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9 태양

빛은 언제나 제자리에 머물렀다.

by 오필

이른 새벽, 포르투나 엘렉티오의 중심부 시장.

언제나처럼 필리네오스의 천막이 시장의 시작을 알린다. 그는 오늘따라 느껴지는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매듭을 풀고, 천을 당긴다. 그리고 낡은 천막 안쪽의 오래된 원반을 한 번 굴린다. 그가 삐걱였다가 멎은 축을 바라보며 잠시간 숨을 고르는 사이, 카일리스가 이른 시간에 천막을 찾았다.

“일찍 돌아왔군, 젊은이”

“길이 생각보다 막히지 않았습니다.”

천막 밖의 공기의 흐름은 그대로였으나 시장의 순서가 아주 조금 어긋난 듯했다. 이 어긋남이 좋은 방향일지, 나쁜 방향일지는 아직 알 수가 없다. 다만 낡은 천막 밖의 흐름은 해가 떠있지 않았음에도 떠있는 듯했고 바람이 불고 있지 않음에도 불고 있는 듯했다. 아직 해가 떠오르지 않았는데도 시장의 표면이 먼저 드러난 느낌이었다. 숨길 곳이 없다는 감각이 바닥을 따라 번졌고 그 어긋남은 소리보다 먼저 보였다.


필리네오스가 바라보는 포르투나 엘렉티오

카일리스의 변화

늘 같은 순서로 흘러가던 한적한 새벽, 익숙한 하루. 나를 점술가로 이끌었던 젊은이가 나를 찾았다. 소년 시절부터 나를 종종 찾던 그가 오늘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기묘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동안은 젊은이의 행색을 했다면 오늘에서야 카일리스가 된 것 같다고 해야 할지, 결연에 찾다고 해야 할지. 평소처럼 소소한 이야기를 하는듯해도 말을 꺼내기 전의 숨, 시선을 두는 방식, 자리에 앉는 태도, 말을 전달하는 기세가 이전과는 달랐다.

그의 소년 시절에 대한 감상을 토대로 보자면, 그는 다른 영특한 아이들과 비교해도 뭔가가 한참은 달랐다. 답을 정하고 말하던 대개의 영특한 아이들과는 달리 젊은이는 그 어린 시절부터 질문을 통해 스스로 답을 내리게 해 주던 아이다. 질문에 답을 알려주거나 내리는 방식이 아닌,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고 스스로 답을 찾게 하는 연륜이 깃들었달까. 이는 숫자로 정해진 답이 아니라면, 정해진 정답은 없으니 스스로의 답을 찾으라는 듯이 보였다. 그랬던 소년은 황궁에 들어간 후로 관계를 재야 할 때는 분명했고, 실리를 따져야 할 때는 망설이지 않게 되었다. 다만 그럼에도 본인의 삶 앞에서는 늘 샤트란지의 말을 고르듯 시간을 길게 늘여서 움직이지 않고 제자리에 머물렀다. 아마 스스로에 대한 질문이 많은 만큼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해 다음으로 미뤘던 것이겠지. 그런데 오늘은 평소의 느끼던 감상과 달랐다. 그는, 카일리스는 질문을 던지기보다 엄포를 놓듯, 선포를 하듯이 앞으로의 계획을 아주 즐겁게 내게 알려주었다. 나는 그가 나에게 베풀었던 방식을 되돌려주듯 그의 말을 곱씹듯 잘 들어주며, 경청의 자세로 간간이 필요한 질문을 건넸다. 나의 의견을 말하는 것이 아닌 그의 의견을 귀담아 들어주는 방식으로. 그렇게 카일리스는 잠시간의 여유를 가진 후 황궁으로 향했다.


