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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몽 Jun 29. 2020

별일 아니려고 했다. 별일 아니라고 했다.

그 아이와 나, 미지근한 온도로 21살의 늦은 사춘기에 마침표를 찍었다.

별일 아니려고 했다. 별일 아니라고 했다. 나도 너에게 그렇게 말했고, 너 역시 나에게 그렇다는 의미로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거렸다. 우리는 그리도 낯선 방법으로 이별을 했다. 만남 역시 별일이 아니었으니 마침표 또한 그렇게 찍는 게 알맞을 것이라 암묵적으로 동의를 구했고 너는 나를 조용히 따라주었다.


한창 입시 준비에 구슬땀을 흘리던 그 무더운 여름, 속옷까지 흠뻑 적시던 태양 아래서 우리는 처음 눈을 맞췄다. 5교시 시작을 알리던 종소리에 앞뒤 보지 않고 달리기 시작했다.

“내가 빵 사서 들어가 먹자니까, 왜 먹고 놀다가. 너 때문에 큰일 났다. 수학 시간인데. 어떻게 할 거야?” “야, 미소야. 빵 먹으러 담 넘자고 한 건 넌데. 너랑 안 나가 이제.”

화살은 엄한 민지에게도 돌아갔다. 그래 내가 꼬셔서 나갔는데, 다음 시간이 싫었다. 그냥. 수학 시간도, 수학 선생님도. 이 8월 말의 꼬질꼬질한 늦더위도 그냥 다 귀찮아지고 나를 투명한 존재로 교실 바닥에 가라앉게만 만들어갔다. 헉헉거리며 한참 앞서 뛰어가는 민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내 발은 멈췄다. 1층 문 앞에서 뒤돌아 내게 손짓하는 민지에게 손목을 까딱거리며 나는 괜찮다고 오케이 사인을 날려주었다. 그래도 걱정이 되는지 두어 번 더 이리저리 손을 흔들더니 수업을 들어가시는 선생님들의 눈총에 후다닥 뛰어 올라갔다.

‘이긍. 녀석.’

그늘을 찾아 운동장 가 등나무 벤치 뒤로 터벅터벅 걸었다. 이왕 늦은 거 그냥 늦으면 어때. 걷는데 앞 벤치에 앉아있던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1학년 때 같은 반 친구였는데, 이름이 뭐였더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에이. 들어가자. 라며 지나는 순간.

“미소야, 덥지? 이거 가지고 들어가 마셔.”

그 아이는 내 손에 시원한 캔 음료를 하나 던져주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교실로 올라갔다.


필연과 운명을 절묘하게 섞어가며 그 아이는 내게 다가왔다. 내가 다니는 미술학원을 그 주말부터 등록했다. 디자인 전공을 하는 그 아이. 쉬는 시간마다 수채화실 앞을 오가며 내게 흘낏 웃음을 남겼다. 오빠들과 계단에서 수다를 떠는 내 앞을 수줍게 지나며 고개를 까닥했다. 난 그 아이의 이름도 기억을 못 하는데 내 주변을 미지근한 온도로 맴돌았다. 그렇다고 내 마음의 원안으로 훅하고 들어오지도 않았다. 공부와 실기 준비에 지쳐가는 내게 그냥 그런 미지근한 아이로 남은 채 졸업식을 맞았다. 나는 생각보다 나쁜 결과를 가졌고, 소문에 그 아이는 좋은 결과를 얻었다고만 그렇게 들었다. 내게 별일 아닌 아이였고, 내 일로만도 이미 가슴은 미어지고 아프고 고통스러웠다. 두어 달 앓고 나면 원래의 나로 돌아가겠지. 손끝이 얼어붙어 버릴 그 겨울 추위를 온 가슴으로 맞은 나는 차가운 봄을 맞이하고 대학이라는 곳을 향해갔다.

실기 시간을 마치고 잔뜩 더러워진 손을 대충 앞치마에 쓱 문질러 닦았다. 친구들이 배고프다 아우성이다. 목욕탕만 한 솥에 끓이는 구내식당 라면은 묘하게 맛있다. 네 맛도 내 맛도 아닌데 맛있는? 라면인데 국수 같은 신박한 맛이다. 오늘도 꼬르륵거리는 배를 흔들거리며 과 친구들과 주말 미팅 이야기를 조잘거리며 걸어갔다. 같이 다니는 친구들이 다들 키도 큰 데다 덕지덕지 물감 자국이 가득한 마대 자루를 뒤집어들 써서 우리가 지나면 길이 열린다. 창가에 비어있는 테이블에 앉아 후루룩이라면 한줄기를 마시며 고개를 들었다.

어? 내가 지금 잘 못 봤나? 그 아이인데. 시내에 다른 대학을 갔는데. 왜 여기에 있지?

잠시 궁금했지만, 나는 다른 친구들이 나를 불러 그렇게 스쳐 지나갔다. 학교 담 자락에 흐드러지게 피었던 개나리가 떨어지고 민들레 홀씨나 여기저기로 날아다니는 계절이 지났다. 그 아이는 내 주변을 조심히 맴돌았고 의아했던 그 모습이 익숙해질 때 즈음, 내게 불쑥 기차표를 내밀었다. “춘천에 가자고? 난 네 이름도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미소야. 기다릴게...”

