. 잘쓰기는 어렵지 않다. 시중에 나와있는 글쓰기 책이 알려주는 요점 몇가지만 지켜낸다면 누구나 잘 쓸수있다. 좋은 울림이 어렵다. 맞춤법, 문법이 엉망인 비문일지라도 도끼같은 문장이 존재할수 있을테니. 삶이란 타자와 세월의 먼지를 집진하는 일이다. 글쓰기란 삶의 줄임말이고 나의 경험이란 나를 아는 모든 나와 나를  모르는 모든 나의 합작품인것이다.

# 내가 좋아하는 일, 글을 계속 쓰자.

“책은 읽는 것이 아니다. 행간에 머무르고 거주하는 것이다. “ _  발터 벤야민

“우리는 불행처럼 우리를 자극하는 책들, 다시 말해 우리에게 아주 깊이 상처를 남기는 책이 필요하다. 이런 책들은 우리가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처럼 느껴지고, 사랑들로부터 격리되어 숲으로 추방되는 것처러 느껴지고, 심지어 자살처럼 느껴질 것이다. 책은 우리 내면에 얼어있는 바다를 내려치는 도끼같은 것이어야만 한다. 나는 이렇게 믿고 있다.” _  카프카


어쩌면 우리는 앎보다 느낌에 굶주린 존재
울림단어 : 연결 , 도끼 , 객관화


한 장, 한문단, 한 문장, 하나의 단어까지 작가가 자신의 삶의 경험과 이를 채를 쳐 내려온 다양한 입자의 알갱이들이다. 그의 글처럼 채위에 남겨진 투박한 상처들도 드러낼 때 고운 가루들이 더욱 빛날 수 있지 않을까?
지구 반대편에서 숨을 쉬고 있는 이도 나와 연결돼 있다. 다른 삶을 살고 있는듯하여도 같은 시간을 숨 쉬고 있는 것이다.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지식의 부족함은 큰 잘못이 아니다. 이의 부족함을 알고 다양하게 바라보며 고여있는 않도록, 뒷주머니에 도끼는 아니더라도 조그마한 뿅 망치는 쏙 넣고 살아야겠다. 나 자신을 가장 잘 아는 것은 나일 테니.


# 뿅 망치로, 뿅뿅뿅. 내 내면에 균열을 만들어내자.



‘나만의 색과 향을 가져라.’
울림 단어 : 질문, 대체 가능한 존재, 구체화


글쓴이의 질문과 답이 드러나지 아니하는 글. 내가 쓰고 싶은 대로 쓰는 게 끝이 글. '독백'이다.
일기와 다른 점. 거울을 보고 나와 나누는 글이 아니고 다른 이와 한 번이라 공명을 울릴 수 있는 글.
누구나 다 비슷한 삶을 산다. 그러나 모두 다 다른 삶을 산다. 비슷한  속에 나만의 질문과 생각이 담겨야 창작물로서 생명력 가질  있다.

# 글을  쓰는 사람은 정말 많다. 좋은 글이 되려면 나만   있는 글을 써야 한다.



‘끊임없이 두드리며 나를 찾아가자.’
좋은 글은 질문한다. ‘질문하는 글’은 ‘생성하는 삶’으로 이어진다. 누구나 자기 렌즈로 세상을 본다. 아파야 타인의 아픔이 보이고 내가 외로워본적이 있어야 타인의 외로움이 보인다.
무엇을 경험하느냐가 아니라 경험한 것을 통해 무엇을 느끼느냐이다. 독백이 아닌 대화와 소통의 수단이 되는 글을 써야 한다. 울림이 없는 글은 누군가에게 가닿지 못한다.
‘대체 가능한 존재’는 살아남지 못한다.


완전히 새로운 창작이란 존재할수 없다. 모방을 통해 나만의 색을 입혀야한다. 지식 , 사유 , 감정 중 하나라도 온전히 담긴글이 타인과의 교류를 가능하게 한다.
내글은 이중 무엇에 강점을 가질수 있는가? 나는 독자에게 무엇으로 접점을 만들고 싶은가? 에 대한 고민이 일순위가 되어야 한다.


# 투명한 문장부호들이 난무하는 글을 써보자. 절처하게 고민하고 이를 되내어 가는 글을 써보자.



‘착한 아이 이제는 여기 없다.’
울림 단어 : 글의 위치. 글의 구성. 글의 마무리.


모든 관계는 비대칭이다. 동등할 수 없다. 갑과 을이 있는것은 만고불변의 진리. 가장 큰 가난은 관계의 빈곤이다.


내가 글을 쓰는 방법을 가만히 관찰해 보자.  
나는 촘촘히 구성하며 글을 쌓아올리는가? 하늘에서 뿌려지는 빗방울 같은 글을 쓰는가?


내 글을 읽는 이가 흡사 나와 얼굴을 맞대고 앉아 있는 듯한 착각이 들도록, 그와 나의 간격을 좁힐 수 있게 글을 써라. ‘마중물’로의 글, 내가 쓰고자 하는 글의 모습이다.
글을 쓰는 순간의 호흡과 결이 비슷한 이가 읽어주리라. 그에게 내 행동과 감정이 그대로 전할 수 있게 써라.
울며 썼다면 울리고, 웃으며 썼다면 웃을 것이다. 맘 한편에 들어온 바람에 옷깃을 여미었다면 같이 안아줄 수 있는 솔직한 마음을 들켜버리게 써라. 단 한 명이라도 같은 마음, 같은 움직임, 같은 생각이 든다면 독백이 아닌 소심한 울림으로의 내 글. 충분히 의미가 있지 않을까?

# 착한 아이 증후군은 탈탈 털고, 적당히 삐딱선  어른으로.



글쓰기의 최전선에서 수 많은 접점이 있다. 우리는 무엇으로 이 점들을 만들어 낼수 있을까? 수천 수만의 점점을 만들기 위해 나를 짜내지 않는다. 단 하나의 점이라도 닿았다면 그 글쓰기에는 충분한 의미가 존재한다 말할수 있지 않을까?
전문 작가를 바라보지 않는다. ‘소박한 바램’ 삶의 시간속에서 나눌수 있는 감성과 공감이면 쓰려는 내 행위를 온전히 정의내릴수 있다. 생활 글쓰기의 열쇠, 문장 기술이 아니라 '마음'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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