황궁의 변화

카일리스가 황궁으로 향한 뒤, 사람들의 입을 거쳐 들려온 황궁의 소식, 소문은 실로 놀라웠다. 시장에는 그의 과거, 바보연기로 죽음을 모면했던 일. 그 일을 아는 이가 없기에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졌으나, 어떤 영문에서인지 세르바부스 황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카일리스를 다시 황궁에 받아들였나 보다. 그렇게 카일리스가 황궁에 다시 돌아오자 여기저기서 황궁과의 거래, 일이 점차 수월해졌다는 말이 오갔고 밀려 있던 일들은 눈에 띄게 줄고 있다는 소식도 함께 들려왔다. 하루를 넘기기 일쑤였던 간단한 보고가 그날 안에 정리되었고, 서로 다른 판단으로 엇갈리게 된 부분에 대해 조율을 원한다던 사안은 더는 오지 않았다고 했다. 새로운 명령이 내려진 것도 아니었고, 규율이 바뀐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시간과 이야기가 쌓여감에 따라 카일리스를 언급하는 이도, 언급하지 않던 이도 황궁의 변화에 대해서는 입을 모아 이렇게 말했다. 무언가 꽉 막혀 있던 것이, 엉켜있던 것들이 풀려 제자리를 찾았다고. 마치 흩어져 있던 연결이 다시 이어진 것 같다고 말이다. 시간이 많이 지나지 않았음에도 카일리스가 황궁을 떠났을 때, 황궁의 원활하지 않던 일 처리로 알게 모르게 쌓여있던 사람들의 불만이 빠르게, 아주 빠르게 줄어들었다.

카일리스는 황궁의 밀려있던 일과 상황들을 매끄럽게 정리한 뒤 이곳을, 나를 찾았다. 나는 그때 황제와의 일은 어찌 된 영문인지, 황궁에서의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묻고 싶었으나 먼저 묻지는 않았다. 카이리스가 황궁을 다시 찾았을 때, 처음에는 다양한 수군거림이 있었단다. 때로는 노골적으로. 그 수군거림과 함께하던 왜 황제께서 다시 황궁에 들였는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넘겼는지에 대한 의문은 꼬리를 물고 자라나기도 전에 알아서 잠잠해졌다고 한다. 아마 모함이 되어 자라나기 도전에 카일리스의 올곧은 심성과 영특함이 모두를 융화시킨 것이겠지. 그리고 카일리스는 "황궁의 일은 여전히 많고, 업무의 엄중함은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일이 어디로 흘러가야 하는지가 전보다 더 분명하게, 잘 보이기 시작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는 스스로의 질문에 답을 내리기 전과 후의 변화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시장 사람들의 얘기와 합쳐보면 단순히 칭찬으로 끝낼 일은 아니다. 황궁의 일 자체에는 변함이 없었음에도, 다시 업무에 들어서자 스스로가 전보다 수월해졌다는 감각을 느꼈고 그 감각은 황궁의 사람들 안에서도 퍼지고 있었다. 자신의 이로움이 남들에게도 퍼진다는 것을 어찌 쉽게 칭찬하고 끝날일이겠는가. 위대한 일이지.

카일리스는 언제나처럼 권력을 위해 앞에 나서거나, 권위를 위해 위에서 내려다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저 사람들과 같은, 동등한 위치에서 사람들 사이를 지나며, 끊긴 것을 잇고, 밀린 것을 매끄럽게 흘려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우려가 되던 황제에 대해서는 "황궁의 흐름이 변하고 있는 그 모든 과정에서, 황제께서는 그림자조차 드러내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보고를 올리는 루카르 대신관님을 통해, 옥체를 보존하고 계신다는 소식만 전해 들을 뿐입니다."라는 말과 함께 묘한 표정을 지었다. 어찌 보면 빠르게, 굉장히 많은 변화를 맞이하고 있는 황궁의 흐름을 보고도 그 권위의 황제가 허락했다거나, 변화를 막았다거나 하는 등의 아무런 말도 없었다니, 한때는 죽이려 했던 신하인데 말이다.


엘리안의 방문

어떤 옷을 걸쳐도 고귀해 보일 올곧은 자세와 자태, 그녀는 천막에 들어오기 전부터 감각을 사로잡았다. 화려하지 않은 옷차림은 오히려 흐트러지지 않을 듯한 그녀의 마음을 부각시켰다. 천막을 향해 다가오는 걸음은 빠르지도 그렇다고 너무 느리지도 않았다. 섬세하듯 정확하게 제자리에 놓일 뿐이다. 분명 처음 보는 천막일 터인데도 망설임 없이, 이미 이 자리에 와 있는 듯이, 주위를 둘러보지도 확인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향초와 약초 그리고 오래 닫혀 있던 서고에 머무르는 냄새가 머물고 있었다. 그 냄새가 그녀와 조화롭게 맞물리니 사람의 긴장을 풀고 이유 없이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는 그런 향기로움이 되었다. 천막 안으로 들어와 앉은 뒤에도, 물음을 던지려는 사람처럼 보이지가 않았다. 나를 응시하는 깊고 고운 눈을 보자 오히려 내가 나의 고민을 물어야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응시하는 감각은 무엇을 알고 있어서가 아니라, 무엇을 감당할 수 있는지를 묻는 눈이었다.

