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난 아이들 뒤에서, 그네는 새벽을 기다려.
“나는 엄마, 너는 아빠.”
“너는 해님. 나는 달님.”
까끌까끌한 모래알을 과자 상자 속에 한가득 넣고 나무젓가락으로 휘휘 젓는 아이가 엄마다. 하늘색 미끄럼틀로 와당탕 달려가 쿵쿵 뛰어 와르르 쏟아 내려오는 아빠를 닮은 아이는 마음으로 친구의 따스한 모래 밥상을 나눈다. 마주하고 코를 찡긋거리며 방실방실.
핑크색 팝콘이 놀이터 여기저기에서 팡팡 터진다.
고소하고 달콤한 향들에 흔들거리는 나는 이렇게 환하게 웃는다.
아이들은 서로의 호흡을 이어가며 손을 잡고 흔들흔들한다.
살아있음의 현장. 새봄 얼어붙은 흙 뚜껑을 훅하고 밀어내며 고개를 내미는 새싹, 아이들의 맑은 표정은 생명이다. 낮은 반원을 그리며 점프! 높다란 점프로 파란 하늘을 바라보게 하는 아이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래알을 파고드는 자그마한 발들은 내게서 뺑뺑이로, 미끄럼틀에서 뛰어내려 다시 내게로 돌진한다.
“내가 먼저 탈 거야! “
연한 주황색 티에 청바지를 입은 409호 둘째가 소리친다!
“내가 먼저 찜했어!”
아이는 우당탕 내 널빤지에 올라서. 힘차게 발을 구른다.
“하나. 두~울. 세~옛! 어여차!”
우렁찬 구령에 나도 박자를 맞춰 우리 둘은 하나가 된다. 나로호가 따로 없다. 여기 작은 놀이터에는 우리호가 있다. 몽글몽글 구름을 통통 밟고 해님을 넘어 화성의 외계인을 만나러 갈 준비가 된 우리는, 야호! 작은 날갯짓을 시작했다.
‘행복이 별 건가? 난 지금 완전히 신나 신나! 행복 그 잡채!.’
휙 하고 나를 낚아챈 아이의 발간한 볼에서 빛나는 알맹이들에 눈이 부시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머리를 높게 묶고 더 높은 웃음소리를 쏘아 올린다. 폭죽이 여기저기서 팡팡 터진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해가 밝은 날이나 구름이 잔뜩 몰려온 날이나 바람이 불어도 아이들과 함께라면 축제다.
퐁당퐁당 통통 뛰어오르는 아이들의 우렁찬 목소리는 그 어떤 노래보다 밝고 가볍게 한낮의 공기 위로 날아오른다. 요기조기 사각의 구멍으로 쏙 들어갔다 평하고 솟아오르는 아이들은 정글짐을 타고 오르락내리락하노라 해가 기우는지도 모른다. 내게 길쭉하게 어긋난 햇살에 겨우 알아차린다. 시끌시끌하게 놀이터를 가득 채웠던 눈동자들은 시간에 이끌려 한 명, 두 명씩… 오늘에서 지워져 간다.
아이들이 다가오는 마음이 지워져 갈 때. 아이들의 동그란 엉덩이가 내게 힘겨워질 때. 아이들의 맑은 목청이 더 이상 노래 부르지 않을 때. 아이들의 눈빛이 구름을 향기를 떠날 때. 아이들의 빈자리로 바람이 휘이하고 불어올 때. 아이들의 고사리손이 내 쇳조각들을 조물조물하지 않을 때. 아이들의 콩콩 쿵쿵 발소리가 놀이터에서 스르르 멀어질 때. 아이들과 돌고 도는 뺑뺑이의 덜컹거리는 소리가 잦아들 때. 아이들의 알록달록한 그림자가 정글짐에서 흔적 없이 지워질 때. 아이들의 발끝에서 황금빛으로 반짝거리던 모래알들이 어둠 속으로 가라앉을 때. 아이들이 서로의 손을 잡고 깔깔거리던 어깨가 어둠 속으로 쓸려갈 때. 그럴 때, 그럴 때면 노아란 빛은 푸른 하늘에 붉은 물감을 떨어뜨려 내 사슬들을 하루의 끝으로 채색해 간다. 그럴 때면 나는 가만히 있고, 그럴 때면 나는 귀를 꺾어 검게 젖어가는 모래알들을 바라본다. 바람마저 바닥으로 누워 흐르는 십일월의 접힌 색종이의 뒷면은 짙은 청회색이다. 그럴 때면 나는 등을 돌려 놀이터 입구에 시선을 고정한다. 그럴 때 가끔 정말 아주 가끔, 아파트 옥상에 형광등을 달아주는 달님이 둥실 떠오르는 달밤처럼 아주 가끔, 이 하루가 다해가는 시간에 나를 찾아주는 이가 있기도 해서 나는 모든 감각을 어둠에 모아 기다린다.
