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 대한 고민
인생에 대한 고민을 할 때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을 배제하면 생존자체가 인생이 되기에 인생에 대한 고민은 부질없어진다. 고로 인생을 고민할 때는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 삶의 의미가 전제조건으로 구성되어있어야만 한다. 물론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 삶의 의미 없이 인생을 고민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전제조건이 없이 하는 불완전한 고민은 속 빈 강정과도 같아서 말로는 '인생에 대한 고민'이라고 말하지만 삶을 고민하고, 삶과 인생을 동일시 여겨 고민하고, 연이어 존재자체를 고민하는 것이다. 이렇게 전제조건 없이 도달하는 인생, 존재자체에 대한 고민은 생과사를 말하며 삶이라는 과정은 어떤 규정도 할 수 없기에 되려 삶이 무가치하고 허망하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이 무가치와 허망함에 도달하게 되는 고민은 사람을 바둑알, 장기짝, 체스말로 보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으며 바둑알을 체스판에 두고 장기짝을 바둑판에 두고 체스말을 바둑판에 두는 꼴이라고 볼 수 있다. 바둑알을 바둑판에 두고 장기짝을 장기판에 두고 체스말을 체스판에 두는 전제조건, 삶에 의미와 같은 규정이 없으면 바둑알, 장기짝, 체스말은 존재자체와 의미를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 말인즉슨 인생을 고민할 때 삶의 의미가 배제된 것은 속이 꽉 찬 강정을 보고도 속 빈 강정만 탐구하는 것으로 전제조건, 삶에 의미를 배제하면 존재자체를 규정하지 않게 되어서 인생은 알지 못하는 것이란 오해를 만들지만 실상은 알 수 없는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인생은 그저 삶의 시작에서 마지막까지인 전부를 말하고 있기에 우리가 해야 할 인생의 고민은 삶에 대한 고민을 토대로 바라본 인생에 대한 고민이 되어야 하며 '사람은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살아간다'라는 전제조건을 토대로 고민을 시작해야만 제대로 된 고민을 할 수 있게 된다.
인생이란 무엇인가는 삶이 쌓이고 축적되고 반복되는 것, 탄생과 삶이라는 과정 끝에 죽음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정리할 수도 있으나 이렇게 정리하기에는 관점에 따른 궁금증이 명쾌하게 해소되지 않는다. 고로 인생에 대한 고민은 관점이 가장 중요하고 삶에 의미에 따른 관점에 따라 다르게 규정된다.
인생의 정답은 무엇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의 고민에서 가장 많이 혼동하는 관점은 정답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다. 애초에 각자의 삶에서는 '나'의 정답을 정할 수는 있겠지만 모두의 정답을 정할 수는 없기에 이 고민은 인생에 대한 고민으로 성립되지는 않는다. '나'의 정답이 아닌 모두의 정답을 정하고자 하는 인생의 고민은 사람마다 관점이 다르다는 조건을 배제시키고 '나'의 정답을 세상의 진리로 정의하고 인생의 답을 정하는 것이다. 이는 민초파에겐 민초가 인생의 정답이고 반민초파에겐 반민초가 인생의 정답인 것처럼 사람마다 살아있음을 느끼는 수단이 다름에도 이를 무시하고 인생을 민초파로 살아야 하는 것인지, 반민초파로 살아야 하는 것인지 중에 하나의 정답을 정하려 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인생의 정답을 정하기엔 꺼림칙하고 이런 유형의 고민을 다양하게 생각하다 보면 결국 '나'만이 정답 이거나 정답이 없다는 방향성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고로 정답이 있냐 없냐가 중요한 사람이라면 '인생은 모두의 정답은 없으나 각자의 정답은 있다'라고 정리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구태여 모두의 정답을 찾고자 한다면 본능에만 충실한 자연 생태계속의 인간을 돌아봐야 하는데 인류는 이미 본능에 충실한 외적본능뿐 아니라 내적욕구의 영향을 받고 있는데 이 모든 과정을 무시한 채로 바둑판에 체스말을 올려놓는 것이 진정한 궁금증이며 고민인지를 돌아봐야 한다.
