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을 보다.

그림자, 기다림의 색

by 화몽


뒷모습에는 방향이 틀어진 표정이 있다.


시선이 향하는 곳이 아닌 마음이 머물며 남긴 잔향이 귓가를 맴돈다.


한 뼘씩 자라나는 그림자가 그렇다.

이어 붙은 발걸음의 늘어짐이 그렇다.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는 왼손이 그렇다. 문구멍 사이로 빗겨 흘리는 말들이 그렇다. 툭하고 던져진 돌방울의 동그라미들이 그렇다.

십일월의 숨바람에 휘 돌아가는 낙엽들이 그렇다.

들숨을 따라 올라오는 미색의 차향이 그렇다. 술레의 어깨가 들썩일 때 꾹 감은 눈이 그렇다. 손톱 끝으로 눌러 접은 메모의 모서리가 그렇다.

함께 굴렸던 주사위가 결국 혼자 또르르 1로 남을 때가 그렇다.

그렇게 사람, 사랑, 사색, 사슬… 하나는 둘을 사무친 목놓음으로 바라고 원하다 사르르 흩어지며 기다린다. 닿지 못한 땅의 끝은 차마 울지 못한 모서리다. 사각의 사이로 스미는 연회색 그림자는 텅 빈 틈으로 번진다.


연회색 코트가 둥실 떠오른 틈으로 날카로운 숨이 가라앉는다. 내려 붙은 무거운 침묵은 그의 모자와 함께 막 떠날 버스뒤에 남는다. 숨은 늘어진 채 다음을 잊어버리고, 늘 푸르른 버스 정류장, 안내판에 솟아오르는 붉고 흰 구름. 그 경계 위에서 신사의 먹색 가방이 날아다닌다. 그슬린 배기가스 사이로 가방은 던져진다. 먹빛은 흐릿한 구름과 애매한 햇살 안에서 검정글자와 흰 꿈을 오가며 더 까만 아스팔트 위를 기어올라 청회색 구두위에 한 점으로 맺힌다. 그 한 점은 이내 자주색 호흡으로 터진다. 이어진 붉음이 흙빛으로 사방으로 튀어 오른다. 다갈색 점퍼는 푸른 두 무릎 사이로 파고들어 문고리 앞으로 달려간다. 묵묵히 흔들리는 등줄기는 선은 다홍색 입술 끝에 멈추고, 수줍은 어깨는 땅속으로 꺼져간다. 흰 셔츠는 파르르 웃는다. 흰 셔츠는 문고리를 잡는다. 힘을 다해 움켜잡는다. 포개진 자리로 하얀 비가 내린다. 우윳빛 비가 드리치는 유리창을 지나가는 주황색 뒤통수가 신호등의 파란 불위로 살그머니 들어온다. 그가 거머쥔 빗방울은 고요한 떨림이 되어 걷는다. 8층으로 오르다 내려오는 베이지 발자국은 내려오다 뛰어올라 투명한 회전문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녀의 분홍색 목도리는 가슴 위에서 점점 빠르게 떨린다. 그녀의 분홍색 목도리가 문사이로 끌려들어 가 꽃으로 피어난다. 피어오르는 꽃망울이 맺힌 나무는 열매를 떨군다. 굴러가는 물보라색 과실들이 고백하지 못한 말들을 그린다.


그려진 물방울들은 단어들로 울컥 열린다.


버티다 멈춤, 여백으로 머문다. 영도의 기척. 머뭇거림, 간극, 틈과 한걸음 딱 그 사이의 자리. 한입 베어낸 미색의 레몬 한 조각이 실마리를 연다. 돌아온 출발점 위로 기울어진 햇살이 편의점 앞 노란 우산의 살이 되어 하늘로 다시 날아간다. 날아오른다. 날아간다. 당신의 뒷모습의 앞으로,


궁금해진다. 당신이라는 깊이에 손가락을 세워 넣는다. 둘째 손가락의 둘째 마디를 넘겨 차오르는 당신이라는 눈동자 앞에 나를 데려다 놓기를 바란다. 당신의 첫 숨은 69번 버스 차고지에서 불어온다. 나는 새벽빛을 어깨에 올려놓고, 조여든 가슴을 그 밑에 둔 채 내 안으로 숨어들어. 당신 발 등에 가 닿은 신경다발을 꼭 쥐고 희뿌연 침묵 속에 던져버려. 그럼에도 너무나 알고 싶다. 훅하고 달려가 묻고 싶지만 꾹 하고 누른 내 가슴에는 연녹의 그림자가 번져와, 초록이 살아내는 결과는 거꾸로 접히고 축축한 이끼의 냄새로 종이에 새겨진다. 문지르면 묻혀오는 녹청은 죽어가지만, 당신을 두드리기에 다시 눈을 떠 길어지는 그림자가 된다. 청록의 눈동자가 열리고 먹색의 새벽이 가시면 이 또한 살구빛 살결로 옮겨간다.


침묵을 이겨낸 끝과 끝이 만나는 찰나는 당신을 비추고 나는 뒤로 물러난다. 당신은 하나의 얼굴이 되고 나는 그다음의 존재로 남는다. 이토록 아끼는 존재라면, 사람을 바라보는 자리에 머물 수 있다. 자색의 구둣발에 치인다 해도 더 깊은 붉음으로 나를 채운다 해도 기꺼이 당신의 빛 그 너머로 넘어가 흙빛에 나를 처연하게 담글 수 있다. 반은 빛나고 그 절반은 재로 사그라진다. 잘게 부서진 종이들에 지난 간 시절을 다 남길 수 없지만, 바라보던 내 자리는 숨으로 흔적을 남긴다. 숨은 하얗고 흔적은 검게 변해가지만 그 사이에는 셀 수 없는 별빛이 흔들리기에 단 하나의 손톱으로 시간 위를 찍어 누른다.

자국은 바라본다.

세세한 기억이 남는다.


등 뒤로 넘어간 하루는 순백의 국화가 된다. 십일월의 황금빛 숨을 서서히 틔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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