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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몽 Oct 26. 2020

가을이 넝쿨째 굴러온 이화원

14년 만에 느껴보는 북경의 가을, 이화원의 새로움 만나다.

첫 번째 기상 알람이 울렸다. 손끝에 눈이 달렸나? 귀가 달린 걸까? 내 손은 찌르르 울리는 알람의 진원지를 잘도 찾아냈다. '딱 8분만 더자고 일어나자. 눈 한번 더 감고 일어난다고 전쟁이라도 나니?' '아니야! 유니 지각해! 출근과 등교 준비에 도움을 주면서 네 모닝 루틴도 사수해야지! ' 악마와 천사가 매일 아침 십 분을 십 년처럼 싸웠다. 머리를 흔들며 아침 스트레칭을 마치고 나와 반백의 큰 아드님과 꼬마 아드님의 출근과 등교를 무사히 마쳤다. 모두 집을 나서고 설거지를 시작했다. 홀로, 나 혼자 있는 집안에서.


올봄 이사한 북경 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은 부엌이다. 중국의 부엌은 개수대도 작고 수납공간이나 동선이 이상하게 꼬여있다. 요리하는 자를 전혀 배려치 않는다. 이 집의 부엌도 요리를 하기엔 불편하지만, 이를 메우고 남을 커다란 창문이 있다. 6층 부엌 창밖으로 높이 올라와 있는 나무들. 손짓하듯 바람에 흔들리는 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커다란 공원 벤치에 앉아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게다가 시간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하늘빛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한국은 가을이 이미 한창을 지났다던데. 이곳의 나무들도 얼마 전부터 급히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나무 꼭대기부터 시작한 노랑이 물결은 하루가 다르게 좌우 아래로 번져갔다. 이대로 이 가을을 보낼 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14년 만에 맞는 북경의 가을, 만추를 맞이 하러 나서야 할 때다. 가을이 짙어지다 못해 흘러가버려 겨울이 서둘러 오기 전에.


워낙 나무가 드물고 산다운 산이 없는 곳이 바로 여기, 북경이다. 시외로 나가 볼까 하다. 가까우면서 울긋불긋함이 돋보일만한 곳 어디가 있을까 고민 중에 이화원이 떠올랐다. 쭈니를 안고 업고 뒤쫓으며 가본 것이 마지막이니, 그게 언제야?  15여 년 전 북경에 온 친지들과 3번 정도 가봤지만 돌배와 무식하게 큰 인공호수만 기억이 나고 나머지 기억은 흐릿했다. 그도 그럴 것이 호기심 박사님 쭈니가 막 걸음에 익숙해져 어디로 뛰어갈지 모를 때였다. 쭈니 뒤꽁무니만 보았지, 이화원의 풍경이 내 맘을 적혀줄 여유가 없었다.


15년 만의 이화원 나들이라. 나는 이것이 뭐라 한껏 설레었다. 9월 초 북경에 와 북서쪽으로 나서는 첫걸음이라 기대감은 한껏 커졌다.  코로나로 인해 매표 인원에 제한이 있었다. 중국의 관광지는 사람들이 몰리기 전에 가야 하는 것이 포인트! 사람 구경만 하고 푹 꺼진 기분으로 터벅터벅 돌아올 수도 있다. 주차 상황도 어찌 될지 모르니 서둘러 나서는 것으로.  여권과 핸드폰의 헬스키트를 확인하고 일찍 이불속으로 쏙 들어가 잠을 청했다.


회색빛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민 햇살이 다행히 여유로운 주차장 바닥을 비추었고 이화원 입구를 향하는 길가의 나무들은 모닥불이 피어오르는 듯했다. 내 품으로 안겨오는 가을 향기도 살포시 잡은 유니의 손이 참 따뜻한 걸음이었다.


이화원의 영문 표기 'Summer Palace'만 놓고 보면 마치 황실의 여름 별장 같지만 이는 서양인들이 '颐'의 뜻만 보고 직역한 것에 가깝다. 16세기 이래 이화원은 '清漪园(청의원-맑은 물결의 정원)'으로 불리다가 청말 서태후가 대대적인 복원을 하며 '이양충화(頤養衝和)'의 뜻을 취해 청의원에서 이화원이라 개칭하며 지금의 이름을 얻었다. 이양충화는 '밝은 양의 기운으로 담백한 평화를 추구한다'는 의미이다. 이화원은 인공호인 곤명호와 이 흙으로 쌓아 올린 만수산으로 크게 나뉜다.


오늘은 서황후의 별장과 불향각이 자리한 동쪽보다 서쪽으로 돌아보기로 했다. 관광보다 충만한 감성을 담아보기로 했으니까. 인당 30원하는 모터보트를 타고 곤명호를 넘어 서쪽으로 향했다. 이 호수의 넓이가 자금성의  4배 가까이 된다니 중국의 스캐일은 매번 놀라울 따름이다. 흑조들이 노니는 호수를 가로질러 반대쪽 산책로에 올랐다. 지역주민들에게 무료로 개방되는지 일요일 아침 홀로 또는 가까운 이들과 함께 산책을 하거나 달리기를 하는 이들이 제법 많았다. 이곳에는 행궁 전각과 라마식 사원 건물에 청의 흔적이 가득한 동쪽과는 다른 시공간이 존재했다. 우리 가족도 그들의 걸음에 한걸음 보태 천천히 가을의 고즈넉한 오전을 담았다. 바닥에 누워 사진도 찍고 풀숲을 헤치며 서울과 태가 다른 갈대 사이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에 한껏 취했다. 수십 번 이화원에 와본 남편도 이쪽은 처음이라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새로운 전각들과 볼거리들 사이를 누비니 하늘의 해는 머리 위에 올라와 있었다. 출출해진 배를 핫도그 하나로 달래고 창랑(Chang lang , 长廊)을 빠르게 지나왔다. 서유기와 삼국지의 명장면들이 생생히 그려져 있는 천정이 전해주는 이야기를 다음 기회로 미루고. 노랗고 붉은 색감을 가득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계절의 이화원과 만날것을 약속하며 아쉬움은 잠시 주머니속에 넣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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