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지 않은 책들

고요한 읽기_나, 기다림, 글

by 화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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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월의 끝자락은 유독 고요함이 정점을 찍는 계절이다. 그도 그럴 것이, 매서운 바람이 일기 전이요, 숱한 잎새가 둥지를 떠난 후라 더하다. 차 한 잔이 전하는 따스함이 그리워지고, 아무렇게 던져놓은 신발들의 무심함이 유난히 내 눈에 밟힌다.

서재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나란히 꽂힌 그들의 키가 다름에 눈이 간다. 크고 작은 점, 길고 짧은 선들이 모이고 겹쳐 의미로 쌓여간다. 맺히면 반드시 풀어지듯 빽빽이 이웃하고 있는 문장들 사이를 비집고 나간 숨구멍들이 사방에서 손을 내민다. 내민 손에 쓱 하고 내 손을 올리기에는 난 가볍고 꼭 하고 그 손을 움켜쥐기에는 난 여리다. 고요한 이 시각을 온전히 내 것으로 하기에는 난 여전히 유치하니 애달플 뿐이다. 그럼에도 직관적으로 나를 잡아끄는 것들을 품어본다. 가슴 위에 올려놓고 그들의 소리에 내 숨을 맞춰본다. 사람들의 시간, 함께 살아간다는 소란스럼이 솟구쳐 올랐다 잠잠해져 쉬어간다. 똑딱거리는 시계 소리마저 긴 수평선으로 팽팽해지는 이곳은 깊은 고요함이 한빛으로 잔잔히 차오른다. 나는 홀로 내가 되어,


읽기라는 행위의 안으로 들어간다. 무채색은 무음에 덧붙여진 잔 울림으로 묘하게 귀에 걸린다. 사라져 가는 밤의 끝을 잡고 넘어가는 빛의 스펙트럼은 한낮에 터진 홍수보다 거대한 파도로 만들어 나를 쓸어버린다. 침묵의 읽기는 높고 낮음으로 그릴 수 없다. 밤새 울어 쇳소리가 긁어내는 그런 지나간 나의 상처다. 새살이 돋기는커녕 흐르는 눈물이 멈춰주기만 해 달라 바라고 또 바라는 나의 읽기다. 무심히 열린 채 뒤집혀 던져진 비어 있는 책. 남겨진 것이 없는 책. 쓰인 것이 없는 책. 그 책은 나를 기다리는 책이다. 읽음으로써 살아나는 책이다. 쓰인 책이 아닌 읽힐 책이다. 나를 관통하며 한 올 한 올 다시 엮여갈 책이다. 나를 파고든 문자들이 삶으로 일어날 책이다. 나를 찢고 들어와 빛과 어둠이 뒤엉켜 세상으로 나아갈 책이다.

상상이 문장이 되고 문장이 세상이 되고 세상이 내가 되고 내가 고요로 돌아가는 여백의 페이지들이다. 틈 사이로 빠져드는 나는 깊어진다. 빈방은 내 숨으로 오롯이 차오른다. 많이 읽어 알맞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 아니다. 밀도의 층위가 오르며 알아가는 사람이 되어간다. 던져진 백지 위로 떠오르는 단어들의 울림에 눈을 기울이자 읽히기 시작한다. 모든 소리 모든 색 모든 행동 모든 감촉 모든 응어리를 길어 올리는 순백의 우물이 내 손에 잡힌다.

그 속살의 결에 내 손이 스며든다. 떨리는 숨을 삼키고 고요함에 기댄다.

이제 읽는다.

이제 나는 눈으로 읽는다.

이제 나는 손으로 다시 읽는다.

이제 나는 몸으로 돌아서 읽는다.


읽기 전에 나는 무에서 흩날리는 횟빛을 보았다.

읽으면서 나는 횟빛들이 앞뒤로 부서지고 위아래로 튀어 올라 모서리 그 각각의 끝과 시작에 스며들며 번져가는 숨겨진 말들을 보았다.

읽고 나서 나는 숨겨진 말들이 서로에게 호흡이 되고 그 호흡이 생의 점이 되어 처음으로 돌아가 가고 서로가 되어 다시 더 깊이 하나로 입을 모았다. 그림자의 여백에 빛을 흘려 끝이 되어 결국 처음으로 이어지는 호흡을 보았다. 희미해져 가는 끝을 지나 한 장의 종이, 다시 그 가운데를 분철하여 결국 쪼개져 존재하더라. 존재라는 의미의 끝까지 옅어지다가 서둘러 가슴을 맞닿은 두 개의 목소리가 한 소리로 읽어내는 나를 보았다.


돌아간다. 처음으로,

마주한다. 끝에서,

다시 출발로 그러나 이미 나는 다르다.

제자리지만 두발은 이미 두발 너머다.

두발은 두발 이상의 나로 다시 걷는다.

그렇다.

수평을 바라보던 두발은 안과 밖으로, 영원은 두발 끝에서 부서지는 하나의 선이 된다.

수직을 노래하던 두 눈은 위와 아래로, 모순은 두 눈 사이에서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점이 된다.

된다. 되어간다.

나는 되어가는 사람이다. 나는 되어가야만 하는 사람이다. 되어가야만 하는 나는 막 부서져 버린 하나의 조각일지 모른다. 찰나의 조각임에도 더 작아져 버릴지 모르는 찰나임에도 되어갈 사람이다. 만들어진 나와 만들어질 나 사이 어디쯤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나는 데미안이다.

데미안은 말을 그린다. 나는 단어를 노래한다. 데미안은 나이고 나는 데미안이라는 경계가 되어간다는 시작이자 끝이다.

그렇기에 뜨거워지고 그럼에도 식어가는 나는 글을 쓴다.

글은 글을 짓고 글은 글을 피운다.

피어오를 나는 내가 될 글을 기다리며 글을 쓴다.

고요한 읽기는 나를 쓴다는 의무이자 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