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척
뽀얗게 피어오르는 따스함, 한숨의 국이 나를 그득히 채운다. 뽀얀 김에 서린 웃음소리는 너구나. 뽀얀 김의 건너편에서 찡긋거리는 눈빛은 너로구나. 뽀얀 김을 후후 불며 후루룩 마시는 너는 너다. 젓가락 부딪히는 소리가 참 바쁘다. 바쁘게 열리고 닫히는 네 붉은 입술 두 쪽은 아침 사과보다 귀한 과실이다. 붉음을 여러 갈래로 쪼개면 사계절이 다 들어간다. 따뜻한 온기와 뜨거운 열정과 조화로운 결실과 차가움 속의 소중함, 이런 것들이 붉음의 결 사이에 좌우로 엮여 있다. 저절로 자신을 여미게 되는 일월은 아마도 붉음과 가장 멀리 있는 붉은 달이다. 한밤의 달이 처 슬프게 아래로 웃고 있는 오늘 같은 날 어쩌면 하늘은 더 짙은 빨강이 번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 하늘의 대부분은 무거운 바다, 더 깊숙한 심해에서 올라오는 날숨이 던져놓은 차가움이라. 그리 말한다. 그러나 나는 읽을 수 있다.
너의 보드라운 손끝으로 흔들어 깨우는 채소들의 소소한 소란에서.
너의 코끝에서 말아 올라가는 보글거리는 정겨움에서.
너의 눈 끝에 달린 정갈한 계절의 생명에서.
너의 귀 끝에서 울리는 또각또각 만들어내는 형태들이 서로를 당기고 하나로 엉기는 모습이 어쩌면 그냥 너다. 딱 너야. 이렇게 말하는 나의 너, 이렇게 보고 듣고 느끼는 나의 하나뿐인 너다.
고운 물 들어오는 다홍이 새날을 알린다. 서슬 하게 부는 바람에 해마저 잔뜩 웅크린 하늘을 뜯고 일어나 더욱 진하다. 더하고 더하여 더욱 짙은 붉음이 어쩌면 더욱 무겁게 얼어붙은 지평선에서 그대로 굳어버린다. 차가운 빨강이 입안에 맴돈다. 뜨거운 파랑에 발끝이 시리다.
일월은 이리도 명확하게 내게 치달아오고 일월은 공허한 뱃속을 싸늘하게 찌른다.
오한이 오른다. 파르르… 르르르르르
파드닥 떨리는 네 입꼬리가 이리 에이는 건 나. 나인가? 그런 건가?
파르르 다가왔다, 푸르게 바스러지는 파도처럼. 시린 초승달이 비쳐낸 바다가 속삭인 영원. 그 싸늘한 새끼손가락을 믿은 건 네가 하얀 풀꽃이었기 때문이다. 달걀의 노른자처럼 밝은 햇살을 품은 작은 병아리였던 너는 내 품이 끝나지 않는 파도처럼 영원히 오가는 따스함을 가졌으리라. 그렇게. 여긴 너는,
그래서 넌, 그럼에도 넌, 그렇기에 넌.
발그레한 두 볼을 봉긋한 언덕처럼 굴러올라. 그 위에서 내게 말한다. 디글디글 기어오른 네 발의 너는 눈밭에서 솟아오른, 더 하얗게 밝아 오르는 하이얀 풀꽃이다.
그렇기에 넌 하이얗다. 낮게 흔들리며 웃는 풀내음이다.
멀어져 가는 것들에 미련한 맘이 흥건하기 마련이다. 사라져 가는 것들에 익숙해지는 건 떠나가는 발걸음 눈밭에 깊숙이 남기는 흙발과 같다. 총총 뛰어 내게 안기던 너는 이제 내 등 뒤에서 나보다 한 가슴 더 두툼함으로 나를 감싼다. 오지 않을 날들을 헤아리다 내 것이던 날들이 아스러지듯. 영원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붉음이 푸름에 겹치며 어제가 오늘이 되고 오늘이 또 내일이 되듯, 네 미소에 봉긋한 다홍 봉우리가 피어오르다 기다림을 이어가며 눈가의 시내가 늘어가듯, 나는 그 냇물에 두 발을 담그고 네게서 멀리 떠내려가지만, 너는 깊어 가는 냇물 속에 시간을 담금질하며 내게 다가오겠지.
그럼에도 넌, 그렇기에 넌 내게 일월의 다홍이다.
그래서 넌, 나의 유일한 두근거림이다.
구수한 된장국 한 그릇을 바라보는 네 눈빛이 흔들리는 건
그럼에도 넌 나의 너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