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은 인연이고, 관계는 노력이다. 그 소중함을 알아감에 감사하며.
'관계'의 중요성이 요즘처럼 피부로 와 닿을 때가 있었던가?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가 없다. 보고 싶고 듣고 싶고 만지고 싶어도 쉽지 않다. 너와 내가 나누던 실뜨기가 이어져 우리가 되는 이와의 만남. 수많은 실 중 나는 어떤 실을 잡아야 할까? 내게 어울리고 잘 맞는 연결의 고리, 인연의 소중함이 더 애틋해진다. 결혼 후 짧으면 7-8개월 길면 3-4를 주기로 13번의 이사를 한 내게는 사람과의 이어짐이 참으로 어려웠다.
2015년 여름 아이들을 전학시킨 학교 담임 선생님에게 이사한 아파트에 같은 반 친구들이 있는지 여쭤보았다. 여타의 고민거리들이 많았지만, 그중 제일 중요한 것이 아이들의 적응 문제였다. 감사하게도 두아이와 모두와 같은 반 친구가 있는 집이 있었다. 아이들의 벗도 만들어주고 나 역시 낯선 곳에서 누군가와는 알고 지내야겠기에 그 아이들 엄마의 전화번호를 적어왔다. 그녀를 처음 만난 순간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녀는 나보다 키가 컸고 마르고 단단한 체형이었다. 어깨를 조금 넘기는 긴 머리에 갸름한 얼굴. 상꺼풀진 큰 눈을 가진 친구였다. 고양이의 눈, 그녀의 눈이 그랬다. 달밤의 바람이 가져다주는 그런 묘한 향기가 나는 그녀의 이름은 보라다. 성별이 같은 둘째들은 이내 잘 어울려 놀았다. 숫기가 없는 큰아이의 학급에서 생긴 일들은 보라의 큰 딸이 조목조목 전해주었다. 아이들을 끈으로 보라와 나는 조금씩 거리를 좁혀갔다.
그녀를 만난 그해 여름 나는 5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아이들과 나는 학기에 맞추기 위해 남편을 남경에 남겨놓고 먼저 들어왔다. 이사를 하고 아이들을 전학시켰다. 나는 친정집에 머물며 이사할 집을 여기저기 손봤다. 내 집, 우리 집이다. 벽지와 부엌을 제외한 곳들은 내가 정리하고 다듬었다. 몰딩과 칠들을 손보려니 시간이 제법 걸렸다. 그러던 하루, 허리가 아프다며 동네병원을 찾아가신 아버님은 입원 다음날 서울 큰 병원으로 옮기셨다. 여름의 열기가 식어갈 즈음 아버님의 영정사진 앞에 향을 올렸다. 내일의 일은 그 누구도 기약할 수 없다 했던가. 두 어달 간 내 앞에 펼쳐진 일들에 치여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나는 숨 쉬고 있으나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언니 많이 힘들죠?"
아파트 현관을 나서려는 찰나 마주친 보라가 내게 물었다. 앞뒤 가릴 것도 없이 뭔가 다른 일을 해보는 게 어떠하겠냐 물었다. 지난봄부터 본인도 미술치료라는 것을 공부하고 있노라며 같이 해보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그 날 저녁 나는 남편에게 전했다. 지금 상황에 안 맞을지 모르겠으나 해보고 싶다고. 그렇게 그녀와 나는 아이들 엄마로의 인연이 아닌 보라와 소미로서의 인연을 시작했다. 우리가 공부하는 곳은 사이버 대학교라 온라인으로 수업을 했다. 종종 특강이 있으면 그녀의 차로 학교에 갔다. 미술치료사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 같이 공부했다. 수업을 듣고 임상 시간을 채우기 위해 병원에서 환자들을 같이 만났다. 그녀가 없었다면 이 모두가 불가능한 일들이었다. 거뭇한 밀실에 갇혀있던 내게 빛을 열어주었다. 주저앉아 있는 내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내 가슴속에 잊었던 꿈이란 씨앗까지 심어주었다. 고마운 사람. 보라는 내게 은인이었다.
재작년 남편이 중국에 다시 발령이 났다. 큰아이 때문에 한국에 남은 내게 그녀는 여전히 큰 힘이 되었다. 햇살이 좋은 날이면 안부를 전했다. 보라 딸아이의 연애 이야기나 여전히 무뚝뚝한 쭈니의 공부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커피가 맛있는 곳이 있다며 데이트를 신청하기도 했다. 나는 살림을 줄여 근처 다른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물리적 거리는 도보로 20여분 늘어난 게 전부지만 그전처럼 그녀를 자주 볼 수는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잠시의 이별을 준비했는지도 모르겠다. 계획보다 일찍 중국으로 떠나게 된 내게 그녀는 맛있는 커피빈을 선물했다. 마실 때마다 자신과 함께한 순간들을 떠올리라며. 그 향을 맡아보지도 못한 채 한국으로 돌아왔다.
나는 올 1월 말 코로나를 피해 잠시 귀국했다. 그리고 7개월의 시간 동안 서울에서 보냈다. 내게는 7년 같은 일곱 달이었다. 생각보다 그녀와의 만남은 쉽지 않았다. 몇 번의 통화와 카톡 안부가 전부였다. 쉽게 오지 않을 것 같았던 출국일이 번갯불처럼 잡혔다. 비행 편이 정해진 다음날 몇몇 지인들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잘 지내지?'라고 보낸 메시지에 카톡 하고 알림이 왔다. '언니. 어제 나 언니 꿈꿨어요. 언니 중국 가요? 꿈에서 간다고 펑펑 울었어요. 왜 울고 그래요? 걱정되잖아요. 안 그래도 무슨 일 있나 연락하려던 참이었어요.'
잠시라도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수도권에 확진자가 갑자기 늘었다. 남편의 회사에서는 가족과의 만남도 자제해 달라 했다. 돌아가는 순간까지도 하늘은 내 마음을 애써 모른척했다. 혹시나 하는 걱정 때문에 서로를 위해 다음을 기약했다. 우리에게 오늘이 마지막이 아니니까. 보고 싶고 그리운 마음 차곡차곡 담아놓았다. 그녀와 나는 아이들 엄마로 처음 만났다. 보라와 소미로 두 번째 만남을 가졌다. 세 번째 우리 둘은 어떤 모습으로 서로를 맞이하게 될까? 다음 귀국하게 되면 제일 먼저 그녀의 아파트 앞 벤치에 앉아 전화를 해야겠다. '나 지금 어디게? 창 밖으로 내다봐.' 라며 말이다. 고마운 보라에게 그리운 소미가 찾아왔다고.
만남은 소중해야 하고, 인연은 아름다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