인생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주관적이다.
생각하기 나름, 주관적으로 인생을 바라보는 것은 '나'의 관점으로 인생을 바라보는 것으로 가치관을 형성하기에 좋다. 이렇게 형성되는 가치관은 같은 주관이라도 어떤 방식으로 인생을 바라보냐에 따라 장점과 단점이 극명하게 나눠진다.
장점이라 함은 형성된 가치관이 생각하기 나름인 것으로 틀에 박힌 고정된 사고방식이 아닌 언제든 변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을 토대로 '내'가 주관적으로 바라보는 인생과 '남'이 주관적으로 바라보는 인생이 다르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이는 언제든 별할 수 있는 가치관이 시도 때도 없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맞게 변하는 메타인지를 필요로 하는 것으로 인생을 알고 인지하기 위해 자기객관화, 메타인지를 기반으로 인생을 자신의 주관으로 볼 수 있음을 말한다. 이 장점과 내적욕구를 토대로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으대로 들었다면 삶의 의미는 보고 듣는 것을 객관적으로 판단한 후 주관적으로 '나'는 어떤 것을 느끼고 싶은지 알아가고 인생에 어떤 상황이 벌어지든 보고 싶은 대로 볼 수 있고 듣고 싶은 대로 들을 수 있다는 것에 해당하게 된다. 이렇게 '나'를 객관적으로 받아들이고 주관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은 굉장한 장점이다.
반면 '인생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주관적이다'에서 전달되는 뉘앙스적인 장점을 뺀 말의 어폐를 보면 자신은 느끼지 못하는 치명적인 단점이 된다.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요소를 과거에 긍정적인 사람, 부정적인 사람으로 규정짓던 것처럼 긍정과 부정으로 나눠서 생각해 보면 긍정은 동의, 부정은 비동의의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이를 노예제도라는 관점에 연결 지으면 긍정과 부정은 복종의 개념으로 연결 지을 수 있다. 만약 오늘부터 노예가 되라라는 말을 들었을 때 긍정하면 노예가 되고 부정하면 귀족이 되는 상황이라면 긍정적인 사람이라도 뭐가 옳고 그른지, 맞는지 틀린 지를 떠나서 대부분이 부정하는 것을 선택할 것이다. 이는 긍정에도 양면성이 있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양면성을 무시한 채 흑백논리식의 사고와 자신의 주관만 강조하는 객관적인 판단을 통한 주관이 아닌 매몰된 주관으로 인생을 바라보는 것은 치명적인 단점이다. 이렇게 파생되는 말의 어폐만 놓고 보면 긍정적인 아이와 부정적인 아이로 나누던 시절에 긍정적인 아이가 되는 것은 부모의 입장에서 좋은 것이지 좋은 아이가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음에도 이미 그렇게 바라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자신만의 잣대로 아이를, 삶을, 인생을 긍정적인 아이가 마냥 좋은 것이라고 규정하는 꼴이다. 이를 긍정과 부정이 아닌 낙관과 비관으로 보면 어떨지로 생각해 봐도 같다. 부당한 일을 겪어도 낙관적으로만 본다면 냉정하게 좋다고만 말할 수 없다. 또 이를 낙천과 염세로 생각해 봐도 같다. 모두가 애도하는 자리에서 낙천적으로 혼자만 즐긴다면 낙천적인 게 좋을 수만은 없다.