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그 아이는 내 시야 밖으로.

지금 생각해보면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호감도 궁금함도 미안함도 아닌,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나도 내 감정이 무엇인지 아리송했다. 그렇게 춘천을 다녀오고 우리가 같이 하는 시간은 늘어갔다. 그 아이는 내 다른 손과 발 같았고, 내 마음과 머릿속을 트레싱지로 베껴 그려본 듯했다. 나는 도통 그 아이의 속내를 알 수 없었지만, 엄마같이 포근했고 오랜 친구처럼 편했다. 어떨 땐 그 아이의 눈을 보면 마음이 두근거렸다. 내가 이래도 되나? 그렇다고 우리 둘 사이에 특별한 다름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그 아이가 언제가 나의 선 안으로 훅하고 들어오는 법이 없었다. 지극히 감정적인 내가 몇 번 묻고 싶었다. 그럴 때면 내 마음을 읽었는지 어디론가 빠르게 도망가버렸다. 그 아이. 우리 둘의 관계의 시소는 가을과 겨울을 지나며 조금씩 무게중심이 이동해갔다. 나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성큼 다가갔고, 딱 그만큼 그 아이는 뒤로 물러섰다. 다른 이들에게 우리는 그저 여고 동창생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다만 나에게 평범 이상의 대상이 되어갔다. 두근거림은 뜨겁지 않았다. 그런데 마음 한쪽이 달궈져 갔다. 그 아이의 감정은 식지 않았다. 다만 내 심장은 묘하게 차가워졌다. 부글거리며 끓어올랐다. 떨어뜨리면 산산조각이 날 듯 얼어버리기를 반복하며 쓰라렸다. 아스팔트 위에 갈린 무릎처럼 상처가 났다. 피가 흐르는 것도 아닌데, 너저분하게 쓰렸다.


이런 게 아니었는데, 그 아이와 처음 춘천을 향했을 때는 지금과 분명히 달랐다. 그 아이에게 물으려 하며 여전히 묘하게 회피하며 입을 다물었다. 나 또한 원하는 것이 있는 건 아니었다. 단지 답답함이 꽉 틀어막고 있는 우리 둘의 일방 통행로에 하나의 길을 더 내고 싶었을 뿐이었다. 두 팔을 넓게 들어 올려 중심을 잡으려 애써봤지만 그 아이와 나는 평행선을 걷고 있다는 사실만 분명해졌다. 내게 다가온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100℃와 0℃를 오가던 나는 36.8의 체온을 되찾아갔고 가로수 밑에 쌓여있던 눈은 천천히 사라져 갔다.

그날도 언제나처럼 그 아이가 우리 집 근처로 찾아와 내가 좋아하는 분식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 아이가 내 접시 위에 단무지를 한 장씩 올려놓았다. 그리고 내 빈 컵에 조용히 따뜻한 물을 따라다 주었다.

“우리 친구야?”

“응? 왜 갑자기... 그래 미소야?”

“그럼 아니야? 난 너에게 어떤 사람이야? 난 너를 모르겠어.”

“......”

“아.. 정말... 넌 알 수가 없다.”

“미소야... 그냥. 그러지 마.”

“내 심정을 네가 모르지도 않을 텐데, 나 이상해. 날 이상하게 네가 만들어. 그런데도 넌 말을 안 해줘.”

“미소야... 미안해...미. 소. 야...”

“아, 나간다. 오늘은 내가 살게. 이것도 잘못된 거야. 왜 네가 매번 모든 걸 해주니?”

단무지를 집던 젓가락을 내려놓고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지갑을 꺼내려는 내 손을 잡았다. 그 아이가. 내게 손을 댄 적이 단 한번 없던 그 아이가 다급히 다른 손으로 구겨진 돈을 던지곤 뛰쳐나갔다. 이건 아니다. 그 무엇도 아니다. 애써 사람의 체온으로 돌려놨던 마음의 온도는 미친 듯 올라갔다.

“야! 기다려. 가지 마. 너 가면 이게 끝이야. 다신 안 본다고! 난 너에게 별것 아니니까! 나도 그럴 거야! 넌 나에게 더는 특별하지 않아.....”

그 아이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리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지난 일 년간 내게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눈물이라는 것을 보이며.

“미소야. 그래 우리는...”

잔뜩 흐린 얼굴을 비벼대는 그 아이에게 내가 말을 건넸다.

“그래 우리는 이렇게 되는 거야. 별일 아니야. 괜찮아. 별일 아니야.”

한걸음 반쯤 떨어져 내 얼굴이 비치는 그 아이의 눈동자 안에 마음을 전했다. 그 아이도 그랬다. 그저 받아들였다. 온 얼굴을 구겨가며 애써 터져 나오는 눈물을 삼켰다. 내 말에 답도 없었다. 그냥 고개만 위아래로 움직였다. 나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고 싶은 손을 잡아당겨 안녕을 고했다. 뒤돌아 걸었다.


별일 아니려고 했다. 별일 아니라고 했다. 그렇게 아무렇지 않으려 했다. 21살 늦은 사춘기는 스스로 봉해버리며 끝나버렸다. 미열의 이빨 자국만 손등에 남긴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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