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움에서 고요로, 나를 건너가는 시간
초록을 뒤로 묻고 도심으로 돌아오는 내게 남은 잔향을 어루만지며 미소 짓는다. 이유가 있을까? 뭉글하게 남아있는 태양의 흑점이 목표였던가? 여전히 뒤엉켜 굴러가고 있는 도시의 경계에서 어딘가 남아있을 자리를 찾는 눈은 전과 엄연히 다르다. ’ 앞만 보고 달려!‘라는 사회의 격양된 논조속에서 나는 얼마나 지쳐왔을까? 옆만 보고 느리게 걷는 나는 항상 틀린 아이였다. 무쇠탑도 순간 지평선으로 넘겨버릴 뜨거움과 용광로의 불꽃도 심연의 바다로 던져버릴 차가움을 동시에 지닌 이 여름. ‘사회 통념이란 잣대가 알려주던 것들이 답이 아니다’를 깨우쳐가는 나는 여전히 뛰노는 아이다. 구획된 경기장에서 달리는 것이 아닌 언저리에서 뒹구는 그들과 다른 아이다.
한낮의 열기는 여전히 빌딩 숲을 뒤흔들지만, 새벽결에 실려오는 소리는 지난 몇 달 치열하세 생을 엮어가던 울음소리에 찌르르르 겹치듯 흘러가고 있었다. 어둠이 옅어져 가는 문턱에 초등학교로 향하는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줄어든때즘, 창문을 열었다. 거실을 지나 뒷베란다로 지나는 바람이 많이 서늘해졌다. 이제 슬슬 여름을 놓아줄 때인가 보다. 하늘은 구름을 가득 안은채 빠르게 움직인다. 일기예보를 보니 곧 비가 내릴듯하다. 아니나 다를까 후드득후드득 쌀알 굴러가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엄마와 약속을 잡았는데, 비라니.
맑은 날은 길 내음이 가벼워 좋고 비 오는 날은 빗소리가 감미롭게 나를 이끌어줄 테니. 비는 도시의 구석구석을 두드리며 계절을 밀고 나갔다. 우산살 끝에 맺히는 호감이 점점 커져 나를 끌어당긴다. 버스에 올라 자리에 앉았다. 듬성듬성 남아있는 자리는 온기를 나누며 한 방향으로 기울었다. 빗방울이 창에 남기는 짧은 문장들을 우리는 같이 읽지만 다르게 새겼다. 내릴 곳에서 서두르는 사람, 피곤함에 기대어 눈감은 사람, 가방을 뒤집어 오늘을 정리하는 사람, 핸드폰과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과 같은 길을 달리고 있었다. 버스 속 이들은 시간을 함께하며 각자로 살아가기 위해 찢겨 약속 장소로 향했다.
초록색 챙모자를 푹 눌러쓰고 커다란 검정 우산을 든 엄마가 손을 흔든다. 그러다 한쪽 어깨가 다 젖었다.
“엄마, 비 다 맞아.”
숨이 죽지 않은 방울들을 털어내며 엄마와 눈을 맞췄다. 우산 손잡이를 내가 잡고 무작정 엄마의 팔짱을 꼈다. 말이 필요치 않은 사이란 딱 이만큼의 거리다. 무심한 듯 위하는 간극, 좁은 골목길을 무작정 걸었다. 집을 나서며 간단히 식사할 곳을 찾아놨지만 숨이 들썩이는 거리는 우발적 사건을 필연적으로 만들었다.
“엄마, 여기 도넛 맛있어.”
“안 그래도 달달한 것이 당기더라. 너랑 나올 때 아니면 언제 먹겠니? 이 아빠는 건강에 나쁘다며 절대로 안 드셔. 들어가서 골라보자.”
그림자가 겹쳐지는 엄마와 나, 하나의 뒷모습을 가지고 쇼케이스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엄마가 고른 딸기크림도넛, 인절미도넛에 말차팥도넛을 하나 더 추가해 계산을 하고 우산을 펼쳤다. 건너편 커피숍에 들어가려다 좀 더 걷었다. 서울의 북쪽 거리가 보도블록, 가로수, 촘촘한 가게들의 간판들 사이로 끝없이 말을 붙인다. 적당한 다정함이 묻어나는 길이 마음을 보듬는다. 익숙함이 반복되는 이곳은 지금 잡고 있는 엄마의 손 같다.
