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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몽 Jul 06. 2020

그가 감당해야 할 몫의 일인가?

김 혜진, < 9번의 일>을 읽고

‘ 일 다하고 죽은 무덤 없다. ‘


끝내려면 끝이 없고, 오르려면 위가 보이지 않는다. 추락하기 시작하면 한순간이다. 후루룩 한순간에 무너져 일의 무덤 속에 매몰되고 만다. '살려고 일하지 일하려고 사는 건 아니잖아.' ​그의 아내 혜선이 말한다. 나는, 우리는 쉽게 그렇다 답한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살고 있는지. 산다는 것은 무엇이고, 그 안에 일이 차지한 지분은 얼마나 될까?
물질적 대가를 받으며 일정 시간과 장소에서 목적에 부합한 행동을 하는 것이 일이다. 현실 속에서 우리는 크던 작던 테두리 안에서 일을 한다. 물론 개인적 일을 하기도 하지만 결국 능동적으로 소속을 선택할 뿐이다. 대가를 위해 거대 조직 안에서 나를 소비한다.


일의 대가와 나는 동일하지 않다. 대가와 삶도 같지 않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이 둘이 같다를 넘어 일에 개인이 종속되고 있다. 개인보다 일, 개인보다 회사, 개인보다 사회가 우선이 돼버렸다. 나 스스로도 닭과 달걀 중 무엇이 먼저인지 이 질문에 마음만 어수선해진다.  250여 페이지의 가벼운 책, 책장은 제법 잘 넘어간다. 그러나 책장을 덮은 뒤 머릿속 생각의 길도 수월히 나고 있는지는? 물음표만 수없이 찍힌다. 우리에게 일이란?

<9번의 일>의 주인공은 26년이라는 시간 동안 통신회사의 설치기사로 일했다. 오랜 세월이 그의 몸에 각인시켜놓은 자신의 일. 그러나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저성과자, 관리대상이라 낙인이 찍힌다. 그는 권고사직을 거절한 채 일의 변두리로 계속 내몰리나 어떻게든 붙어있으려 발버둥 친다. 누구나 겪을 수 있고 맞닿을 수 있는 일, 그 무게에 매몰되어 태두리 밖으로 내몰리는 과정을 사막의 건조함으로 써 내려간다. 심지어 그는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는다. 그 일의 끄트머리에서 고유명사가 아닌 9번으로 명명될 뿐. 회사와 사회가 만들어놓은 컨베이어 벨트의 한 조각, 9번 나사와 볼트일 뿐이다. 쓰임이 다하면 다른 부속으로 쉽게 대체 가능한 소모품일 뿐이다. 개인의 존엄성은 찾아볼 수도 없다. 일이란 블루스크린 뒤의 개인. 참담하게 어두운 그림자에 잘려나간 염색체일 뿐이다. 그럼에도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이 몸담아왔던 일에서 벗어나지 못한 다. 일이란 늪속에 스스로 빠져들어간다. 

믿음은 하루가 가고, 계절이 쌓이고, 서로의 표정과 목소리에 익숙해지고, 버릇과 습관 같은 것들에 길들여지고, 그런 지루하고 지난한 과정을 수없이 반복하고 난 다음 생겨나는 것이었다. 그는 그토록 어렵게 생겨난 것들이 이처럼 쉽게 망가질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_ p35

긴 시간 회사를 통해 자신이 얻은 것과 배우 것, 바라고 원한 것. 이루고 누릴 수 있었던 모든 순간들을 부정할 마음은 없었다. 회사에 속해 있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했을 그 시간들 모두를 부인하고 싶지도 않았다. 회사에 쏟았던 시간과 노력이 다만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일이었다고 말할 자신도 없었다. _ p85

시간이 흐르면 회사가 자신에게도 그만한 대우를 해줄 거라는 확신이 있어서였다. 동질감과 소속감, 연대감 같은 것들이 늘 그를 커다랗게 둘러싸고 있었다. 그건 회사가 직원들을 대하고 품는 방식이었다. _ p105

이렇게까지 하면서 자신이 잃지 않으려고 하는 게 무엇인지, 이런 식으로 무엇을 얼마나 지켜내고 있는 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_ p154

그러니까 가까운 사람들  틈에서 너무나 쉽게 갈등을 만들고, 무엇이 미움과 불만을 부풀리는지 아는 영악하고 지능적인 회사의 실체를 비로소 목격한 기분이 들었다. _ p159

그러니까 그가 회사에 기대한 건 마땅히 자신에게 주어져야 하는 것들이었다. 존중과 이해, 감사와 예의 같은 거창해 보이지만 실은 너무나 당연힌 것들을 바란 것뿐이었다. _ p168​

그는 퇴사의 압박이 가해지자 자신과 일의 관계지수에 대한 깊은 사유의 시간을 가진다. 그는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일을 밟고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일이라는 갑은 비교적 온화한 언어로​ 그를 설득한다. 그는 앵무새처럼 혼잣말로 자신에게 묻고 답해간다. 일과 회사에 대한 그의 생각이 깊이가 변해간다. 아니다. 알아채간다는 표현이 알맞을지 모른다. 열심히 해나감이 쌓이고 이를 당연히 회사와 사회가 보듬고 안아줄 거라 굳게 믿었던 그이다. 그러나 현실은 차디차다. 시퍼런 칼날을 등 뒤에 숨기고 있었다. 결국 그의 삶은 바라는 삶이 아닌 모습으로 점점 변화되어 간다. 가정도 친구도 일터의 관계도 건조함에 말라비틀어져간다. 사막의 밤과 새벽이다.

찐 감자 열댓 개, 생목 올라오는 듯한 책


소설은 독자에게 일이란 돌덩이로 온몸에 꽁꽁 묶어 책을 덮게 한다. 현실 속 사실을 언론 보도보다 더 객관적인 시선으로 묘사해낸 책. 드라이아이스로 가슴을 수없이 긁어 생채기를 낸다. 우리는 이 책이 말하는 거대 기업이 어디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이것뿐일까? 계절이 바뀔 때면 신문 지면을 적시는 고된 일에 대한 기사가 수두룩하다. 누가 잘못이며 누가 나쁜가? 일? 회사? 소수나 개인을 무시하고 줄 세우기로 평가하고 잘라내는 기준을 만들어내는 사회? 아니면 내가 아니라 조용히 눈감아 버리는 내가 악의 시작일 모른다. 나는 감히 돌을 던질 수 있을까? 나 역시 나의 일이 되었을 때 올 바른 잣대를 무감각해지고 미온의 열기를 지켜낼 수 있을지. 솔직히 말하자면 자신은 없다. 그러나 노력해야 한다. 나에게서 멀지 않은 이야기일지 모른다. 이 소설 속 주인공이 바로 내 가족일 수도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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