이와 비슷한 느낌은 아주 오래전 딱 한 번 느껴봤었지. 스치듯 만나 뵀던 전 여사제님과의 만남, 그 순간과 똑같은 결이었다. 그분과 외형은 다를지라도 분명히 같은 감각이다. 그때의 감상과 감각만은 또렷하게 머무르고 있었기에 나는 그녀가 엘리안임을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그럼에도 나는 평소처럼 자리를 내어주고 오히려 다른 이가 방문했을 때보다도 더 말을 재촉하지도, 묻지도 않았다. 그녀가 숨을 고르자 그 숨결과 함께 나의 기억이 건드려졌다. 그 순간, 시간은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고 오래전 그때와 지금이 함께하는 듯 겹쳐졌다. 시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듯함을 감상하는 사이, 엘리안의 물음은 어느덧 내 곁에 도착해 있었다.

"현자께서는 운명을 믿으시나요?"

나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늘 그렇듯, 질문이 놓인 자리를 먼저 살폈다. 이곳에 앉아온 이들은 대부분 그 질문을 던지고 나면 바로 다음 말을 준비했다. 자신의 사정, 두려움, 혹은 바라는 결말을 잇기 위해서. 그러나 엘리안은 달랐다. 질문을 던진 뒤에도 시선은 흐트러지지 않았고, 말의 여백을 서두르지 않았다. 기다림 자체가 이미 선택처럼 보였다. 나는 운수판의 축을 가볍게 짚어 보았으나 이내 돌리지는 않았다. 이 질문 앞에서는 굳이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운명을 믿느냐고 묻는 이는 많았으나, 그 믿음이 어디까지 닿아 있는지를 묻는 이는 처음이었다. 그녀의 눈은 답을 기다리기보다는 내가 어떤 방식으로 말을 꺼내는지를 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한껏 낮게, 낮춰서 말했다.

“믿는다는 말은 편리하지요.”

그녀는 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도, 반박하지도 않았다. 마치 그 말이 이어질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숨의 간격만 조금 조정했다.

“그러나 믿음은 언제나 나중에 붙는 이름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선택을 먼저 하고, 그다음에 그것을 운명이라 부르지요.”

말이 끝나자, 천막 안의 공기가 아주 조금 달라졌다. 바람이 든 것도 아니고, 소리가 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질문이 처음 놓였을 때와는 다른 방향으로 자리를 옮긴 느낌이었다. 엘리안은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깊어졌다. 그리고 조용히 물었다.

"그렇다면 현자께서는, 선택이 닿을 수 있는 끝을 어디까지로 보시나요?”

이제야 알았다. 신의 계시를 받는 여사제가 나를 찾고, 도움이 필요하다라. 엘리안은 운명을 들으러 온 것이 아니었다. 이미 움직이기 시작한 선택이란 운명이 어디까지 닿아 있는지를 확인하러 온 것이었다. 나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시장의 소리와 황궁에서 흘러나온 이야기들, 그리고 다시 이어지기 시작한 흐름들을 곱씹어 보자 흐름이 하나의 선으로 겹쳐졌다. 나는 천막 바깥에서 스며드는 감각을 받아들이며 말했다.

“끝이라는 것은, 대개 도착해서야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끝이라 부르는 지점은, 대부분 되돌아보지 않기로 마음먹은 순간에 생깁니다. 선택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선택하지 않았던 다른 길들을 스스로 지워버렸을 때이지요.”

운수판을 돌리지 않았음에도 운수판의 원은 머릿속에서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그녀도 나와 같은 감각을 느끼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시장에서 들려온 이야기들, 황궁에서 흘러나온 소문들, 다시 이어지기 시작한 흐름들, 그 흐름들 중 어느 하나도 갑자기 생겨난 것은 아니다. 그저 그동안 보지 않으려 했던 것들이, 햇빛 아래에서 자리를 드러내고 있을 뿐이었다. 시간과 감각의 경계선에서 질문의 마지막 답이 정해졌다.

“선택이 닿을 수 있는 끝은, 사람이 더는 묻지 않기로 결심한 그 자리까지입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처음으로 물었다.

"신의 계시가 정해진 답을 내리다면, 운수판이 내리는 답은 선택에 의해 언제든 바꿀 수 있습니다. 아직 선택을 안 하셨다면, 어떻게, 신이 아닌 운수판에게 한번 물어보시겠습니까?"