긍정, 낙관, 낙천 모두 양면성이 있다. 이 양면성은 사건과 상황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는 것이고 긍정, 낙관, 낙천이 무조건적으로 좋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착하다는 프레임을 씌우고 이용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고 '인생을 생각하기 나름이거나 주관적으로 보는 것은 나쁘다'라는 것이 아니라 장점의 방향성이 되기 위한 전제조건인 자기객관화와 메타인지가 갖춰져야만 온전한 장점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자기객관화와 메타인지가 빠진 '인생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주관적이다'라는 고민은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쓸 때 책에서 정해진 줄거리를 무시한 채 '나'만의 줄거리로 재구성해서 멋대로 읽고선 줄거리 뺀 느낀 점만 말하는 것인 반면 전제조건이 갖춰진 고민은 책을 줄거리 그대로 읽고 '내'가 느낀 점을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인생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주관적이다'라는 고민은 누군가에겐 깨달음을 주고 누군가에는 뉘앙스만 느낄 뿐 와닿지 않을 수 있다.
인생은 찾아가는 것, 만들어가는 것
인생을 찾는 것, 만들어가는 것은 목적, 목표지향적인 인생의 대표적인 예시로 목표지향적인 사람이 추구하는 인생이라고 볼 수 있다. 인생을 찾아가는 것, 만들어가는 것이라 여기는 사람은 살아있음을 느끼는 원동력자체가 목적, 목표를 이루는 것이기에 표면적으로 굉장히 좋고 목적, 목표를 달성했을 때는 실질적으로도 좋아 보인다. 이는 인생을 찾아가는 것, 만들어가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삶이라는 과정자체가 원동력이라는 점에서 훌륭해 보이고 과정에서 오는 힘듦과 어려움은 목적, 목표를 달성했을 때 과정에서 오는 힘듦과 어려움을 상회할 만큼 보상이 달콤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구조는 계속해서 발전해 나가는 '나', 성공하는 '나'로 보았을 때 선순환의 구조로 보인다. 그러나 살아있음을 느끼는 원동력이 경험적인 것보다 비경험적인 것에 집중되어 있어서 과도한 몰입이나 정신력을 끌어다 쓸 때 목표나 목적이 흔들리면 해내야 하는 강박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현실적으로 실패하게 되면 번아웃이나 슬럼프에 대한 리스크는 배가 된다. 그래서 성공무새들이 판치는 현시점의 한국사회에서는 그들이 말하는 목적, 목표지향적인 삶의 수많은 장점을 뒤로한 채 방향성, 관점에 따른 단점을 중점으로 바라보려 한다.
'나'의 인생을 찾아서 만족스러우면 찾은 것으로 끝나지만 찾은 인생이 만족스럽지 않으면 새로운 인생을 찾거나 새로운 '나'를 만들게 된다. 그런데 그렇게 새로운 인생을 찾거나 새로운 '나'를 만드는 것도 결국은 '나', '나'의 인생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다. 그래서 인생을 찾아가는 것, 만들어가는 것에서는 삶이라는 과정에서 '나'라는 존재를 알지 못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한 채로 만들어가느냐, '나'라는 존재를 알고 받아들임으로써 만들어가느냐로 나눠졌을 때 천지차이가 난다.
