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방향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밤.
라온델, 카일리스, 세바스티안이 처음으로 외딴 오두막에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다. 라온델이 단정하면서 냉담하지 않게 말을 던진다.
“세상은 이해할 수 있는 범위까지만 변한다네. 인간이 받아들일 수 없는 구조는 오래 유지되지 못하지. 그래서 나는 언제나 묻는다네. 우리가 바라는 세상이 정말 인간의 크기 안에 있는가.”
그는 이상을 경계했지만, 이상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의 시선은 언제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재고 있었다. 침묵하며 대화를 듣던 세바스티안은 동의한 듯,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은 자신의 과거를 정당화, 미화하지도 않았고 현실에 맞춰져 있었다. 다만 그 현실을 받아들였다고 해서, 꿈꾸던 삶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 구조 안에서 선택을 해왔다. 그리고 선택에는 항상 무게가 따른다는 걸 배웠지. 누군가를 살리면, 누군가는 죽는다. 그 사실을 모른 척할 수는 없더군."
그 말은 체념이 아니라 인식에 가까웠다. 그는 세계를 바꾸지 못한 사람이 아니라, 바꾸지 못한 세계를 감당해 온 사람이었다. 카일리스는 두 사람의 흐름을 끊지도, 대화를 주도하지도, 피하지도 않고 말들이 흘러가는 방향을 연결 지었다.
“자유에는 공백이 남더군요. 아무것에도 속하지 않게 되었을 때, 생각이 열리는 만큼 기준이 사라지기도 했습니다. 기준이 사라진 공백의 자리에서는 더 많이 볼 수는 있지만 방향을 정하지 않으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호해집니다."
그의 말에는 불안도, 해방도 섞여 있지 않았다. 자유 이후에 남는 상태를 있는 그대로 말하고 있을 뿐이었다. 카일리스를 바라보던 라온델이 이어말했다.
“그래서 구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네. 열린 감각이 흔들리고 무너지지 않도록 밑바탕이 되어 붙잡아줄 틀 말이야.”
세바스티안은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반박의 기색은 없었다.
“틀은 필요하지만, 틀만으로는 부족해. 누군가는 그 안에서 움직이려는 욕구를 가져야 하지. 책임을 질 각오 없이 세워진 구조는 오래 못 간다.”
둘의 말은 서로를 밀어내고 있지 않았기에 부딪히지 않았다. 그저 같은 밤을 다른 각도에서 비추고 있었다. 카일리스는 둘 사이에서 지금의 대화가 어떤 결론을 향해 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히 느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대화가 아무 곳으로도 흘러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그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말은 조심스러웠지만, 망설임은 없었다.
"우리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이게 어떤 모습이 될지, 어떤 결과를 낳을지, 아직 정확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같은 방향을 보는듯합니다. 당장 확신하기에는 이르나,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우리가 함께 느끼는 알 수 없는 감각이 있어요."
그는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으나 설득하려 하지 않았고, 동의를 요구하지도 않으며 질문으로 말을 이었다.
“이 감각이 어디로 이어질지는 가늠되지는 않으나 만약 이어진다면 어디로 이어질 거라고 보시나요. 선생님?"
라온델은 잠시 촛불을 바라보며 말하기에 앞서 사고의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디로 이어진다, 이어져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네. 그러나 어디로 붕괴되지 않을지는 말할 수 있지. 그렇기에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속도로 밀어붙이지 않는 곳, 이해를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방향. 나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네. 유령님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의 말에는 설계자의 언어가 담겨 있었지만, 완성도를 주장하는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미완을 전제로 한 확신에 가까웠다. 세바스티안은 라온델의 말을 곧바로 받지는 않았다. 대신 무언가 확인하듯 카일리스에게 시선을 옮겨 머무른 뒤 말을 이었다.
“나는 방향과 함께 각오를 본다. 어디로 가느냐보다, 그 길 위에서 무엇을 버릴 준비가 되었는지, 그게 더 중요하더군. 이 감각이 이어진다면 아마 편한 길은 아닐 거야. 그래도 우리가 함께 한다면 도망치는 방향은 아닐 것 같군.”
그의 말은 희망도, 경고도 아니었다. 그저 경험에서 나온 판단이었다. 카일리스는 두 사람의 말을 빠짐없이 받아 적듯 마음속에 놓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느끼는 이 감각에는 구조와 각오가 뒷받침이 되어야 하는 거군요?"
세 사람은 동시에 아직 이름도 형태도 없는 이 감각을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지에 대한 상념에 빠졌다. 그리고 상념을 깨는 것은 상념에 빠지게 만든 장본인, 카일리스였다.