그녀, 여사제, 엘리안과 나눈 대화의 실제 시간은 길지 않았으나 가볍지는 않았고 감각만큼은 길었다. 그녀의 질문은 분명했고, 그 질문이 요구하는 것은 답보다는 답에 도달하는 태도에 가까웠다. 나는 대답을 했다기보다는 어느 지점까지 갈 수 있는지, 어디가 멈추는 지점인지를 함께 확인했을 뿐이다.

사실 여사제가 던진 물음 자체는 그다지 새롭지는 않았다. 늘 듣던 운명에 대한 물음이었으니까. 그러나 답을 얻기 위해 묻는 질문이 아니라, 선택의 길이가 아직 남아 있는지를 가늠하기 위한 질문이었기에 새롭게 느껴졌다. 내가 선택을 제안하기도 전에 먼저 묻는 이는 처음이었으니. 그래서 나는 예언처럼 말하지 않았고, 결론처럼 정리하지도 않았다. 아니 않았다기보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내가 한 말은 앞날을 밝히기 위한 것도, 무언가를 막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선택이 언제 운명이라는 이름을 얻는지를, 다양한 운명을 오랜 세월 지켜본 사람의 기준으로 짚어주었을 뿐이다. 그 기준이 엘리안에게 닿았는지, 혹은 닿지 않았는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 질문이 이 자리에서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전 여사제님과의 약속이 잘 지켜질지는 알 수 없으나 나는 충분히 지켜질 거라 가늠한다. 운수판을 돌리며, 거짓되지 않아도 언제든 운명이 바뀔 수 있음을 수 없이, 많이 봐왔으니 말이다.


황제의 부재

신이 계시를 내리고 종교를 믿는 이곳에서 점술가를 찾는 이라 함은 대부분이 어디 가서 말하기 힘든 내용, 신도 종교도 해결해 주지 않는 이야기들이다. 그래서 이 천막을 찾는 이들은 다양한 이야기 속에서도 늘 비슷한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중 간혹 작은 목소리, 돌아보는 시선, 이름 대신 직위나 역할로 자신을 감추는 태도는 그에게 그만큼 알려지면 안 되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그중에는 황궁, 왕궁 사람부터 오래전부터 황궁과 인연을 맺어온 이들 등 다양한 사람이 있었고, 계절이 바뀔 때쯤 한 번씩 주기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이들도 있었다. 묻는 사람은 달랐으나 질문이 놓이는 자리는 늘 같았다. 그렇기에 말의 내용만큼이나 몸의 내용이 중요하다. 그래서 말을 꺼내기 전부터 몸을, 행동을 유심히 지켜볼 수밖에 없다. 천막 앞에서 한 박자 늦게 멈추는 발, 들어오며 천막 천을 한 번 더 만지는 손, 자리에 앉기 전 짧게 숨을 고르는 습관 등 말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고, 그 준비가 끝났다는 신호가 먼저 전달된다. 그리고 간혹 원하는 질문을 하지 못하는 이도,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하는 이도 있었으나 이곳을 찾는 이들은 대개 망설이기 위해 오는 것은 아니다. 결심을 하기 위해 혹은 결심이 끝난 뒤, 그 결심이 놓일 자리를 확인하러 온다. 그래서 이름을 묻지 않아도 괜찮았고 사정을 재촉할 필요도 없었다. 말을 아끼든 피하든 그저 흘러가는 대로, 그들의 이야기가 흘러갈 수 있는 가장 안전한 위치를 찾아줄 뿐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 사람들의 간격이 달라졌다. 특히나 황궁 사람들 중 한동안 뜸했던 사람이 다시 나타났고, 황궁과 연관된 사람들 또한 천막 앞에서 자주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전에는 이 천막을 찾지 않던 시장 사람들까지 합하면 점술가를 시작한 이래로 가장 많은 사람이 이곳을 찾았다. 그렇게 각자의 사연과 함께 이야기들이 빠르게 쌓이다 보니 어느덧 하나의 방향으로, 흐름으로 귀결되는 공통된 부분이 보였다. 바로 가장 높은 계급의 부재로부터 파생되는 흐름이었다.