'나'라는 존재를 알지 못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한 채로 인생을 찾고 만들어가면 '보이는 나'에게 집중하게 된다. 이 관점으로 보면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은 '자리를 정하고 그에 맞는 사람이 된다'라는 뜻이 되며 '자리에 맞춰 나를 바꾼다'는 말이 된다. 물론 인생을 찾고 만들기 위해 목적, 목표를 정할 때 충분히 고심을 했겠지만 '스스로의 나'를 챙기지 못한 채 '보이는 나'에게만 집중하게 되면 당장 눈앞에 '내가 원하는 나', 삶의 의미가 있더라도 '나'와 관계없는 인생의 의미만을 쫓게 된다. 삶의 의미를 찾는 것보다 인생의 의미를 쫓는 것이 더 중요해졌다는 것은 사회와 '나'사이의 객관적인 메타인지가 뛰어나지는 반면 사회가 제외된 '나'에 대한 주관적인 메타인지는 부족해짐을 의미한다. 고로 '나'라는 존재를 알지 못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한 채로 인생을 찾고 만들어가면 스스로에 대한 '나'의 만족도보다 '보이는 나'의 만족도가 더 크고 중요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자아 의존도가 굉장히 높아지는데 공허와 관련된 힘듦이 다가오면 '보이는 나'만 신경 쓰면 되기에 자아 대체 의존도를 충족함으로써 '진짜 나'의 상태를 파악하기는 점차 힘들어진다. 이는 '나'라는 존재를 탐구하지 않은 채로 어찌어찌해서 목적, 목표라는 최종적인 이상향에 도달하는 행위는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살아있음일지 아닐지를 목적과 목표를 가지고 도박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인생에는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있어서 최종적인 이상향에 도달하는 경우도 드물기에 이른 죽음이 있지 않은 이상 '나'를 탐구하지 않은 채로 도박을 통해 도달한 이상향을 부정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반면 '나'라는 존재를 알고 받아들이고 인생을 만들어가는 것은 '나'와의 관계에 대한 메타인지를 기반으로 하는 삶을 말한다. 이 관점은 '나'라는 존재를 알지 못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한 채로 만들어가는 것과 대조돼 보인다. 대조해서 생각하면 사회 속의 '내'가 아닌 '스스로의 내'가 중점이 되기에 '나'의 시작점인 뿌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으로 뿌리가 없는 '나'는 삶이 꺾였을 때 '나'의 삶이 아닌 다른 삶을 모방할 수밖에 없지만 뿌리가 있는 '나'는 삶이 꺾였을 때 언제든 '나'로 다시 자라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대조한 생각이 아닌 실상을 보면 사회와 '나' 사이의 메타인지는 절대 무시할 수가 없다. 만약 사회와 '나' 사이의 메타인지를 무시하고 '나'와의 관계에 대한 메타인지만 생각한다면 '나'만을 중요하게 여기고 '나'만이 옳다는 가치관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렇게 '내'가 바라보는 것과 생각하는 모든 것이 옳다고 단정 짓게 되면 '나'를 사랑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만 같은 환상을 만들어 이기적인 사랑무새가 되어버린다. 사회의 방향성을 무시한 채 '내'가 사랑하는 것, 옳다고 말하는 것을 부정하는 모든 것을 악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에도 인간으로서의 겸손함을 가지고 사람은 모두가 다르듯이 사랑하는 것도 다르다는 것을 유념한 채 '나'라는 존재에 만족하고 사랑하는 상태가 되어야만 한다.
인생은 찾아가는 것, 만들어가는 것이나 목적, 목표지향적인 삶이 장점이 되기 위해서는 성공무새들이 추구하는 '보이는 나'에만 치중되어서도 안되고 이기적 사랑무새들이 추구하는 '스스로의 나'에만 치중되어서도 안된다. 이는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사회의 살아있음, 사회와의 관계, 사회의 의미부여는 무시해선 안될 정도로 중요하고 '나'의 기반이 되는 '나'의 살아있음, '나'와의 관계, '나'의 의미부여는 사회를 제외한 '나'만을 강조해야 한다는 것이 아닌 사회와 '나' 사이의 메타인지와 '나'와의 관계에 대한 인지가 분리되어야 함을 말한다. 이 분리는 사회에서의 목표, 목적과 개인의 목표, 목적이 분리되어함을 뜻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발달된 메타인지는 한쪽으로 치우쳐 매몰되는 것을 방지하고 '보이는 나', '스스로의 나' 둘 다 사랑할 수 있는 가치관을 형성할 수 있게 한다. 