“만약 우리가 지금 이 밤을 지나고 나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다시 예전의 선택들만 반복하게 된다면, 그때도 이 감각이 여전히 의미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저의 경험을 빗대어 말하자면 저는 황궁을 떠나 자유를 택했고, 그 결과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채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유인의 입장으로 묻고 싶습니다. 우리가 지금 같은 방향을 보고 있다는 이 느낌이 단지 오늘 밤의 대화 때문인지를요. 오늘 밤, 지금의 느낌에 젖어 느낀 감각이 허튼 공상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결국 누군가의 선택에 의해서 시작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잠시 숨을 고른 세바스티안은 황자 시절, 전쟁광 시절의 무게를 실은 듯한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나는 오랫동안 선택이라는 걸 무언가를 얻기 위한 행위라고 생각했지.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보니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선 먼저 버릴 것을 정해야 하더군. 자네는 자유를 택했고, 그 대가로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자리에 서게 되었지. 그 선택이 옳았는지 글렀는지는 아직은 판단할 수 없을 거야. 하지만 내 하나는 말할 수 있지. 자네는 도망치지 않았다. 남아 있으면서 침묵하는 쪽도, 남의 선택 뒤에 숨는 쪽도 택하지 않았어. 그래서 자네의 질문에 이렇게 답하겠네. 이 감각이 의미를 가지느냐, 가지지 못하느냐는 오늘 밤에 달려 있지는 않아. 그리고 우리 셋이 같은 자리에 앉아 있다는 사실에도 달려 있지는 않지. 다만 그럼에도 확실한 것은 선택을 해야 시작이 된다는 것이 변함없다는 것이지.”
세바스티안의 말을 듣던 라온델은 한때 자신도 같은 자리에, 같은 상황에 놓여있음이 떠올랐다. 그래서인지 세바스티안의 말이 마음에 내려앉아 머물렀다. 겉으로는 내색 없이 변함없는 모습을 보였으나 마음속에선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유령님의 말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선택은 언제나 개인의 용기에서 시작되지요. 나 역시 그걸로 충분하다고 믿었던 적이 있네. 결단 하나에 재능을 겸비하면 세계가 움직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 하지만 자네 덕에 깨달았다네. 그 선택이 아무리 정직해도, 그걸 지탱할 틀이 없다면 결국은 선택한 사람만 닳아버린다는 걸. 결단과 재능이 있어도 하나의 존재로는 이룰 수 없는 벽이 있다는 걸 알기에 이 자리까지 도달했지. 우리는 모두 다른 생각을 하면서도 같은 방향을 보고 있네. 같은 방향을 보면서도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한 사람의 영웅담이 되어 개인이 모든 무게를 짊어지고 침묵 속에서 소모되는 구조로 끝나는 방식이 아니었으면 좋겠네. 새로운 영웅담은 새로운 붕괴가 되기 때문이지. 그래서 나는 이렇게 답하겠네 선택이 점이라면 구조는 선이네. 점이 없으면 선은 허공에 그어지고, 선이 없으면 점은 흔적 없이 사라진다네. 나는 그 둘이 서로를 닳게 하지 않는 방식이 가능할 거라고 믿고 싶을 뿐일세."
라온델의 말이 끝나는 순간, 오두막 안의 시간이 멈춘 듯 시간의 흐름이 길게 느껴졌다. 촛불은 여전히 타들어가고 있었고, 바람은 없었지만 불꽃은 미세하게 흔들렸다. 누군가 말을 끊은 것도, 누군가의 말을 기다리는 것도 아니었다. 그 짧은 시간 속,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세바스티안의 눈은 마치 전장을 분석하는 지휘관 혹은 샤트란지의 선수처럼 빠르게 움직였고 이내 피식 웃음을 지었다.
"이야기가 너무 반듯하군. 때로는 허수가 승리를 가져올 때도 있는데 말이지."
세바스티안은 황자 시절, 전쟁광 시절, 황궁에서 지냈을 때라면 스스로도 절대 볼 수 없었을 유쾌한 미소를 지니고 있었다. 그 웃음을 본 라온델 또한 과거에 지니지 않았을 편안한 '나'다운 미소를 지니고 있었다. 카일리스는 둘의 미소를 보고 따라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 즐거운 순간과 대화를 서로가 공유하고 있음이 확실했다. 그리고 대화의 온도가 조금 달라졌음을 느꼈다. 무언가를 정하기 직전의 긴장도 아니고, 논의를 끝내려는 느슨함도 아니었다. 오히려 판이 한 번 더 열렸다는 감각에 가까웠다. 세바스티안은 서로의 웃음을 확인한 후, 은밀한 이야기를 꺼내듯 몸을 틀어 왼 팔꿈치를 탁자 위에 올리고 오른손은 의자의 팔걸이를 집었다.
