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오늘의 무늬, 여름_ 망고에서 늘 초록으로

끓어오르는 여름을 오르며, 나의 색과 결을 찾다.

by 화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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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워, 더워 너무 더워. 엄마. 살 수가 없네… 엄마, 너무하다….”


연일 이어지는 찜통더위에 지쳐간다. 인류 최대의 발명품이 없었다면 이 여름 어찌 견딜까? 에어컨을 끌어안고 있어도 여전히 덥다며 툴툴 거리는 인간난로 둘. 아이들에게 ‘여름의 맛은 뜨거움에 있다’라고 말하는 나는, 외계인일 수밖에.


기다란 수전에 손을 대자, 뼛속까지 시리다. 번쩍이는 스테인리스 냄비에 비친 얼굴이 낯설다. 여름 열기에 달궈진, 또 다른 나. 주방의 달그락 거리는 소리 속에 나는 또 하나의 내가 된다. ‘익숙해질 만도 한데, 대체 넌 누구니? 김이 피어오른다. 서둘러 면을 냄비 던지고 손목을 휘 돌리자 꼳꼳한 직선의 면발은 단숨에 원으로 말려든다. 뜨거움이란 갇힌 선을 단숨에 풀어버린다. 시계를 보며 녹아버리기 전에 건져 올린다. 손가락 사이로 차가운 물과 아직 덜 식은 면이 얽히며 계절이 갈라진다. 몇 번을 뒤집고 털어내는 사이 물방울이 이마에도, 팔에도, 우윳빛 싱크대에도 튄다. 투명한 점들이 여름을 쪼개며 박힌다.

발을 물리며 쪼그려 앉는다. 코끝에 매달린 김을 후 불어 흩뜨리고, 손을 깊숙이 밀어 넣는다. 두어 젓가락이면, 가슴속에 응어리진 열기를 모조리 끌어올려 흩어버릴둣하다. 오이와 삶은 달걀을 올려 식탁 위로 쓰윽 밀어 올린다. 베란다 밖의 여름은 여전히 타오르지만, 식탁 위에는 서리가 내리고 얼음이 언다. 창밖 매미의 소리는 쨍쨍 울리지만, 젓가락 끝은 시릴 만큼 차가운 소리로 부딪힌다.


두 계절이, 지금 한 그릇 냉면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다.


발바닥 아래 지압볼을 이리저리 굴리며, 고무장갑을 낀다. 뒤엉킨 개수대의 그릇들이 딱 요즘의 내 모습과 닮아있다. 뜨거운 물로 그릇을 헹기자 훅 치솟는 열기와 등뒤로 내리 꽂히는 에어컨의 냉기가 덜그럭거린다. 오늘의 나는 유난히 내 것이 아닌 듯 낯설다. 여러 개의 생을 동시에 살아내는 사람처럼.


앞과 뒤의 명암이 공존하는 여름의 오후, 낯선 내 안으로 깊이 들어가 보고 싶었다. 생경한 색들이 교차하는 아스팔트 위가 아닌 시간의 날실과 씨실 위로 올라가는 나를 그려보았다. 가벼운 짐을 꾸려 오롯이 나, 혼자의 시간을 가져보기로 했다. 팔레트에 빈칸을 채워줄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뜨거움과 차가움, 정반이 합이 되어 어우러짐이 피어나는 곳, 초록으로 지금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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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안에서 마주한 두 계절처럼, 밖은 여름이면서 또 다른 계절을 포함한다.


여름은 소란스럽다. 울퉁불퉁한 구름들이 북적북적한 하늘은 그렇다. 모래알들이 바글바글한 바닷가에 와글와글 몰려오는 파도며 뒤죽박죽 쏟아지는 빗줄기가 요란하다. 울그락불그락 찡그리다 터져 나는 웃음소리처럼 벽덕이 끓어오르는 여름의 맥박은 요동친다. 그 맥박 위에 내 발자국을 더하려 한다.


공항은 여름과 닮았다. 극과 극이 겹쳐지는 곳, 거대한 창을 사이에 두고 굉음을 내뱉으며 하늘로 솟는 엔진의 꼬리가 보인다. 플라스틱 의자들 사이로 겹겹이 쌓여있는 여행 가방들은 새초롬한 표정으로 나와 마주한다. 앉아있는 자리가 차갑다. 이른 시간이라 사람들의 뒷모습은 땀으로 젖어있었다. 그 등을 바라보는 내 손이 젖는다. 입산 시간을 맞추러면 제주 공항에 내려서 바로 버스를 타야 한다. 길치인 나는 입술이 마른다. 산에서 마실 물만 준비한 터라 내 눈은 바로 편의점을 찾았다. 냉장고 문고리를 열고 생수 한 병을 껴냈다. 탑승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 빨라지는 걸음을 따라 파란색 뚜껑을 돌려 물 한 모금을 마셨다. 한 모금의 사소함이 백록담으로 가는 첫걸음이 되다니. 사실 거창하려다 보면 준비만 하다 끝나버린다. 게이트 앞 줄의 높낮이는 편의점의 냉장고 안 같다. 수많은 이들의 이야기 속에 혼자 선 나, 이번 산행은 온전히 나 혼자의 몫이다. 비행기 창문 밖은 아직 검푸렀다. 물 한 모금을 다시 마시고 잠시 눈을 감았다.


