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 이십 년도 더 지난 이야기입니다. 친구들과 작당을 하고 피도 안 마른 머리들을 한 곳에 모아 작전을 짰습니다. 매일 지나는 학교 앞 거리였기에 학원의 쉬는 시간을 이용해 몇 곳을 답습했습니다. 물론 들어갈 수는 없었지요. 저희는 짙은 초록색 카디건과 치마를 입은 여고생이었답니다. 이 장난꾸러기 소녀들이 살피던 곳은 수능 100일을 앞두고 고득점의 점수를 내려줄 술집을 찾고 있었던 거고요. 길게는 십 년 가까이 그곳을 지나던 친구들도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다며 어찌나 호들갑을 떨던지. 심지어 종종 남자 친구와 한잔 하던 친구까지도 첫 테이프를 끊는 너희들을 데리고 가려니 걱정이라며 손끝을 떨지 뭡니까. 어찌 되었던 의견을 모아 그나마 단속이 허술해 보이는 곳으로 두어 곳 낙점하고 디데이를 기다렸답니다. 더 중요한 시험 일자는 다가오는데 그건 안물 안궁. 겁을 상실한 이 여고생들을 어찌할까요?
작전의 그날이 밝았습니다. 전 난생처음 화장이라는 것을 해봤답니다. 제가 직접 한 것은 아니었어요. 꽤 능숙한 친구가 그날은 제 얼굴을 화지삼아 그림을 그렸지요. 익숙한 종이를 스쳐 지나는 사각거리는 소리와 사뭇 다른 그녀의 손길에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미소야, 거울 봐. 야. 니 얼굴도 그려놓으니 사람 같다. 나 잘했지?' 참, 가관입니다. 이를 조용히 바라보던 친구가 자신만의 비기라며 이름도 알 수 없는 크림을 꺼내 제 얼굴에 발라주었죠. 이뻐졌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는 확실했습니다. 고등학생 같이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그것은 백 퍼센트 저희들만의 생각였지만요. 나머지 친구들은 알아서 활시위 닮은 눈썹에 초콜릿빛 입술을 하고 서로를 바라보며 흐뭇해했어요. 서로 이쁘다며, 누가 봐도 대학생이라면서 말이죠.
시간은 흘러갑니다. 저희는 유리 구두를 신고 신데렐라의 호박마차에 올라탔습니다. 서둘러 홍대 먹자 거리로 행했지요. 고딩의 눈에 비치던 어제의 그 골목길이 아니었습니다. 평소 같으면 떡볶이 집, 햄버거 가게로 곧장 직진했을 우리였는데 말이죠. 난생처음 얼큰한 찌개 냄새를 따라가 봅니다. 저는 '안주로는 매콤한 국물이지'라며 제법 큰소리를 내었답니다. 주님을 처음 만나는 생초짜가 말이죠. 삐걱거리는 마차의 바퀴 덕에 한 군데서 입장 거부를 당하고 다른 주점으로 향했습니다. 역시 큰 길가의 주점들은 콧대가 하늘 무서운 줄을 모르더군요. 액면가가 가장 우수한 친구를 앞세워 당당히 다음 작전 지점으로 이동했습니다. 드디어 잠입 성공. 그날의 일등공신인 친구가 이 술이 유행이라며 레몬소주란 신기한 술을 소개했습니다. 얼큰한 부대찌개에 이어 연신 안주만 쌓여갔습니다. 술은 옆에서 거들뿐. 사실 저희는 배가 고팠습니다. '수능을 위하여! 합격을 위하여!' 지금 생각해보면 레모네이드 격의 술 한두 잔에 발끝까지 벌겋게 되어 소리를 지르던 모습이 어찌나 귀여웠던지. 터질듯한 배에 폭발 일 초 전의 빨개진 두 볼을 어루만지며 그곳을 나왔습니다. 요정님께서 선사해준 마법이 풀릴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세수를 하고 옷도 갈아입고 이제는 그만 집으로 돌아갈 시간였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주님과 저와의 만남은 꽤 오래 이어졌답니다. 광화문 사거리 바닥에 붙은 껌처럼 찐하게 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죠. 주님은 제게 요정의 가루를 뿌려 공주로 만들어 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마녀로 변해갔습니다. 더 이상 즐거워지지 않고 괴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밑을 알 수 없는 구덩이를 파서 저를 휙 하고 내던졌습니다. 겨우 땅 위로 기어 올라오면 어느새 제 발로 저주의 주문을 외우고 있었답니다. 사람이 좋아 사람과 마시며 사람과 행복했던 시간들은 흐려져 가고, 후회만 남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전 주님에게 이별을 고했습니다. 100 일주, 첫 MT의 기억, 청춘의 행복과 고민, 가족과 소중한 이들과의 단란한 시간을 함께 했던 그분을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지금도 가끔은 그분이 그리워질 때가 있습니다. 즐거운 시간, 정성으로 차려진 음식, 잔을 부딪히며 퍼져 나오는 웃음소리에 딱 한 모금 생각이 나기도 합니다만. 삼여 년째 잘 참아오고 있습니다. 주님과 이별한 뒤 제게 찾아온 것들이 너무나 소중했기 때문이에요. 저는 오늘도 그 빈자리에 작지만 소중한 순간들을 심어나가고 있어요. 지금은 작은 풀꽃이지만 내일, 내년 그리고 더 먼 미래가 되면 무성한 풀숲을 이루어 푸른 바람이 향긋한 내음을 뿜어내겠죠? 한때 너무나 소중했던 주님, 제게 하루하루를 더 귀하게 하라는 큰 가르침을 주시고 떠나셨네요. 좋았던 순간들을 잊지 않고 살아갈게요.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