그렇게 목적, 목표를 이루거나 이루지 못한다의 개념이 아닌 주어진 결과에 만족하는 삶의 방향성을 만들어준다. 고로 '내'가 만족하기 위해 인생을 찾아가고 만들어가는 것 너머에는 인생을 찾고 만들지 않아도 만족할 수 있는 삶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보이는 삶에 집중하는, '보이는 나'를 통해 살아있음을 느끼는 사람일지라도 '스스로의 나'라는 뿌리를 잘라내서는 안 되고 아무리 '보이는 나'에 집중하더라도 '스스로의 나'로써의 시간이 존재하기에 '보이는 나'를 '진짜 나'라고 여길지라도 '스스로의 나'의 자리를 마련해두어야 한다. 인생에는 언제나, '나'에게는 언제나 다른 길도 존재한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사회를 무시하지 않은 채 존중하는 마음으로 '나'를 알고 만들어가는 삶은 만족하기만 하면 꿈꾸던 이상향이 바로 눈앞에 있게 된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 살아있음의 연속
이 책이 개똥철학 선택편인만큼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는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해야 하지만 인생에는 선택할 수 없는 것이 엄연히 존재한다. 그래서 선택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 짓지 않으면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는 말에는 괴리감이 남는다. 그리고 개똥철학 선택 편은 선택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선택이지 선택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선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순간의 선택이라는 결과가 수많은 과거의 선택에서 파생되었다고 확정 짓는 오해를 할 수 있으나 그것은 확률이며 예측이지 확정적인 것이 아니다. 이를 선택하지 않았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결과와 선택해야만 일어날 수 있는 결과로 나누면 선택에 의해 도달한 것은 변함없으나 선택하지 않았다고, 선택했다고 해서 모두 같은 결과에 도달한다고는 장담할 수 없다. 이는 과거의 선택들로 확률을 높여 현재의 선택을 하듯 현재의 선택들로 확률을 높여 미래의 선택이 가능한 것이지 과거의 선택을 통해 현재의 선택이 확정되거나 현재의 선택으로 미래의 선택이 확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거다. 이렇게 선택은 확정적인 것이 아니며 선택을 한다는 것은 선택의 순간, 상황에 대한 의사결정으로 한정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선택은 '선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을 하는 것이 아닌 선택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짓이 위함이기에 이를 요약하면 이러하다.
먹는 것, 자는 것, 사는 것, 죽는 것 등 본능이나 자연현상은 선택인가?라고 생각하면 관점에 따라, 상황에 따라 선택할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고 정의된다. 여기서 선택할 수 있다는 관점은 언제 먹고 언제 잘 것인지, 무엇을 먹을지 등이며 선택할 수 없는 것은 먹어야만 하고 자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는 선택불가능함에서 선택가능함으로 파생되는 것을 의미하며 자연현상으로 선택이 불가능한 살기 위해 먹고, 자고 하는 행동에서 파생된 언제 먹고, 자고라는 행동은 선택이 된다는 말이다. 만약 선택불가능한 자연현상을 과학의 진화로 선택이 가능해진다면 그것인 현 인류의 고민이 아닌 신인류의 고민일 것이다.
'내'가 있기에 선택이 존재할 수 있지 않은가?라고 생각하면 '나'라는 존재가 있기에 '나'의 선택이 있는 것은 맞으나 이는 '내'가 존재하지 않아도 구성되는 존재의 방증이 된다. 순서자체가 '내'가 있기에 지구가 있는 것이 아닌 지구가 있기에 '내'가 존재하며 '나'는 그저 지구를 느끼고 인지할 수 있는 생명체일 뿐이다. 이러한 생명체로써 모든 것이 선택이며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나'의 선택의 여하에 속한 것은 선택이 가능하나 '나'의 선택의 여하에 속하지 않는 것은 선택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나'를 중심으로 모든 것이 선택가능하다는 것도, 우주를 중심으로 모든 것이 선택불가능하다는 것도 모순이며 선택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명백히 나눠져 있는 것이 된다.