미리 준비한 QR코드를 찍고 성판악 코스로 오르기 시작했다. 오래전 여름, 식구들과 오른 적이 있는 길이다. 고사리 같은 아이들 손은 꼭 잡고 올랐던 그 길, 오늘은 등산 스틱을 꼭 움켜 잡았다. 발끝이 한라의 길목에 들어서자 흙내음이 내게로 달려들었다. 제주의 숨은 충분히 다르다. 뜨겁지만 투명했다. 늘어선 돌 밭을 걸음마다 뜨거움과 서늘함이 교차했다. 곁에 늘어선 녹음에 땅의 잎맥이 비췄다. 발끝에서 하늘까지 이어진 셀 수 없는 삼나무 숲의 빛은 하나의 바닷속에서 나왔지만 완벽한 합집합은 없다. 같은 결속에 완전히 다른 색, 나의 팔레트에 비어있던 칸이 던진 물음표의 답의 윤곽이 조금은 보인다.


끝없는 돌계단속에 발목은 조금씩 흔들리고, 숨은 거칠게 갈라졌다. 호흡의 균열을 긴 선과 점을 반복하면서 신발끈을 조여왔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의 변주를 풀벌레의 목소리가 함께 했다. 바람이 쪼개어주는 박자를 따라 걸었다. 햇살이 내려 꽂이는 자리마다. 내 그림자가 젖어 흘러내렸다. 앞에도 뒤에도 아무도 없는 푸른 길에 혼자다. 남겨진 길은 두렵지만, 동시에 자유다. 나를 묶어두던 매듭을 풀어헤치고 비로소 내 주먹을 쥐어본다. 흐르는 땀을 팔등으로 문지르니 한결 가벼워졌다. 발아래에 퍼져있는 이끼들은 시간의 상처로 남아있었고, 나는 그 위를 딛고 올라섰다. 청춘은 지났지만 이곳이 뿜어내는 젊음이 내 등을 밀고 손을 잡아 끈다. 그래서 초록이다. 여름은 붉은색과 노란색의 전유물이 아님을 알았다. 내 발걸음과 맞추고 사각거리는 바람의 노래를 따라 부르며 하늘을 바란다. 오늘의 나는 별이 아닌 구름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했다. 흐르는 대로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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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인데도, 함께였다. 발소리만 들리는 길, 그러나 새들이, 풀벌레가 지천에 흐드러지게 피어오른 산꽃들이 답했다. 혼자였지만 외롭지 않았다.


높다란 숲길바닥에는 납엽과 작은 가지들이 겹겹이 깔려 있어 지친 내 발을 위로해 준다. 완전히 혼자지만 같이 오른다. 숲이 조금씩 옅어지고, 하늘빛이 가까워진다. 바위들이 크게 누워있고 다갈색 억새들이 그사이로 춤을 춘다. 초록은 조금씩 구름의 허리를 잡는다. 너름 숨이 되어 나를 위로한다. 오래된 지도 속에서 새로운 길을 내준다. 하늘과 땅이 맞닿은 경계가 내어준 백록담의 푸르른 물결. 꺼먼 까마귀들이 지키고 있는 문턱에서 숨을 주고받았다. 정신 나간 듯 껄껄껄 웃었다. 나만이 아니었다. 그렇게 열쇠를 찾아온 사람들이 있었다. 홀로 한라에 오른 여럿이 있었다. 우리는 눈만 마주한 채 묻고 답했다. 그리고 웃으며 흘렸다. 땀이니 눈물인지 모를 초록의 방울들을.


‘당신의 색을 찾으셨나요?’

‘네, 아니요. 어쩌면 찾았고, 아니면 찾을 겁니다. 당신은요?’

‘초록이 숨이 되는 이곳에서, 저는 곁을 만났습니다. 우리…’


백록담을 바라보는 내게 세찬 바람이 스쳤다.

홀로 올랐지만, 물빛은 깊었고, 하늘은 내 손에 닿았다.

비어있는 공간에는 우리의 숨이 가득 차올랐다.

산 길의 끝, 걸음은 멈췄지만 외롭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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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였지만, 색을 찾아가고 있었다.

혼자였지만, 단단해졌다.

혼자가 아닌 우리였기에 … 마음은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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