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을 보다

무채색의 턱

by 화몽

그런 우주, 그런 세계, 그런 계절, 그런 오늘, 그런 순간, 그렇게 여기서 날숨에 들숨을 더하는 나는 잃어가는 사람이다. 무엇을 잃어가고 있는지, 남은 것은 어떤 것들 인지도 가늠하기 어려운 나는 어디로 가는지 또는 돌아오고 있는지도 묻어놓은 채 낯설어 거칠어진 나무의자에 앉아 기차를 기다린다. 그리움은 수취인을 잊은 채 잔열로 배앓이가 된다. 살아서 살아진다. 그런 시간들이 쌓인 틈으로 툭하고 떨어진 미련은 참 아쉬운 환상을 남긴다. 삐걱거리는 나무의자는 내 두 발이 두툼한 시멘트 바닥을 문지르게 한다. 스적스적, 스윽 질질질… 오른발이 왼발을 따르고 왼발은 오른발을 기다린다. 두발마저 이렇게 친밀하고 오고 가는데 비어진 나무의자 위에 앉아있는 나는 찾아가기 위해 애태운다. 잡히진 않는 눈으로 끔벅끔벅거리며 내 앞에 흩어진 색의 조각들을 흩어내는 게 전부다. 십이월의 공기는 바스러지며 세상의 빛을 잃어간다. 내밀어진 손에 걸리는 건 온통 그림자의 가루다. 가루들은 입안에서 까끌거리며 조근거린다.


색은 사라져 가고 나는 지워져 간다.

‘젠장…’

뭐라고 씹어 삼키고픈데 기침만 난다. 책상 뒤로 떨어져 반쯤은 곰팡이가 피다 바짝 말라버린 귤조각처럼 어설픈 알싸함이 코를 찌른다. 그래서인가 기침은 멈출 생각을 안 하고 케켁거리며 발등 위로 떨어진다. 두발 앞은 한 치 앞이다. 두발 앞을 보는 나는 목이 막혀온다. 어떻게든 이 쾌쾌한 주황을 떨쳐 내고 싶은데 말이다. 입천장을 간지럽히는 시트러스향조차 무채색으로 번져가는 두발도 울고 있다. 가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 그려지지도 않는 턱에 막혀 회색바닥만 비비며 회색 먼지만 먹구름으로 띄어 올린다.


주어진 기대는 한 번도 내게서 떠난 적이 없다. 떨군 고개밑 그림자는 가슴속에 저며져 간다. 겹겹을 이루며 포개지는 잿빛들은 이리저리 굴러다닌다. 습관이란 이리도 무겁다. 마디마디 새겨진 자국들이 저리이리 나를 끌고 다닌다. 반복이란 이리도 차갑다. 냉기가 번져있는 기차역 바닥은 색을 잃었다. 빛은 허공을 건너오다 기억 너머로 숨는다. 그런데도 두발은 여전히,


‘아, 추워.’

나무의자 위에 던져놓았던 손을 주워와 주머니에 담는다. 마른결이 고스란히 옮겨진 두 손은 두발보다 더 깊숙이 딱딱해진다. 초승달에 베인 손은 한낮에도 더 가볍게 떠오른다. 주머니 속에서 손가락 사이에 끼어 부스럭거리는 것이 있다. 손끝으로 매만져도 읽히지 않는 종이쪽지는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는지? 읽을 수 없지만 내 눈에 보이고 내 귀에 들린다. 두 발끝이 기차역 플랫폼에 턱 하니 걸려 꼼작을 못하듯 두 손은 여름에 걸려 이 십이월로 넘어오지 못한다. 내 가슴이 그곳의 틈에 끼어 여전히 뜨거운 것처럼.


’아, 정말이지.‘

가슴에 파고든 지난여름의 노을은 지평선에 걸려 멈쳐있다. 내 모든 것을 회색으로 태워버린 채 모든 바늘들은 부러진 채 그곳에 있다. 플랫폼의 안내판에는 곧 다음 열차가 들어온다며 부산하다. 주머니 속에 풀어진 실끝을 조물거리다 지워진 종이쪽지를 접어 꼭 쥔 손은 상처가 된다. 그대로 굳어져간다. 펼쳐진 손에 그려진 단어들의 의미를 알기에. 나는 이미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알지만 모른 채 손을 오므린다. 덫에 걸린 숨은 열리면 안 된다. 나는 버려진 것이다. 나는 지워진 것이다. 나는 음소거된 스피커처럼 쓸모없는 노래가 된 거다. 영원이 되어준다는 새끼손가락 따위는 잘라 강물에 던져 버린지 오래다. 그렇다면 난 여기 이 기차역 플랫폼의 노란색 턱 너머를 욕심내면 안 된다. 놓지 않겠다는 손을 던져버리고 파도 속으로 몸을 던진 당신을 치열한 여름에 놓고 오리라. 그렇다면 난 여기 이 기차역 플랫폼의 노란색 턱 안에서 돌아가면 된다. 당신은 당신으로 기차에 오르고 나는 나로 역을 떠나 겨울의 색으로 숨 쉬면 된다.


나로 살아가면 된다. 안다. 그러면 된다. 안다. 그러면 되지만 이 무채색의 시간을 견딜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모른다. 안다. 모른다. 아…ㄴ…ㄷ…ㅏ. 두발만 서로에게 끼어 꼼작도 못하는 주제에 안다고 비비적거린다. 여전히 세상은 밝지만 빛을 잃어간다. 적어도 내게 여기 십이월은 조용히 사그라져간다.


말라붙은 나무의자에 들러붙은 나는 마지막 나를 태우며 빛의 괘도에 나를 보낸다. 언젠가는 무채색의 틈에 낀 나를 일으켜 세울 두발만 비비적 거리며, 후하고 얼어가는 숨을 내쉰다.


“ 용산행 열차가 당 역에 곧 도착합니다. 승차하실 분은 준비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