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베어 물다.

나의 봄은 어디쯤에…

by 화몽


늘봄.


우리는 늘 봄에 서 있어야 한다.

살아있다는 것. 살아간다는. 산다는 건, 어쩌면 살아지기 때문이란 말처럼.

무거워진 두 발을 주무르며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노랫말, ’ 또 하루가 멀어져 간다.‘ , 그렇게 누구나 나날을 흘려보낸다.


봄은 늘 우리 한편에 묻어있다. 조금만 손을 뻗으면 닿을 그곳에서 기다릴 뿐이다.

망설이지 말자. 한 잎, 두 꽃, 세 바람, 네 송이의 구름에 깃든 봄의 사소함.

늘봄은 다시 찾아온 것이 아니라, 어쩌면 지금 여기에 스며들어 기다리고 있다.

기다리고, 멈춰 서고, 바라보고, 또 그렇게 서성이다…

결국 봄은 연둣빛을 울컥 쏟아낸다.


그럼에도 살아내는 순간, 연둣빛의 그을음이 가득한 새봄.

끝 겨울이 얼룩져 붙어 있는 소매를 털어내는 연둣빛 이파리, 그 투명함의 반짝임에 눈이

얼어 엉긴 땅껍질을 어깨로 밀고 구겨있는 허리를 겨우 펴고 첫 숨을 뱉어내는 여린 순.

그 힘겨운 미숙함, 쓰으윽 내 손끝으로 보듬어낸다.

애달파라, 아득히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흙 내음이 한껏 풋풋한 꼭지를 딴다.

아삭아삭, 한입 베어 물면 두 입 세입 이어지는 늘봄. 그 봄에서 새로 난다.

봄의 풋내에 혀끝에 닿는다. 후유… 하고 불어넣은 숨결이 나를 살려 세우고, 매일의 이유가 된다.


봄의 풋내에 혀끝에 닿는다. 후유… 하고 불어넣은 숨결이 나를 살려 세우고, 매일의 이유가 된다.


봄의 새 숨을 지닌 뿌리와 줄기, 잎과 꽃을 입안에 가득 머금는다. 뿌리를 뽑아낸 달래와 냉이, 줄기를 엮어낸 두릅, 어린잎을 모은 쑥과 봄동, 단단한 꽃망울 유채와 진달래를 고이 눌러 고슬고슬하게 부쳐낸다. 우리 땅에서 태어나, 가장 먼저 새날을 알린다. 포슬포슬한 향기가 그릇마다 서로를 보듬어낸다. 쌉싸름함이 찌르르하며 나를 두드리면 겨우내 묵었던 응어리가 스르르 녹아내린다. 자연을 받아들이면 구부정한 허리는 솟고 걸음은 봄을 바라본다. 자연스레, 그러하게…


인고의 계절을 견뎌낸 자국이 바로 봄나물이다. 태고의 시간을 삼키는 일, 햇살과 바람, 굽이굽이 흐르는 물의 기운을 모아낸 생명의 흔적을 조물조물 무쳐낸 것이 우리네 음식이다. 살아온 시간을 고스란히 씹어 내일을 지켜낼 약속이다. 겨울을 견디고 한 해를 보내기 위한 다짐이 올라온 밥상. 구수한 된장과 달큼한 간장, 소금으로 맛을 낸 할머니의 주름에서 흘러나온 달큼함. 쌉싸름한 맛은 손끝에서 코흘리개 시절의 한 조각을 끄집어낸다.


민들레 한줄기와 주변에 무심히 자란 잡초들을 뜯어 엄마 놀이를 하던 그 시절. 집 앞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굴러다니는 돌로 자르고 무쳐 한 상 차려 동무와 나누던 그 동그란 마음은 어디로 흩어져간 걸까? 어린 시절의 놀잇감이 지금 내게는 사유의 길을 열어준다. 해가 질 녘 온 동네에 울려 퍼지던 소리, 우리 이름을 부르며 찾던 엄마의 목소리가 시간이었던 그때. 작은 뿌리 하나, 두어 장의 잎사귀, 고사리손이 꼭 쥐었던 줄기의 가녀린 생명력은 그 시절에 멈춰버렸다. 봄 채소들은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다. 부족함은 견디어낸 할아버지의 지혜였고, 몰래 마음 하나를 더 올려주시던 할머니의 따스함이었다. 꼭 이어 잡은 가족의 손이었으며, 오늘의 아이들에게 전해줘야 할 작은 선물이었다.


이제는 집 앞 마트에도 이미 때를 잊을 과채들이 가득하고, 바다 건너온 온갖 새로운 먹거리들이 줄줄이 있다. 우리네 밥상을 구수한 미소로 채우던 봄나물들은 찾아보기 힘들어지고 그 자리를 오색찬란한 산해진미가 차지하고 있다. 피자와 햄버거가 익숙해지는 아이들에게 지켜내고 이어가야 할 ‘봄의 연둣빛’을 전해주고 싶은 건 나만의 욕심일까?


봄을 먹는다. 자연 그대로를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기억과 굽이굽이 이어진 세대를 먹는다.


새벽을 베어 물고 갓 눈을 뜬 개나리가 꾹… 꾹 하고 맺힌 초등학교 담장을 가득 채우고, 길과 길, 시선과 시선, 발걸음과 발걸음이 멈춰서 봄빛 신호등을 바라보는 투명한 네 눈빛에 달린 망울들이 뽀로롱하며 터져 나오는 풋풋함이 곧 늘봄이다.


늘봄이다. 그러나 다시 온 봄이다. 매초 매분 매시, 매일이 돌림노래처럼 다시 오지만 단 한음도 같은 음은 없다. 어제의 음표와 오늘의 음표는 다르다. 반복되는 숨겨진 차이를 알아차릴 때, 그제야 새로 온다. 같은 소리로 불러내는 봄은 없다. 들려오는 봄 향에 귀를 열고, 잊혀가는 봄을 돌아보며 맞이하는 나로. 우리의 마음도 돌아온 그 봄에 열린다.


“아직 남은 꿈들이 많아 그리움만 쌓이네”라는 노랫말처럼…


봄도, 한 날의 조각도. 삶의 결도 흘러간다.


그러다 나를 잡아 흔든다. 불쑥 다가와 내 곁을 훔쳐 간다.


살아있다고, 살아간다고, 산다는 건, 어쩌면 살아지기 때문이라며…


연둣빛 숨을 확 쏟아낸다.


그것이 낯선 봄, 새로 터진 봄이다.


봄. 너의 봄은 어디에. 나의 봄은 어디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