이를 토대로 인생은 선택의 연속에 접근하면 '인생은 선택의 연속'은 '살아있음의 연속'이라는 대전제에 속한다. 선택의 조건에 놓여있지 않은 아기를 보면 무엇인가를 선택하지 않고 본능에 의해 살고자 한다. 그렇게 살아있음의 연속을 거쳐 학습을 통해 자아가 형성되고 나서야 선택의 범주에 속하는 것을 선택회로를 거쳐 선택한다.
인생은 살아있음의 연속이라는 말은 주체성과 연결된다. 선택가능한 범주의 개인적인 선택을 할 때는 타인, 사회의 영향을 아무리 많이 받아도, '나'의 의사가 일프로만 담겼더라도 결정은 '내'가 내렸다는 것에 의의를 두는 것이다. '나'의 의사가 일프로가 담긴 선택으로 결정된 일이 불만족스럽더라도 타인 탓, 사회 탓이 아닌 백 프로 '내'가 책임져야 하는 '나'의 선택인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반대로 백 프로 '나'의 의사로 선택을 했음에도 누군가 책임을 대신 짊어질 때도 있다. 그래서 살아있음의 연속이라는 관점에서는 좋든 싫든 '내'가 원하는 선택을 하고 경험하는 것, '내'가 느끼고 싶은 살아있음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 '내'가 원하는 살아있음을 느끼며 살아가는 선택과 삶을 지향한다. 그렇게 되면 선택 불가능 한 것을 제외하고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면 인생에 대한 주체성과 책임감을 중점으로 '내'가 원하는 삶을 선택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서 무엇이든 시도할 수 있게 된다.
인생이란
인생을 고민하게 되면 인생의 정답, 생각하기 나름, 찾아가는 것, 선택의 연속등 관점에 따라 다양한 인생에 도달한다. 이는 관점에 따라 모든 것이 하나로 통하기도 하고, 나눠지기도 하고, 언어유희나 말장난으로 보이기에 인생은 의미부여, 자기합리화하기 나름인 것이 된다. 이는 '내'가 행복한 사람이라고 가정하고 생각하고 세상을 바라봤을 때와 불행한 사람이라고 가정하고 생각하고 세상을 바라봤을 때의 세상이 다른 것과 같고 사회에서 객관적으로 행복과 불행을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나'의 행복과 불행은 '내'가 결정 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에 대한 궁금증은 타인의 인생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나'를 바라보고 돌아봐야 하며 삶의 의미를 몰라서 타인의 인생을 보고 배울 수는 있으나 보고 배우는 인생은 타인의 관점에서 바라본 인생이며 '나'의 관점으로 바라본 인생은 '내'가 가장 잘 알 것이다.
'내'가 바라보는 인생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것은 단지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는 방법을 모를 뿐이다. '내' 바라보는 인생은 생각보다 간단해서 차근차근 찾고자 하면 결국 찾아질 것이다. 찾기 위해서는 원하고 싶은 것을 원하고 느끼고 싶은 것을 느끼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오히려 단순하게 생각할수록 좋다. 겉치레만 빼면 예술을 할 때 나의 인생은 예술이고, 사랑을 할 때 나의 인생은 사랑이다. 인생은 거창할 필요도 대단할 필요도 없으며 나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모든 것이 인생이 된다. 그리고 인생이란 삶이 모인 것이기에 삶의 의미를 알면 인생이 무엇인지를 고민할지 말지는 자유가 된다.
'나'만의 인생의 의미를 규정짓는 것, 인생관이 있는 것은 좋으나 인생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인생을 확정 짓고서 "내가 이만큼 살아보니 인생은 이런 거다"라고 답을 정하고 규정짓는 것은 사람마다 인생이 다 다르다는 것을 망각한 것이고 '나'의 주장만 옳다고 하는 것은 '나'의 인생을 강요하는 것이 되어버려서 바람직하지 않다. 그래서 누군가 인생에 대한 질문을 한다면 인생을 확정 짓지 않고 "그래도 이 정도 살아보니 '나'는 이러하더라"라고 답을 정하지 않고 느낀 점을 말하는 것 낫다.
