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걷는 길, 함께하면 더 멀리, 이 봄, 나와 걷자.
“ 어우,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다니. 조만간 다시 만나.”
아쉬운 인사를 남기고 몸을 돌려 가방 안으로 손을 밀어 넣는다. 어디쯤 있나, 손끝을 꼬물꼬물, 바로 여기. 이어폰을 꺼내 준비를 마친다. 쪽빛 하늘을 닮은 플레이리스트를 클릭, 전주만 흘러나왔을 뿐인데 나는 이미 날고 있다. 어깨가 절로 흔들, 박자가 둠칫, 달콤한 노래는 부르는 나는 이미 가수다. 찡긋, 눈꺼풀 사이로 번지는 높은 하늘. 봄이 뭉게구름 닮은 퐁신한 길을 내어주어, 그 위를 춤추듯 미끄러진다.
그 시작이 언제쯤인지 아리송하지만, 나는 무작정 발길을 내디뎠다.
초록 내음이 조곤조곤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내는 산길을 지나, 동네 꼬마들이 우당탕 뛰어노는 집 앞을 거닌다. 강가에서는 연인들의 사랑 노래에 빠져들고, 도심 한복판의 길에서는 삶의 애증과 고단함이 젖어든다. 누군가의 어제와 오늘, 그다음을 함께 걸으며 나누며 걷는다.
빵 터져 나온 웃음 덕에 즐거움이 가득할 때도, 주르륵 떨어진 눈물이 발등을 적셔도, 내 발은 멈추지 않는다. 무거운 어깨가 무지개다리 앞에 서고, 고양이수염처럼 간질거리는 한가로움에 배시시 기지개 켤 때도, 나는 걷고 또 걷는다. 내 발이 향하는 곳으로 나아가면, 내 안의 감정들은 들기름에 무친 봄나물처럼 향긋하게 변신한다.
매일은 서쪽 하늘로 달아나는 해를 잡아 묶고 싶을 만큼 즐겁다. 그러나 때론 발끝이 닿지 않는 땅속 끝으로 영혼이 달아나버려, 우울함이라는 이름의 연못에 퐁당 빠져버리기도 한다. 그렇게 생각에 생각이 더해져 머리의 무게에 목을 가눌 수 없을 때면, 편한 신발을 꿰어 신고 문을 박차고 무작정 나선다.
걸어야 할 이유를 따질 필요는 없다. 내 마음이 향하는 곳으로 발걸음이 따라가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고민도, 잡념도, 기억도, 혹은 아무것도 없는 공허도_그저 걷는 순간이 된다. 숨결이 턱 밑까지 차오르는 리듬감 있는 걸음도 매력적이지만, 오감의 촉을 세우며 풍경과 함께 걸으면, 속도감이 주는 쾌감과는 다른 감성이 밀려온다.
존재하는 모든 것과 들숨과 날숨으로 대화를 나눈다.
숨을 쉰다는 그 자체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그래, 나는 살아있어.”
때론 목적을 가진 걷기에 출사표를 던진다.
“지리산에 가보고 싶어.” 10살 소년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아이와 산행을 시작했다. 14살 소년과 나는 서울 근교 산을 탐험하며 어느 정도 준비가 되었다는 느꼈다. 그 길 위에서, 나는 그의 단단한 뿌리로 거듭나고, 소년은 가슴속에 씨앗을 심었다.
우리나라 삼 도를 넘나드는 길,
산 다람쥐처럼 계곡 길을 오르락내리락하며 16개의 봉우리를 지나 약 46km 넘는, 대장정이었다.
발밑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의 화엄사 진입로. 헤드랜턴은 빛을 잃고. 소년과 나는 계곡물소리에 의지해 별빛을 따라 새벽을 걸었다. 어둠 속을 떠도는 별처럼, 우리는 서로에게 기댄 채 길을 만들어나갔다. 나무숲 사이로 비치는 아침햇살을 들이마시며 첫 봉우리로 향했다. 노고단에서 바라보는 산그리메, 우리의 언어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풍경이었다. 그저 존재할 뿐, 그 자체가 황홀경이었다.
반달곰의 먹이로 삶을 마칠 수 없다는 소년의 말에 이를 악물고 서산으로 지는 해를 쫓아 세석 대피소에 도착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주먹밥을 우겨 먹으며 스르르 감긴 눈. 눈 떠보니, 아뿔싸! 해는 이미 밝았다.
"천왕봉 일출은 고사하고, 오늘 안에 평지를 밟으려면 빨리 가야 해!"
두 눈에 불을 켜고 급히 움직였다. 구름 위로 솟은 천왕봉을 지나 중봉, 치밭목 대피소를 거쳐 대원사 탐방로 출구에 도달했다.
'내가 아니 우리가 해냈어!' 감동의 눈물은 핑 돌았다. 안도감에 두 다리는 힘을 잃고 꽈배기처럼 꼬였다. 말없이 꽃을 터뜨리는 봄처럼 툭, 밀려드는 파도처럼 쏴아, 파고드는 바람처럼 휘익, 쏟아지는 눈발처럼 펑펑하고 쿵쿵… 쿵. 심장은 요동쳤다.
바람이 연주하는 피리 소리에 맞춰 춤추는 운해의 고요한 움직임. 태양은 용암보다 더 뜨거운 붉은빛으로 구름을 물들이며 하루를 불태웠다. 그렇게 꼬박 이틀을 걸어냈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내려 다리를 질질 끌며 또 걸었다. 아이와 나는 앓는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서로의 우스운 걸음에 키득거리며 웃었다.
두 발로 세상을 걷고, 두 발로 세상을 느끼며, 두 발로 세상을 배운다.
어디든 닿을 수 있다. 걷기란 그런 것이다.
사각의 프레임 안에서 딱딱해진 모난 생각을 깨뜨리고, 발을 내딛자. 차가운 현실을 따뜻한 마음으로 바라보면, 봄길은 어느새 내게로 열린다. 햇살 속을 무작정 걷다 보면,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이 내게 안긴다.
현실이란 주머니 속에 숨은 칼날 같아,
차가운 손으로 얼어붙은 일상을 움켜쥔 채 놓지 않는다.
그러나 누군가의 손을 맞잡는 순간,
투툭, 얼음이 깨지고, 따뜻한 온기가 터져 나온다.
한발, 또 한발.
서로의 발걸음을 포개지는 순간, 이미 우리는 서로를 채우고 보듬는다.
하나였다. 세상에 던져지며 갈라진 쌍둥이처럼,
우리는 서로를 살아내면 된다.
/
달빛이 깔아놓은 길 위를 걷다 보면
봄이 어느새 내게 아쉬운 인사만 남긴 채 떠날지 모른다.
손안에 쥐어진 궂은 감정들.
봄향기에 취해, 그 감정들을 고요히 흘려보내자.
오늘, 바로 이 순간.
봄이 내어준 길 위에서, 새로움으로 한 발 내디뎌 보자.
내 손을 잡아.
같이 걷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