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앞의 생> _ 에밀 아자르 _ 을 읽고.
계절은 봄으로 시작되어 새싹이 움트고 꽃이 피어난다. 이어 여름이 오면 초목은 푸름을 안고 가을을 당겨와 결실을 뿜어내곤 새로운 생명의 잉태를 위해 휴식의 시간인 겨울로 들어간다. 이는 절대 변하지 않는 자연의 법칙으로 곧 순환이다. <자기 앞의 생>은 모모가 불변의 법칙 속에서 순응과 반발을 통해 성장해 가는 과정을 가감 없이 그려낸다. 모모를 보며 우리로 하여금 자기, 즉 본연의 내가 살아낸 시간과 오늘 그리고 다가올 생에 대해 사려 깊은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준다. 온갖 편견과 질투, 시기, 원망 같은 부정적 기운으로 가득한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서 피어나는 자연적인 사랑과 희망, 이를 힘겹게 찾아가려는 모모의 모습에 따뜻한 눈물이 우리의 가슴을 적셔낸다.
모모와 로자 아줌마 그리고 그녀가 돌보는 존재하지 않는 아이들은 파리의 엘리베이터도 없는 허름한 아파트 7층에서 살아간다. 유태인으로 태어나 엉덩이로 벌어먹으며 가장 젊은 날을 보낸 로자 아줌마에게 이 아이들은 생의 수단이다. 그러나 모모와 로자 아줌마 이 둘은 서로에게 매우 특별한 존재였다. 세월이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동안 모모는 자연의 법칙대로 늙어가고 아파하는 로자 아줌마를 보며 괴로워하고 부정하기도 하며 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을 거듭한다. 죽음이 코앞에 다가온 로자 아줌마를 돌보며 그 외적인 모습이 보기 싫고 흉측해진다 해도 사랑이 곧 생, 생이 곧 사랑이라 여기게 된다. 모모는 그녀의 안식처에서 젊은 날 아름다움을 간직한 채 생을 마감할 수 있게 도와준다.
그저 아줌마와 주변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라 여기던 모모는 6살 무렵 자신에게도 다른 아이들처럼 돈을 지불하는 부모란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생애 최초의 슬픔을 느끼게 된다. 원천적인 사랑에 대한 갈망에 여기저기 똥을 갈겨대고 물건을 훔쳐 달아나기도 한다. 우연히 훔친 달걀과 이에 돌아온 따뜻한 달걀 한 알에 모모는 희망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사랑에 대한 목마름에 아파하듯 진정한 배앓이 후 모모는 자신을 용기 내 직시하기 시작한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희망이란 것은 항상 대단한 힘이 있다. (p113) 눈부신 금발의 나딘 아주머니는 그에게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이고 다시 맛본 희망의 빛이었다. 후에 우연히 그녀를 뒤쫓아 가게 된 녹음실에서 모모의 자아는 커다란 성장을 경험하게 된다. 마치 영사기의 필름을 되돌려 더빙을 고쳐가듯 올려다볼 수 없는 추억을 순순히 따라간다. 마침내 그리 그리워하던 마음속의 엄마를 만나게 된다. 또 한 번의 배앓이 성장통을 겪은 그는 자신을 거울처럼 비춰내는 로자 아줌마에게 달려간다. 일단 태어났으면 그뿐이지, 나도 아줌마의 녹음실에서처럼 다시 뒤로 돌려 엄마 뱃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는 일이니까. (p246) 녹음실처럼 과거를 돌릴 수 있다면 사람들도 그렇게 선택당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관심을 끌지 못하는 그 많은 사람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사람을 선택한다. (p250) 모모는 자신의 태생적 정체성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속해 있는 세계가 다르다고만 여겼다. 물론 상상 속의 친구와 비현실적인 곳에서의 삶을 그리며 자기의 생으로부터 도피를 꾀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모모는 과거를 부정하거나 마약 같은 약물로 자기를 망가뜨리고 지워내며 시시덕대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무도 없는 원시적 결핍 상태 속에서 자신을 찾으려 노력해냈다.
세상 가장 낮은 곳 타인이 정의한 흙탕물 속에서 뒹굴며 자신을 찾아가는 10살의 모모에게 그의 아버지라 감히 말하는 남자가 찾아온다. 로자 아줌마는 병마의 고통이 스며들고 있음에도 모모의 정체성을 지켜내준다. 모모는 아버지의 실제적 죽음 앞에서 한순간 네 살의 나이를 되찾고 그의 자아는 또다시 성큼 자라난다. 내가 되찾은 네 살은 정말 큰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제 나는 필요한 생각을 제때 잘 해낼 줄 알게 된 것이다. (p292) 그가 스스로 느끼듯 모모는 성장했고 자신의 똥 같은 존재, 고통의 분출물이자 분신이기도 한 로자 아줌마의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생을 지켜내도록 도와준다. 이는 모모가 맞이하고 싶은 자기 앞의 생이기도 할 것이다.
하밀 할아버지가 노망이 들기 전에 한 말이 맞는 것 같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다. 더 두고 봐야 할 것이다. 나는 로자 아줌마를 사랑했고, 아직도 그녀가 보고 싶다. 사랑해야 한다. (p.307) 생은 곧 사랑이고, 사랑이 곧 생이다. 엄청나게 위대한 이유가 존재해야 사랑하고 또 생을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물 흐르듯이 살아가며 그렇게 사는 것이 생이며, 존재이고, 사랑일 것이다. 우리 생의 시작은 나의 선택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연스레 흐르는 시간 속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수의 방법들로 각자 흘러간다. 그 끝이 드넓은 바다가 될지 작은 웅덩이로 그칠지는 모르나 존재하는 모든 물방울들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자명하다. 그렇기에 자연의 법칙은 공정하면서 가장 불공평하다. 세상의 편견 속에서 같은 부류라 스스로 명명한 이들, 사회의 소수자이자 약자의 모습인 모모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내는 성장통을 바라보며 나 자신을 진심으로 반성하였다. 제목 속의 자기란 심리학자 융이 말하는 원형 속의 자기의 모습, ‘일상의 나’가 아닌 ‘본질의 나’ 그것이 아닐까? 자기 앞의 생을 통해 진정한 자기실현을 이뤄내기를 바라는 아자르라는 가면 속 로맹 가리의 외침이 들린다.
모모가 내 주머니에 넣어준 달걀이 만져진다. 손끝에서 느낄 수 있는 사랑과 희망의 온도가 나와 우리를 진정한 자기실현의 길로 안내해 주지 않을까?
삶의 끝에 서면 당신은 자신이 한 어떤 일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하는 동안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가 하는 것이다.
당신은 행복했는가,
다정했는가,
자상했는가?
타인을 보살피고 동정하고 이해했는가?
너그럽게 잘 베풀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뜨겁게 사랑했는가?
S. Kierkega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