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 자리 그리고 숨.
부드러운 곡선으로 깎인 모서리는 오늘도 그녀의 손길에 깎여나간다. 저물어가는 가을 달에 걸려 벗겨진 나뭇가지마저 탐낼법한 그녀의 젖은 손가락. 나를 누르고, 스쳐 갈 때마다 거친 결들이 조율되어 간다. 그녀와 그녀의 딸, 둘이 마주한 매 순간은 나를 문지르며 쌓여갔다. 함께 나눈 눈빛들에 나는 여물어 갔다. 이곳에 네 개의 다리를 단단히 붙이고 창 너머로 흘러가는 계절을 보낸 지도 족히 십수 년은 지난 것 같다. 어디 보자. 발을 싸고 있는 천 조각에 맺힌 냄새를 맡아보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르지. 음, 정확히 헤아리기가 솔직히 고백하자면, 어렵다. 하지만 그녀의 머리칼은 뿌옇게 흩어져가고 아이의 머리가 나를 훌쩍 넘어 곧게 자란 것만은 확실하다.
둘은 어깨를 기대고 서로의 입에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국물을 호호 불어가며 넣어주었다.
셀 수 없는 가시들이 눈치 없이 꾹꾹 박혀있는 생선 살을 발라 흰쌀밥 위에 올려주기도 했다.
매년 십일월이 시작하는 날이면,
끝자락이 설백에 닿아있는 크림 위에 소녀의 눈동자만 한 딸기들이 달큼한 향을 내며 굴러다녔다.
분홍,
노랑,
파랑,
초록, 빨강… 꼬인 틈새를 타고 내려오는 농들이 눈밭을 물들일 때,
그녀의 딸은 웃었다.
앙다문 입에 미소가 번졌다.
그래. 그랬던 것…
같다.
그녀 눈에 비친 입매는 티끌처럼 닫혀가고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 속에 징검다리 돌멩이가 뜨문뜨문 던져졌다.
내가 기대 숨을 나누던 상아색 벽은 굳은살의 흔적들로 짓눌려 순백은 다시 오지 않을 점들로 채워져 갔다. 호흡으로 남아있던 내 자국들도 뒤틀려갔다. 그 틈을 달력 낱장들이 털어낸 무책임한 먼지들만 머리를 잃고 흔들거리다 내려앉았고, 사이를 메워갔다. 깊은 숲의 넋을 간직했던 나는,
이제 없다.
그녀와 그녀의 딸이 마주하고 말없이 오가며 나누던 그때, 서로에게 옆을 흔쾌히 내주던 그 언저리에서 멀어져 갔다. 힘주어 비벼도 지워지지 않는 모녀의 잔상들로 물든 식탁보 끝은 부스스 바스러져 갔다. 돌아온 온기가 엉키며 피어올랐던 꽃들은 스스로 고개를 묻고 무의미해졌다. 그녀와 그녀의 딸이 잡은 손은 등을 돌렸다. 딸은 세상의 문고리를 잡았다. 그녀는 딸의 그림자만 바라보며 답이 없을 질문을 안고 무릎을 꿇었다.
나를 지켜내던 유리막의 볕이 꺼져가던 십일월의 오늘,
그녀는 부엌 구석에 머리를 박고 무언가를 찾아내느라 부산하다.
‘여기 어디쯤인데, 분명히…’
달그락달그락거리는 소리에 그릇들이 몸을 사리는 게 분명하다.
그럼에도 그녀는,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달린다.
‘찾았다!’
그늘 속에서 낚아 올린 것은 작은 유리병이 이제야 빛을 뿜는다. 화병은 시간의 저쪽으로 넘어가 멀어진 지 오래다. 그녀의 손 안에서 나와 새벽달이 비친 자리로 앉는다.
꽃을 꽂는다.
그녀는 내게 다가온다.
손등 위를 덮은 주름이 나를 쓱 하고 쓸어낸다.
그녀는 내게 기대 내게 남은 무늬보다 더 깊어진 손끝을 분주히 움직인다.
핸드폰을 내게 휙 던지고 그녀는,
초라해지는 오늘의 오후 위에서.
잃어가는 것,
흘려버린 틈.
우리가 두려워 덮어버린 겉껍질을
돌려내려는 듯
구멍 난 웃음소리를 되돌리기 위해
시간을 붙잡는다.
차르륵,
검은색 비닐봉지들을 풀어 던진다.
감자 두 개, 그보다 큼지막한 양파 하나가 굴러 나온다.
투명한 물방울들이 터져 오르는 물속으로 뭉텅이들을 던진다.
냉장고 안에서 된장, 두부, 달걀…
저건 또 뭐지?
이리도 숨 가쁜 공기가 부엌을 채운 게 언제였더라?
또각또각 도마와 부딪히는 소리에 구수한 내가 넓게 퍼진다.
소란스러운 보풀들이 검푸른 펜 위에서 익어간다.
나는 나를 더듬어 흔적을 뒤집어본다.
그래.
그녀의 딸이 내게 무섭게 달려들던 음식들이다.
우리의 매일을 수놓았던 그저 그때의 식탁이다.
깨진 밤들 사이로 스물몇 살의 소녀가
놓아버린 맛이다.
까맣게 잊고 있던 맨바닥.
거짓말 같은 두 사람의 호흡이 맺히던 내 가슴,
닫혔던 틈을 비집고 파도치듯 냄새가 흘러나온다.
흔들리는 커튼이 길게 눕는다.
바르게 누운 그림자가 내 위를 덮는다.
유난히 차갑게 늘어진 오후가
딸그락딸그락,
짤랑, 탁. 탁. 투욱- 툭
소리로 끊어진다.
엄마가 네가 좋아하는 두부 듬뿍 넣어 된장 끓였다.
양파 많이 넣고 달걀도 말아 ㅆ…
계란말이 조
ㅎ 아 하잔 ㅇ
… ㅏ
좋아하는 달갸 ㄹ ㅇ ㅣ
금방 올 수 있
ㅈ ㅣ
?
오늘 오
오늘 오늘 오
지?
기다릴게. 빨..ㄹ
빨리 ㅇ
기다릴게.
ㅃ
그녀는 메시지에 마침표를 찍지 못한 채
가다 오기를 반복하다 누른다.
어서 오렴.
반쯤 되어진 나를 앞에 두고 그녀는 앉는다.
나를 움켜 잡고 훅 내게로 온다.
셀 수 없이 쪼개진 손으로 나를 깨운다.
타타 탁, 탁, 톡톡… 손톱으로 문지른다.
핸드폰을 본다.
무력하게 어두운 화면은 길어져만 가는 커튼 사이의 그림자보다 깊다.
그녀의 눈틈 만큼 열린 창 사이로 십일월은 익어가고 타들어 가는 노을보다 붉게 번지는 눈가의 세월은 조금씩 내려앉는다. 문지르고 문지르다 나를 문대던 그녀의 손끝은 느려진다.
부르지 못한 이름만 내 위로 흐른다. 스르르
무너지듯 나를 안고, 닫은 눈을 그대로 남긴 채
그 새로 흔들리는 시간과 나와 닿은 젖은 꽃잎들만 힘겹게 숨을 이어간다.
한숨,
뜨거웠던 나는 무심히 도 식어간다. 무심하게.
두 숨, 세 … 숨…
숨, 결, 숨.
하.
스러진다.
……
…
………
‘틱… 삑삑-삐—-삐익-삑삑- 띡 —- 투욱—-‘
낮은 빛들이 현관에 스며든다.
어스름을 열고 들린다.
”어… 엄… 마…“
”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