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_새탁소
새하얀 새 옷이 되는 꿈은, 적어도 이곳에서는 사치다. 꿈은 그저 꾸는 허상이다. 그리고픈 그림일 뿐이다. 바람이 일면 일어나는 방향으로 사그라져갈 생각에 덧붙여진 가냘픈 가지일 뿐이다. 나는 새순에서 뻗어갈 가지가 고플 뿐이다. 꿈은 무리수 그 자체다. 새로워질 나는 이미 새까맣다. 새까만 새인 나는 새집 속에서 새하얀 깃털들만 쪼아댄다. 눈부시게 낯선 깃털들을 길게 이어 새 옷을 해 입는 꿈을 꾼다. 분에 넘치는 꿈일 뿐이다. 이런 바람 빠진 꿈 꾸러 가는 나는 덕분에 소중한 것들을 낭비하고 만다. 예를 들면, 점심으로 튀기다 말아 눅눅한 기름 냄새가 진동하는 넙데데한 공책 두께의 돈가스를 먹는 수고, 친구들과의 약속에 앞머리를 구루뿌로 돌돌 말아 탱글탱글하게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손길, 검은색 보부상 가방 속 주머니 안에서 녹아 터지기 직전인 커피 맛 사탕을 혀끝에 올려 이리저리 굴리며 맛볼 달콤함, 아빠의 일급비밀을 탈탈 털어 볼록 나온 배를 살살 돌려 십 년 묵은 체증을 한 번에 날려버릴 정성, 이번 달 편의점 1+1 행사 속 애착 아이템을 주워 담으러 신나게 달려갈 새까만 회색 슬리퍼. 이런 것들을 허술한 숨으로 후 불어 날려버린다. 나를 중앙에 두고 굴러가는 세계에 대한 반항이다. 되는대로 살아가는 내게 사전 속의 삶이란 분에 넘치는 일초일초일초들이다. 새하얀 겨울 같이 새하얗고 차가운 새 눈이 내리는 새날이란 탈탈 털리고 툴툴 굴러가는 어긋난 바퀴들이 툭툭 튀어 오르는 그런 날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진정으로 소박한데 말이다. 새하얗고 싶다는 것. 이것뿐인데, 다들 내게 손가락을 겨눈다. 사방으로 손끝을 튀겨가면서 꿈도 꾸지 말라며 비웃는다. 귀를 막아도 보이고 눈을 감아도 들린다. 두어 걸음 뒤에서 수군거리는 새까만 눈동자들이 빙글빙글 돌아가며 내 등에 박힌다. 박힌 눈동자는 이리도 가렵다.
새하얘지고 싶다. 더 하얘지고 싶다. 세상을 향한 툭 불거진 그 시간, 그때 정지. 멈춘다. 꼼짝 마라. 그대로 완벽하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윙윙거리며 돌아갈 때마다 첫 번일 때로 되감긴다. 내 꿈이 움텄던 그 사랑으로 망설임 없이 달려간다. 한발, 두발, 세 발… 탁탁탁 거리는 소리에 눈을 맞춘다. 숨었던 고개를 든다. 사방이 새하얗다. 새하얀 새벽의 새탁소. 아, 세탁소. 새하얀 입김들만 떠들어대는 여기는 건널목 옆 김밥집과 피아노 학원 사이에 끼어있는 세탁소이다.
한낮의 뒤척임은 무겁게 나를 누른다. 내다 버릴 하루는 무심히 돌아간다. 뒷머리를 타고 넘어오는 웅웅 거리는 소리를 따라 저문 날은 나를 또 세탁소로 향하게 한다. 늘어져 입을 수 없는 고무줄 바지처럼 눈꺼풀은 무겁다. 분명 나는 혼자인데 내 눈에 또렷이 마주한 그들은 나를 누른다. 입안으로 뜨거운 쇳물을 부어 내린다. 이곳엔 나뿐인데 나는 혼자가 아니다. 축축해진 티셔츠를 벗는다. 아침에 하나 그 뒤에 또 하나, 지금 하나를 벗는다. 속옷도 내리고 흘러내린 바지도 바구니 속에 넣는다. 달아올라 녹아 흐르는 어깨에 바구니를 짊어진다. 새하얗게 되어가야 해. 누가 준 숙제인지 내가 내게 붙여준 일들이 매일의 내게 녹아든다. 덜컹거리는 형광등의 작은 깜박임이 나를 떠민다.