"우리의 대화는 너무나도 솔직해. 그래서 다음 수를 숨길 필요가 없지. 그리고 여행을 다녀온 바보가 회포도 풀지 않은 채 말을 아끼고 있군. 보통은 가장 말을 많이 해야 하는 자리인데도 말이야. 이는 꽤나 보기 드문 태도지."
라온델이 양 팔꿈치를 탁자에 기댄 채로 팔을 올려 은밀한 이야기를 이어가듯 말을 이어받았다.
"그래서 이 자리에 바보가 앉아 있는 겁니다. 카일리스, 우리는 회포를 풀고 싶으니 모두가 알고 있는 결정을 내려야겠네. 지금은 누가 설계하고, 누가 실행하고, 누가 책임질지를 미리 나눠놓고 시작할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세.”
세바스티안은 왼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몸을 살짝 뒤로 눕혔다.
“그래, 다음 수를 지금 미리두면 오히려 흐트러질 수도 있지. 아직 아무런 결정도, 자리도 정해지지 않았으나 시작의 선택은(카일리스를 바라보며) 자네가 하는 게 맞지 않겠나?"
그는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주제를 돌리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주제를 쥐고 있었다. 오두막 안의 공기는 느슨해졌지만, 풀리지는 않았다.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시작점이 카일리스, 자네라는 걸 누가 부정하겠나. 유령님도, 나도 그 점에 이끌려 선을 이루는, 선을 연결하는 점일 뿐이네. 자네도 알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결정을 내리지 못해서 말을 못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물론 자네의 선택이 좋지 않으면 부정할 것이네. 그러니 자네의 선택을 말해줄 수 있겠나?"
카일리스는 지금 이 순간이 자신에게 말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질문이 아닌 답을 하기 위해 생각을 정리해 나갔다. 그는 잠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라온델의 시선에는 설계자의 인내가 있었고, 세바스티안의 눈에는 판을 내놓은 자의 확신이 있었다. 재촉도, 압박도 없었다. 그러나 물러설 자리 역시 없다는 것을 확실히 느꼈다. 그는 천천히 평온하게 숨을 들이마시고 뱉고, 숨을 들이마시고 뱉었다.
“결정을 요구받고 있다는 느낌은 아닙니다. 다만 지나칠 수 없게 되었다는 감각이 선명해짐은 분명합니다. 제가 이 자리에 답을 말한다면 그 이유는 제가 가장 옳아서도, 가장 준비되어 있어서도 아닐 겁니다.”
카일리스가 시선을 낮췄다가 다시 들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이 자리에서 "무엇을 하겠다"라고 정할 수도, 선택할 수도 없습니다. 대신, 제가 선택하게 될 순간을 피하지는 않겠습니다. 그 선택이 내일이 되든, 그 후가 되든 그 순간이 다가온다면 그때는 이 대화를 절대 없었던 일로 만들지 않겠습니다. 제가 택할 것은 완성된 답이 아니라, 이 대화를 계속 유효하게 만드는 방향일 겁니다. 그러니 오늘은 이만하고 회포도 풀 겸 떠돌이, 바보 글레이먼의 이야기를 들어주시겠습니까? 선생님, 황자님?"
달빛이 나무 사이로 흘러내리고 있는 오두막의 밤, 아무런 선언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아무런 이름도 붙여지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하나, 다음 수를 둘 사람은 이미 정해졌고, 그 사실을 세 사람 모두가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지금 이 순간이 아니라, 이 대화를 짊어진 채 각자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 이후의 시간에서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이 전으로 돌아갈 수 없듯이 오늘 대화 이후의 삶이 이미 전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는 시작을 상징한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달 키워드 - 불안, 두려움, 미지수
정해지지 않은 목표, 목적 없는 삶, 알 수 없는 미래.
사람들은 다양한 이유로 불안과 두려움을 느낀다.
사람이 많아질수록 거짓과 함께 배신도 생겨나기에
단순히 사람이 많아진다고 해서 사라질 일도 아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정해지지 않은 미래의 불안은
목적, 목표가 있어도 불확실성에 의해 느껴지기에
그들도 각자가, 혼자였다면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불안을 잠재우고 다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뜻이 같은 사람이 모여,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정해지지 않은 미래가 아닌 미래를 정하고자 하는,
미지수의 미래가 아닌 만들어갈 미래를 바라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