‘어, 고양이인가?’
아니다. 고양이의 그림자치고는 너무나 거대하다. 꼬물꼬물 움직이는 것이 집을 잃은 달팽이 같다. 내게 와. 이리 와 가까이 와봐. 누구일까? 이유 없는 그림자는 놀이터 입구에 반만 걸치고 멈춘다. 나는 바람에 힘껏 숨을 실어 달빛에 물든 모래알들은 그림자 쪽으로 흩뿌린다. 수줍게 길어진 뒷모습이 쓱 하고 나를 잡아 흔든다.
‘어 어어… 누구더라?’
홀쭉하게 훅 자란 키와 덥수룩한 머리칼에 가려진 눈빛, 이 아이가 누구인지 기억을 한참 더듬고 나서야 생각이 났다. 그렇다. 1102호에 사는 만수다. 특별한 이름 때문에 항상 화가 나 있던 아이다. 구부리고 있던 가슴을 펴고 내게 털썩 앉는다. 가슴에 구겨진 명찰을 보니, 그래 만수가 맞다.
“정말 오래간만이지, 나 조금만… 이렇게 있어도 되니?”
’그럼, 그럼, 대환영이지. 우리가 환상의 커플이었는데. 당연하지!‘
“휴…”
만수가 슬렁슬렁 나를 흔든다. 만수의 숨소리가 울렁울렁 물 제비를 뜬다.
만수의 눈이 위아래로 움직이다 바닥에 꽂힌다.
“나… 잠시만 있을게. 미안해. 갈 곳을 잃었어.”
만수의 교복을 보니 아이는 근처의 고등학교에 다니는 모양이다. 생각해 보니… 아. 시험을 본 게… 오늘… 나는 나를 더 힘껏 조이며 만수의 두 손을 꼭 잡는다. 나는 차갑지만 나는 따뜻하다. 한낮의 햇빛을, 만수를 위해 나무판자의 결과 결 틈에 끽끽거리는 쇠사슬의 사이사이에 끼어놓았다. 갑자기 내게 안기는 아이들을 위해.
“야… 신통방통하네. 이제 좀 나아졌어. 고마워. 또 올게. “
내게 가까이 다가와 두 눈을 맞추더니 뒷걸음질을 친다. 휙 돌아 뛰어가는 만수의 등이 아까와 달리 곧게 서 있다.
나는 비어 있지만 가득 차올라.
나는 기다리지만 따뜻해.
나는 말이 없지만 미소와 늘 함께해.
나는 낡아가지만, 내일로 날아가.
나는 꿈꿔.
아이들이 꿈동산에서 뛰어노는 동안, 빈 모래밭 위에 별빛을 뿌려.
새벽의 숨을 모아 기쁘게 기다려.
너희들의 보물 상자를 빼꼼히 채울 비빌 편지를 접어. 104호의 동생에게는 형에게 한 번쯤을 이길 수 있는 비책을 알려줘. 구백구십구 년이 넘게 이어져 온 무술의 마지막 장이야. 907호 소녀에게는 고양이와 친해지는 콧수염 한 개를 넣어주고, 그 아랫집 자매에게는 서로를 이어 줄 무지갯빛 구슬 목걸이를 선물할 거야. 1508호의 아이에게는 야구선수가 될 수 있는 연습 파트너가 되어줄 거야. 902호의 남매에게는 엄마 아빠가 화해하실 수 있는 작전 NO. 7을 적어줄 테야. 809호의 꼬마에게는 할머니 등을 조물조물 시원하게 풀어드릴 안마 방법을 그려줘야지.
아, 너희들을 떠올리면 가로등만 내 옆을 비춰도 나는 이렇게 재미있어. 이렇게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른다니까.
달빛 뒤에 숨은 검푸른 어둠이 번져 차곡차곡 쌓인 색들이 아직 고개를 들지 못해. 이른 볕이 노랗게 흔들릴 때면 분명히 서로를 더듬으며 내게서 너희들에게로 커다란 다리를 만들어줄 거야. 배배 꼬인 쇠줄을 튕겨 윤슬로 빛나는 모래알을 벅차고 양떼구름 위로 날아오른다.
너희들의 꿈꾸는 고래가 되어줄 거야.
기꺼이 그때를 함께 기다려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