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던 산골도 아니요 소금 바람이 코끝을 찌르는 바닷가도 아니다. 소파에 몸을 기대앉아 갓 내린 차를 손에 안았다. 온기를 느끼며 정든 곳을 이마 한가운데에 그려본다. 오늘의 창밖을 닮은 가을의 하루. 옆구리 터진 허수아비가 한눈 찡긋 인사를 하는 곳. 너른 황금빛 물결을 따라 기다란 코스모스가 수줍게 박자를 맞추는 그런 따스함을 간직한 시골 풍경을 떠올린다. '고향', 내 마음속의 그곳을 소환하려 애써 추억에 젖는다. 노란 국화 향을 노래하는 음악에 빠져보지만 쉬이 떠오르지 않는다.
40여 년의 시간을 타고 올라가 본 유년시절의 기억, 그곳에는 희뿌연 안개들만 자욱하다. 두 살 터울의 남동생은 태어나면서부터 몸이 약했다. 돌잡이를 할 즈음 동생은 큰 병에 걸렸다. 요즘 같으면 동네 의원에서 감기처럼 고칠 수 있는 가벼운 것이었다. 가족들의 병에 대한 무지에 의사의 오진까지 더해서 동생은 정말로 죽다 살아났다. 동생은 황달로 꽤 오랜 시간을 병원에서 보냈다. 여기에 엄마도 입원을 하셨다. 동생의 치료 과정 중에 엄마가 비형 간염 보균자임을 알게 되었고, 엄마도 위중하다 했다. 일간지 기자이신 아빠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셨고 손주가 최고인 할아버지가 나를 보시기가 쉬울 리 없었다. 덕분에 서너 살의 꼬마는 비행기라는 차가운 쇳덩이에 몸을 싣고 하늘을 떠다녔다.
나는 고향인 부산과 서울 외할머니 댁을 오가며 지냈다. 외할머니 댁 좁다란 시멘트 마당에는 무심히 자른 고무호스가 달랑거리는 수도꼭지가 하나 있었다. 이모들이 돌아오기 전까지 나는 물장난을 하며 놀았다. 마당은 사각의 방들로 둘러싸인 한가운데에 있었는데 늘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고무대야에 물을 받아 손가락으로 여기저기 튀기고 놀고 있노라면 짙은 청색 철문 밖에서 아이들이 노는 소리가 빼꼼히 마당 안으로 들어왔다. 어른들은 모두 바빴고 띠동갑인 막내 이모가 학교에서 돌아오기 전까지 나는 늘 혼자였다. 외할머니가 동네 어귀 시장에서 내 손을 놓쳐버린 사건 이후 나는 '땡'이전의 얼음이었다. 녹슬어 삐걱거리는 문밖에는 따스한 햇살이 가득했다.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구둣발로 쓰윽 대문을 넘으면 날 보는 아이들이 시선들이 따끔했다.
입을 열면 나오는 부산 외계어가 신통방통했나 보다. 뱅글뱅글 나를 둘러싼 아이들이 관심이 즐겁지 않았다. 동물원 속 원숭이가 돼버린 듯한 비릿함에 쓴웃음이 났지만 같이 놀고 싶었나 보다. 열심히 서울말을 연습해 0옥타브를 구사할 때가 되면 나는 어김없이 부산행 비행기에 올랐다. 고향집 골목길에 나가면 또다시 나는 이방 어린이가 돼버렸다. 높낮이가 사라진 억양에 구경거리가 되었다. 오가며 만난 또래들은 날 신기하게만 봤다. 그래서 고향에 대한 아련한 기억은 고사하고 덮어버리고 싶은 순간들이 되어버렸는지도.
지금 생각해보면 서운함인지 서러움인지 모호한 감정에 많이 울었다. 서울에서도 부산에서도 유명한 울보였다. 9시만 땡 치면 울리는 뉴스처럼 온 동네를 울렸다. 장식장 위에 놓여있던 못난이 인형처럼 닭똥 같은 눈물을 시도 때도 없이 흘리던 나. 엄마는 그런 날 더 짙은 눈물을 안고 바라보셨다. 고향에 살던 꼬맹이, 외갓집 담벼락에 기대 빼꼼히 밖을 내다보던 어린 날의 나는 엄마의 분신을 입고 유년 시절을 보냈다. 내게는 엄마가 손수 짜주셨던 노란색 뜨개 원피스와 하얀색 꽃이 달린 붉은 니트가 있었다. 엄마는 서울행 가방 속에 고향의 따스함을 쏘옥 넣어주셨다. 아마 뜨개실이 엉켜있는 바늘 끝에 동백꽃의 붉음이 묻어있었나 보다. 해운대 모래알로 만든 단추가 달려있었나 보다. 고향에 대한 불편한 기억들만 남았지만 부산이 그리운 것을 보니. 이젠 주름이 가득한 엄마의 가슴에 달려가 안기 고픈 것을 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