‘딸깍__칙, 쓰윽’
밀리며 열린 문이 나를 잡아 민다.
‘덜덜덜, 웅우우웅… 덜덜덜, 우웅우웅 드르륵’
‘위잉_ 탁, 위잉_ 탁…. 위잉위___’
소리만 남았다. 나와 소리만 동그랗고 그럼에 새하얀 유리문에 겹친다. 영원하다. 이어진다. 끝없이 반복되는 움직임이 길어진다. 소리만 따른다. 누가 볼까 두렵다. 바구니에 숨어있는 축축한 나를 세탁기 안에 급히 던져 넣는다. 누가 들을까 가늘게 숨 쉰다. 크고 작은 몇 개의 세탁기 앞에 반쯤 걸쳐 있는 어둡고 가벼운 의자를 펼쳐 바닥에 던져 몸을 기댄다. 둔탁한 기계들만 숨 쉬는 곳. 살아있는 숨 대신 끼익 끼익 하는 소리만 나풀거리는 섬의 모래사장. 사람들이 배배 꼬여있는 육지는 저 건너다. 투명한 유리문을 넘어 신호등이 손 흔드는 건너편. 묘한 사이는 비어 있고, 나는 반대편에 있다. 섬.
덧놓인 다리 위에 올려진 손가락의 끝만 돌고 도는 유리문의 빛을 따라 그린다. 따라 그리는 그림자 아래 놓인 발가락들은 손에 붙은 그것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빙그르르 돌고 돈다. 세탁기는 눈앞에 있지만 몸 밖에 있다. 기대앉은 몸은 내 것과 내 것이 아닌 낡은 하루에 마침표를 찍기 위해 돌고 도는 빛나는 기계들 앞에 있다. 기계들은 참 부지런하다. 이리도 열심히 일을 해내는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나 하나뿐이다. 아마 다른 사람들은 더 바쁘게 일하는 모양이다. 나만 흔적 없이 한가롭게 이곳에 앉아 있다. 그 아래 던져놓은 옷가지들이 덧없이 탁해져 있다. 아침부터, 이 밤까지 물고 빨아 눅진해진 이것들은 내 안에 고인 물인지도 모른다. 모이고 모여 고인 물을 내일을 바라본다. 오늘만 겨우 살아낸 나는 세탁기가 막 토해낸 옷가지들보다 미련하다.
‘쳇…’
나는 젖어있는데 다들 혼자 잘도 돌아간다. 비어 있는 세탁기가 없다. 붉은 숫자들만 깜박이며 내게 말을 건다. 나는 사람의 소리를 안다. 그들 사이에 오가는 말들도 듣는다. 말들이 품고 있는 고요한 이야기에 마음을 열 준비가 되어있다. 그럼에도 나는 푹 젖어있다. 알아서 돌아가는 세탁기들 앞에 앉아 있지만 누워있고 점점 더 굳은 물속에 빠져들어 간다. 그런 내게 들린다. 이런 나는 말한다. 나만 기다리고 있는 여기가 그렇다.
‘기다려. 그래, 거기에 멈춰. 앉아 있어도 좋아. 힘들면 누워. 그러다 지금 그 옷마저 젖으면 벗어. 여기는 세탁소야. 기다려. 거기에 던져. 너는 돌아가도 좋아. 힘들면 가. 그렇지만 기다려. 지금은 여기서 웃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