'나'만의 정답을 정해놓는 것도 관점에 따른 판단이기에 규정짓는 것만이 가능하다. 관점을 살아온 세월로 잡는다면 30년, 60년, 90년, 120년 살아보니 알게 된 것이 아니라 120년을 산 '나'라는 사람의 관점에서 판단하고 규정짓는 것이다. 여기서 120년의 관점과 판단이 후회된다고 규정짓고서 30년을 살았을 때로 돌아가면 어떻게 해야겠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30년을 살았던 시절로 돌아가서 120년의 관점으로 다시 살면 60년도 살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지금 120년을 살았다고 해서 과거로 돌아가면 똑같이 120년을 살 거라는 것은 장담할 수가 없는 것이다. 30년, 60년, 90년의 관점과 판단으로 120년의 관점을 볼 수 있는 것이고 '내'가 과거에 이렇게 살았으면 어땠을까를 고민하면서 살지 와 앞으로의 여생을 어떻게 느끼고 살 것인지는 선택사항이다.
오랜 세월을 지나오신 분들의 고견을 폄하하지는 않는다. 인생은 모두가 가는 길, 방향성이 다르다는 것이고 고견이 가장 힘을 발하기 위해선 '나'의 세월이 궁금한 이를 제외하고는 '나'의 길을 말해주는 것이 아닌 질문한 이가 '나'만의 길을 찾을 수 있게끔 도와주는 것이 전제조건이 되어야 한다. 고로 고견을 듣는 이는 모든 것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내'가 받아들일 것과 그렇지 않을 것을 구분하고서 '나'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같은 결론에 도달하더라도 인생의 의미는 '내'가 찾아야 한다. 만약 주관이 없다면 인생의 의미는 없는 것이고 기껏 얻은 인생의 의미는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어차피 주관이 변하면 관점도 변하기에 삶의 의미를 먼저 찾기를 바란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했을 때 '나는 삶의 의미가 없다.', '나는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다.'라고 규정짓지만 마라. 찾지 못한다와 아직 찾지 못했다의 차이는 삶과 죽음의 차이만큼 커질 수도 있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것은 알고 보면 등잔밑이 어두웠거나 이미 느끼고 있으나 인식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만약 삶의 의미, 인생의 의미가 중요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나'의 관점에서 삶의 의미가, 인생의 의미가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규정짓는 것이다. 삶의 의미와 인생의 의미가 중요한지 아닌지는 정의할 수 없지만 '내'가 살아갈 삶이, 인생이 중요하지 않다고 규정지을지 중요하다고 규정지을지는 '나'의 판단에 달려있다.
인생의 의미, 인생관은 삶에서 쌓인 생각들은 무엇인지, 관점은 무엇인지, 찾은 것은 무엇인지, 만든 것은 무엇인지, 선택한 것은 무엇인지, 반복된 것은 무엇인지 등의 모든 고민들의 집합체이며 '내가 바라보는 세상'이다. 그렇다고 앞으로의 인생을 단정 짓지는 마라. 단정 짓거나 확정 지을 수 있는 인생은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삶에 해당하는 인생이다. 단정 짓고 확정 지은 인생 또한 관점에 따라 바뀔 수가 있다. 이처럼 현재부터 미래까지의 '나'의 인생은 생각에 따라 유지되기도, 변화하기도 한다. 그래서 인생의 의미를 고민할 때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그것이 정녕 '내가 원하는 나'인가? '내가 원하는 나'로써 과거부터 현재를 살아왔다면 미래도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하겠지만 '현재의 나'와 '내가 원하는 내'가 다르다면 앞으로는 '내가 원하는 나'로써 삶을 살아가면 된다. 정말로 그냥 그렇게 살면 된다.
당신이 느끼고 싶은 삶은 무엇인가?
당신은 어떤 사람이고 싶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