좁다란 건물 1층에서 따뜻한 카페라테를 2잔 주문하고 3층으로 올라갔다. 한층 더 올라온 우리를 서로 칭찬하며 높은 의자에 앉아 한옥 처마들이 조각보처럼 이어져 있는 창밖을 바라봤다. 너머에는 분주한 걸음소리도 우산마다 부딪히는 리듬, 시곗바늘처럼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은 없었다. 내리는 비의 결 함께 나눌 뿐, 엄마와 나는 비가 더 내렸으면 좋겠다며 찻잔을 맞잡았다. 대화는 짧고 의미도 크게 없었다. 함께하다 흩어지고 주르륵 떨어지다 다시 하나가 되는 이야기를 따라가며 같은 장면을 나눈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빗소리만 보이는 이곳에서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들었다. 엄마의 웃음이 만드는 눈가의 주름이 말을 걸고 테이블 위를 닦는 내 손이 답을 했다. 그렇게 오고 가는 대화 속에 굵어지는 여름의 빗방울, 우리는 서둘러야 했다.
젖은 우산을 다시 폈다. 고였던 빗방울이 머리를 적시고 내리는 빗방울이 발등에 물들었다. 미로 같은 서울 북쪽 골목을 빠져나와 국립현대미술관으로 향했다. 외벽을 타고 올라가는 잿빛은 햇살을 머금고, 겹겹이 쌓인 걸음들은 도심에 붓질을 얹어갔다. 소음이 뒤엉킨 현실은 색색의 우산들이 빽빽한 출입구의 문턱에서 멈췄다. 한 발 더 안으로 들어서자 긴장된 고요함이 가득했다.
기계적인 발걸음 소리는 잦아들고 자유로운 움직임이 그득했다. 쉿! 하고 내 입을 막는 차가운 공기. 흑과 백의 선과 여백이 서로 주고받으며 면을 이루고, 건너편 벽면의 두터운 페인트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손을 던져 나를 낚아채었다. 미술관이 무너져 내릴듯한 굉음을 내며 나를 산산이 조각내버리는 거울, 낯선 사각의 틀이 던지는 웅성거림, 크고 작은 조형물들의 눈빛과 그림자에 숨은 모습을 따라다니며 비와 바람, 뜨거움과 냉정한 심장, 자연과 도시, 사람과 모두, 어제와 오늘, 오늘이 될 내일에 잠겼다. 침잠되는 빗소리처럼 여름은 이렇게 사그라져갔다. 꼬집어 말하지 않아도 나를 향한 의미들을 짚어내게 되는 순간들. 낯섦 속에서 반가운 나를 반겼다.
우리를 더 나아갈 수 없게 만드는 그림 앞에서 엄마가 말했다.
“ 비슷하게 그려보고 싶네. 무엇을 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자꾸 다시 보고 싶네.”
마주하고 웃었다. 무작정 그림을 향한 엄마의 눈빛이 친근했다. 나도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자꾸 다시 해보고 싶은 무엇이 여름이 뱉어놓은 숨결이 되어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타오르는 바람을 달리고, 푸르름 속에서 오르며 간직한 그 어떤 것.
잦아지는 빗줄기처럼 우리의 상념도 접혀갔다. 남아있는 여름볕이 가로수에 달려있는 물방울에 빛을 나누고 뜨거움 들은 차가움과 비벼대며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8차선 도로를 가득 채운 자동차들이 체온을 더하고 오가는 이들이 저어대는 팔다리의 맥박의 불씨가 여기저기서 피어올랐다. 다가가다 기다리고, 멈춰 섰다 마음을 기울이는 사람들은 회색지대에 산다. 비슷한 표정 유행을 좇는 옷차림으로 마다마다의 색을 가린 채 마저 내리는 비를 피하느라 바쁘다.
이번 정류장에서 내려 다른 버스로 환승해야만 했다. 우산을 챙겨 손목에 달고 단말기에 핸드폰 뒷면을 가져갔다.
”삑- 하차처리되었습니다. “
그렇네, 짧은 반바지에 마저 흐르는 여름비를 털어내며 다음 버스를 기다리는 내 등을 행복이 스며든다. 거짓말처럼 밝아지는 하늘이 수많은 단어들을 내게 새겼다.
치열한 계절이었다.
그 뜨거움으로 달려들었던 대가로 내게 남겨진 뒷모습은 아스라했다.
이리저리 흔들리며 조색하여 던져내듯 채워간 시간,
이제 나른한 온도로 깊이를 가늠해봐야 할 즈음이다.
남겨진 흔적들을 더듬으며 넘어설 시간,
조각들을 이어가며 또 다른 곳을 오를 때.
요란하지 않게 사그라드는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