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입술로 읽다

사월의 미, 칠월의 솔

by 화몽

"그런데 왜 하필이면 서귀포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거죠? “

"재작년에 너하고 네 처 될 사람하고 하루에 열 시간씩 운전해서 뉴욕에서 여기까지 왔을 때, 나도 옛날 생각이 나서 폴에게 그 이야기를 했거든. 그러니까 옛날에 영화 찍고 나서 어느 날인가 극장에 영화가 걸리고 어쩌고 하는데 충무로 다방에서 만난 정감독님이 갑자기 내 손을 잡고는 갈 곳이 있다고 하는 거야. 그래서 따라나 섰다가 그만 서귀포까지 가게 됐거든. 맞아, 사랑의 줄행랑이었던 거지. 요즘 같으면 어디 파타고니아나 마케도니아 같은 곳으로 도 망쳤을 텐데, 그때는 외국으로 나갈 수가 없었던 시절이니까 나름 갈 수 있는 한 가장 먼 곳까지 간 셈이지. 그렇게 서귀포시 정방동 136-2번지에서 바다 보면서 3개월 남짓 살았어. 함석지붕집이었는 데, 빗소리가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 우리가 살림을 차린 사월에는 미 정도였는데, 점점 높아지더니 칠월이 되니까 솔 정도까지 올라가더라. 그 사람 부인이 애 데리고 찾아오지만 않았어도 시 정도까 진 올라가지 않았을까? 그 석 달 동안 밤이면 감독님 품 안에서 빗소리를 들으면서 누워 있었지. 나야 원도 한도 없어서 그때 그 사람 부인한테 맞아 죽어도 좋았겠는데, 어찌나 점잖게 자기 남편 손 목만 딱 붙들고 데려가던지. 그 부인이랑 애랑 감독님이랑 이렇게 넷이서. 덕성원이라고 둘이서 자주 가던 중국집에서 밥 먹고 헤어졌는데, 어찌나 평온한 작별이었던지 꼭 휴가 왔다가 돌아가는 일 가족을 배웅하는 여인숙 주인이라도 된 것 같았어. 언니들한테 맞 고 자라서 그런지 난 그런 게 더 서럽더라. 사람대접도 안 하는 것 같아서. 그렇게 그 사람 식구들하고 떠나는 거 보면서 미친년처럼 손 흔들고 나서 서귀포 집에 혼자 돌아가니까 세상에 나만 남은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나중에야 그 사람 그때 병이 있었다는 걸 알았지. 어쩐지 눈이 노루 눈 같아서 접도 많고 남 눈치도 잘 보는 사람이었는데 서귀포까지 도망가는 용기를 내더라니. 그게 다 자기 오래 못 살 거 알고 그런 거였어. 그렇다면 정을 주지 말 것이지."




왜일까. 이모는 왜, 다시 태어나려는 걸까. 시간, 삶, 몸과 마음 그런 것들에 이모는 마침표를 찍고 새로이 하려는 걸까. 그것도 제주, 서귀포에서? 나는 이모의 눈 너머의 깊이를 가늠해보아야 한다. 내 감은 눈 안에서 일어나는 파도에 몽돌이 서로를 비벼내듯 입안에서 까끌거리는 물음은 툭하고 내던져진다. 이모를 내가 본다. 이모에게 나를 건넨다. 이모가 나를 본다. 이모는 머뭇거린다. 이모의 귀가 일어나고 코끝이 우쭐거리자 얇게 포개진 입술이 떨린다. 이모만이 알고 있다. 이모의 것들, 몇 개의 울타리를 거슬러 건너에 있는 수풀 속 흩어진 작은 돌멩이 같은 그런 것들 말이다. 여기 내 손 안에서 만지작거려지는 그런 조각들이 달빛에 녹아 흘러 이 밤을 닫아버리듯 말이다.


이모는 꺼내 놓는다. 돌멩이들에게 이름을 붙여준다. 나와 지금의 아내, 진경도 그중 하나다. 우리 사이에서 휘몰아치던 사랑, 그 진부한 뜨거움을 안고 이모가 있는 곳으로 차를 몰았었다. 불구덩이에 던져진 메마른 종이처럼 화르르 일순 재로 날아가버린 열 시간, 브레이크가 사라진 운전대를 움켜쥐고 날아간 그곳에는 이모의 낯익은 거울 조각들이 조각난 채 흩어져있다. 폴은 그녀의 푸른 날들을 조각난 거울 너머에서 읽을 수 있었다. 이모의 시린 가슴속에 박혀있는 더 푸르른 유리조각. 그 누구도 더듬어 건져낼 수 없을 것 같던 네 개의 발 밑의 서귀포. 달도 별도 아닌 흠뻑 젖은 푸르름이 오고 가던 그곳, 서귀포시 정방동 136-2. 수평선을 따라 흐르던 검푸른 숨결도 오가는 파도너머로 속삭이던 그 둘의 다짐도 샛별을 따라 더 먼 바닷속으로 자맥질했다. 하나의 태양아래로 낮게 옮아 붙은 그 둘은 그렇게 90여 일을 그 둘에서 내일로 넘어가는 점, 한 덩어리로 엉켜가던 하나이자 둘인 그들은 찰나의 약속에 젖어든다. 서로로 엮어가던 항아리의 겉은 함석으로 만들어져 있어 그 위를 구르는 빗방울은 소리 내어 운다. 파도를 거슬러 묶인 붉은 매듭이 튕겨지며 내는 음색의 한구석은 촉촉이 맺힌 안녕이다. 우리가 살림을 차린 사월에는 미 정도였는데, 점점 높아지더니 칠월이 되니까 솔 정도까지 올라가더라. 촘촘히 박힌 약속의 노래는 더 이상 높아지지 못하고 길을 잃는다. 돌고 돌아 헤매던 길은 그 사람의 부인의 손에 쥐어진 아이의 눈망울 앞에서 무너져간다. 무너져버린 길은 벽이 되고 벽이 된 무너진 길에 구르던 눈망울이 나의 숨을 거둬가도 좋으련만 눈망울은 그의 뒷모습만 남긴다. 이모의 두 팔이 덩굴이 되어 숲으로 키워가던 그의 등과 어깨는 이제 흐느끼며 멀어진다. 그 흔한 눈물도 더 흔한 더러운 말들도 없다. 평범한 얼굴로 내 얼굴을 바라보는 그 얼굴은 더는 말하지 않는다. 0도의 눈빛이 나를 얼려간다. 차라리… 나를 불태워버리지… 나를 저 밖의 깊이로 던져버리지… 살갗 아래가 뜨끈해진다. 서로의 젓가락으로 한 끼의 그릇을 밀어내다 나를 밀어내고 그는 가족들에게로 걸어간다. 멀어져 간다. 사라져 간다. 흐려져간다. 아, 그는 세상에나.. 그는, 그 사람은 내게서만 떠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세상에 등을 진다. 시간의 틈으로 숨어 들어간다. 달아오른 내 가슴을 겁 없이 끌어안더니 그는 시간의 다리를 건너 모든 것으로부터 마침표를 찍는다. 그런 거다. 그래서 그는 용기를 낸 거다. 그녀는 소리가 닿지 않는 파도 위에서 가슴은 열어 운다.



김연수의 《사월의 미, 칠월의 솔》을 읽고, 이모의 목소리로 화몽이 이어 썼습니다. 함석지붕 위 빗소리가 사월의 미에서 칠월의 솔로 올라가던 90일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