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층 버튼
스스로 밝아질 수 없다. 하늘과 땅이 이어진 기다란 통속에 굵디굵고 강하디 강한 쇠줄에 매달려 있다. 나의 머리끝에 해와 달 별과 바람이 닿아 있지만 나는 또한 축축한 어둠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다. 그래서 스스로 어두워질 수도 없다. 대롱대롱 달린 통속에 나는 여러 이웃과 이 질문을 나누고 있다. 스스로 해낼 수 없고 스스로 하려는 의지도 없는 나와 우리는 하나의 방법으로 세상과 함께한다. 기다림.
기다림의 자리는 묘하다. 입 꾹 닫고 고요한데 내 안은 엉망진창이다. 가리고 피어나는 미소처럼 이른 봄의 젖은 흙덩이처럼 보드랍고 희미하게 전해지는 이 자리의 온도는 나를 막 떠나간 아이의 손끝 같다. 그 끝은 지난 하루의 마지막을 타고 오늘의 빛으로 돌아온다.
‘띵.’
‘12층입니다.’
치리릭 츠르륵. 칠판을 긁는 여학생의 손톱에 분필 가루가 떨어진다. 자국난 칠판은 내 친구와 비슷한 울음소리를 낸다. 지금, 이 소리처럼 말이다.
덜컥 덜커덩. 묵직한 두 개의 철문이 서로를 밀어낸다. 순간 빛이 내린다. 우리 안에서 작은 웅성거림으로 피어오른 숨결은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든 햇빛에 사그라든다. 헉하고 되삼 킨 숨은 컥 하고 목젖 아래로 숨는다.
‘1층’
주르륵 붙어있는 나와 친구들은 손길을 그 살아있는 뜨거움을 향해 눈빛을 쏟아낸다. 그럼에도 선택된 것은 대부분 나다. 두툼하고 속을 다 가려버린 서늘한 저 문이 열리면 여러 개의 발이 쏟아질 때가 있다.
통로의 벌려진 틈으로 소심한 발을 스르륵 밀어 넣는 소녀,
쿵쿵거리며 뛰어 들어오는 3층, 5층, 4층 그리고 그 밖의 높이들에 살고 있는 아이들의 운동화들.
또각거리는 자신감,
또르르 굴러들어 오는 자전거 바퀴,
츠르르 굴러들어 오는 유모차의 바퀴들 그리고 또 어떤 바퀴들이 있더라.
여행 가방, 크고 작은 택배 상자들을 그득 싣고 끄르륵 밀고 들어오는 수레의 무게.
18층에 사는 백발의 노인 부부의 손에 질질 끌려 들어왔다.
그 들의 앞 그림자가 되어주는 바퀴 등등의 둥글둥글한 굴림.
휙 하고 던져진 작업화 바닥에는 오래 묵은 체념이 붙어있다.
스치고 밟고 밀고 끌고 툭툭 차며 구르고 쓱 끼어들고 주르륵 흐르고 톡톡 두드리고 삐걱거리고 휘청거리며 넘어오고 뜨거운 숨을 쉬는 그들은 이렇게든 저렇게든 그들의 날을 넘겨내기에 우리들 사이를 쉼 없이 오고 간다.
순간들을 숨김없이 주고받는다는 것을 그들은 모른 채 쉼 없이 내뱉는다.
마음과 말, 감정과 눈빛, 움직임과 생각을
마구 흩어낸다.
긴 머리를 아무렇게나 묶은 그녀는 통속에 달린 우리의 몸을 몸을 섞고 진심을 담은 빛으로 나간다. 머리칼을 양손으로 낚아채 울퉁불퉁하게 튀어나온 새까만 실타래를 정리하고 한숨을 내던진다. 그녀의 눈은 거의 매일 두발등 위로 내려앉아있다.
12
11
10
…
4
3
2
1
’띵. 1층에 도착했습니다. 문이 완전히 열리면 조심히 내리세요.‘
어느 발이 먼저랄 것도 없이 새 날의 시간으로 다가가는 그녀의 발은 오늘따라 더 무겁다. 발목을 잡는 그림자가 사방으로 번져있다. 그녀는 걷는다기보다는 바닥을 쓸며 나간다. 허벅지를 스치는 두 손을 저 아래까지 늘어진, 오래된 고무줄 같다. 늘어진 소매에 걸려있는 서류 파일과 노트북 가방의 모서리는 누렇게 닳아있다. 뜨거운 여름 늘어진 가녀린 나뭇가지처럼 그녀의 그림자는 가지런한 엘리베이터 턱을 겨우 넘어선다. 터덜터덜 굴러가듯 흐르는 그녀의 발바닥에 남은 건 미련이다.
나는 나를 누르는 이들의 끝에서 읽는다. 그들의 욕심을. 그들의 욕망과 욕정을… 그러나 나는 본다. 그들의 빛에 녹아든다. 가끔 의문이 든다. 분명히 어제에 그들인데 오늘과 내일이 다르고 같다. 나는 항상 같은 말을 하는데 말이다. 그들은 매 순간 흐른다. 흐르는 걸음이 반씩 어긋난다. 톡톡 발끝으로 말하기도 하고 툭하고 한발 두발을 낚아채 던진다. 짐이다. 그들의 발은 혈관이 막힌 채 터럭 던져진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처럼 반짝이며 춤추기도 한다. 통통통 튀어 오른다. 새 싹이 튀어나듯 숨이 터져 나온다. 죽어가다 살아나고 그러다가 사라져 간다. 분명 같은 발인데 말이다. 알다가도 모르겠고 모르겠다가도 나는 번쩍하고 밝아진다.
‘1층‘
나는 1층, 그들을 세상으로 떠밀어내는 나는 1층 버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