세르바부스 황제는 항상 그 위치에, 자리에 있었으며 모두가 인정하는 황제였다. 그러나 그가 자리를 비웠음에도 황궁의 일은 나무랄 데 없이 잘 흘러갔으며 보고 절차가 줄어들고, 회의가 줄어든 만큼 오히려 일이 더 잘 돌아간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세르바부스 황제가 여태 자리를 비운적은 없었으나, 이와 비슷한 의문이 쌓여갈 때면 모든 것을 중재하고 완벽하게 정리했던 자였다. 그런 황제가 아무런 소식도 없이 자리를 비우자 이 의문의 씨앗을 중재한 사람은 루카르 대신관이었다.

권력의 힘인지, 계급의 힘인지 아니면 사실과 거짓이 맞물려 상상으로 만들어낸 세르바부스라는 인물의 힘인지, 대신관의 힘으로는 황제의 부재라는 의문을 중재하거나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그 의심의 씨앗이 타오르기 시작할 때부터 사람들은 입을 모아 루카르 대신관의 변화를 말했다. 손설 수범하며 앞장서서 일을 처리하던 그가, 실수를 찾으면 누군가를 나무라기보다 직접 해결하던 그가 자신이 하던 일은 전부 카일리스에게 맡기고 사람들의 실수를 발견하면 죽일 듯이 나무란다고 한다. 그 변화가 단번에 드러나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황제의 부재로 인해 기분이 안 좋아 보이거나, 이전보다 날이 서 있었다고 했다. 그다음엔 그저 말투가 달라졌다고 했다. 이전보다 짧아졌고 회의에서 오가던 설명은 줄어들고, 결과만 요구되기 시작했으며, 질문은 허락이 아닌 위험처럼 여겨졌다고들 했다. 실수를 지적하는 방식 또한 달라졌다.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를 묻는 대신, 왜 틀렸는지를 먼저 묻는 식이었다. 그다음, 카일리스에게 자신의 일을 다 맡긴 후에는 황제도 아닌 자가 황제처럼 보고만 받고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보고가 올라가기 전부터 황궁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쥐 잡듯이 잡았다고 한다. 그 후부터는 대신관에 대해 조심스럽게 이야기하던 이들이 대놓고 그를 욕하기 시작했다.

시장에서 들려온 이야기들 또한 비슷했다. 황궁의 흐름이 서서히 변해감에 따라 황궁과 관련된 사람들은 황궁 사람들이 점점 더 예민해진다고 했으며 일이 전보다 수월해졌음에도 마음은 전보다 불편해졌다고 했다. 이야기들은 제각각 흩어져 있었으나 반복되어 쌓여가는 감각은 분명했다. 그리고 황궁에서의 의문은 소문이 되어 대신관이 황제를 죽였다는 흉흉한 소문마저 돌고 있었다. 과연 루카르가 그럴 수 있을까? 나는 내 헌책방에서 다짐하던 소년 시절의 세르바부스와 루카르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아마 그 맹세를 알고 있는 사람은 이 대륙에서 세르바부스와 루카르 그리고 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을 감쌀 생각은 없다. 그저 그때의 모습처럼, 자신들의 뜻대로, 원하는 대로 좋은 세상을 만들고 그렇게 살아가는 선택을 하기를 바랄 뿐이다.

나는 오늘 새벽, 매일 홀로 돌려보던 운수판을 돌리지 않은 채 푸념하듯 생각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오는 손님을 받지 않은 채 오랜만에 오늘의 시장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늘 보던 광경이었지만, 어디에도 숨을 곳이 없어 보였다. 햇빛이 본격적으로 닿기 전부터 이미 드러난 것들이 있었다. 정오가 오면 더 또렷해질 것들이었다. 사람들은 변하지 않았고 자리는 그대로였으며 규칙 또한 어제와 같았다. 그런데도 흐름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무엇이 시작되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이전으로 돌아가지는 않으리라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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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 키워드- 성공, 명확성, 숨김없는 상태

필리네오스의 삶은 크게 둘로 나눠졌다.

운명을 선택할 수 없음으로 여기던 때와

운명을 선택할 수 있음으로 여기는 삶.

선택할 수 있음과 없음이 명확히 나눠짐에도

그는 하나의 정답을 정해 놓치는 않았다.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선택의 있음이 존재했고

선택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선택의 없음이 존재했다.

정해진 것은 운명인지, 선택인지 드러날 수 있는 순간은

성공을 이뤘을 때, 끝에 도달했을 때라는 거였다.

그 끝이 있고 난 후에 새로운 시작이 되어

다시 새로운 과정으로 연결되기는 했으나

최초에는, 첫 과정의 끝에 도달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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