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원하는 사랑은 무엇인가?
사랑을 정의하기 이전에는 본능, 욕구 충족, 생존에 유리한 선택 등이 사랑을 대변했었다. 이러한 사랑을 대변하는 행동에는 '내'가 특별함을 느낄 수 있는 대상을 사랑함으로써 '내가 사랑하는 대상을 특별하게 여겼을 것이다. 그런데 사랑의 정의가 있는 지금은 오히려 '특별한 대상을 사랑한다'라는 오해로 특별한 대상이 아닌 '내가 특별하게 여기는 대상을 사랑한다'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한다. 물론 사람마다 원하는 사랑이 다르기에 보편적으로 특별한 사람을 특별하게 여기는 사람에게는 특별한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 사랑이다. 이 아리송한 사랑의 개념, 오해와 망각을 바로잡으려면 보편적으로 특별한 대상은 객관적 특별함으로, '나'에게 특별한 대상은 주관적 특별함으로 나눠져야 한다.
주관적 특별함이 사랑인 사람이 주관적으로 특별하게 여기는 대상이 아닌, 주관 없이 객관적으로 특별한 대상을 사랑하게 되면 자신의 주관이 아닌 타인의 평가에 따라 사랑하는 대상을 특별하게 여기기도, 특별하게 여기지 않게도 된다. 이는 주관적, 객관적 특별함 중 무엇을 특별하게 여기든 객관적으로 특별한 대상이라는 이유로 사랑하게 되면 타인에 의해 '나'의 사랑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객관적으로 특별한 대상이 생존에 유리할 경우에는 생존을 위해 자신의 주관 없이 사랑할 수는 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생존이라는 장점이 사라지면 같이 사라질 것이다. 그래서 주관적 특별함을 특별하게 여기는 사람이 객관적 특별함을 쫓는 것은 사랑의 시작점이 잘못된 것이고 객관적 특별함보다 주관적 특별함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주관적 특별함이 중요한 이유는 사랑에 빠지는 과정에서 작용한 객관적 특별함이 주관적으로도 작용되어야 객관적 특별함이 사라졌을 때 사랑이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특별하게 여기는 객관적 특별함은 변할 수 있기에 '내'가 객관적 특별함을 특별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면 타인에 의해 객관적 특별함이 달라진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내'가 주관적 특별함을 특별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면 대상을 사랑할 때는 타인이 아닌 '내'가 특별하게 여기는 부분을 중점으로 두고 대상을 판단해야 한다.
사랑의 유효기간을 토대로 생각하면 결혼 후 산전수전 다 겪고 아이까지 다 키우고 나서 사랑보다 정, 친밀감으로 살아가는 상황이 된다면 사랑이 없어서 이혼을 할 수도 있고 정으로 함께 살 수도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을 '사랑은 특별함'을 토대로 보면 결혼관계가 지속되는 것은 '내'가 특별하게 여기는 요소가 충족되거나, 대체되어 충족되거나, 대상자체를 특별하게 여겨 욕구가 충족된 것이고 결혼관계가 지속되지 않는다면 '내'가 특별하게 여기는 요소가 충족되지 않고, 대체될 요소도 부족하고, 대상자체를 특별하게 여기더라도 '내'가 특별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연애, 결혼관계에서 상대방을 특별하게 여기는 것의 시작은 상대방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내'가 특별하게 여기는 것에서 시작한다. 객관적으로 특별한 사람일지라도 '내'가 대상을 특별하게 여겨야 사랑의 특별함이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방의 객관적 특별함으로 인해 '내'가 별로인 사람이라고 느껴진다면 사랑의 본질인 '사랑은 내가 특별함을 느끼기 위해 하는 것'과는 멀어지게 된다. "상대방은 특별한 사람이고 '나'에게 너무 잘해주는데 오히려 그게 더 힘들어서 헤어졌다"라는 이야기가 배부른 것이 아닌 진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상대가 객관적으로 특별하고 '나'도 특별하게 여겨도 '내'가 특별함을 느끼지 못하면 않으면 개인의 특별함을 충족하는 관계는 성립해도 사랑의 관계는 성립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물론 객관적으로 너무나 좋은 특별한 사람과 사랑에 빠지고 서로가 원하는 특별함을 느껴서 평생을 사랑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너무나 특별한 상대방이 '나'를 특별하게 여기지 않아서, 상대방은 특별하지만 '나'에게는 특별하지 않아서, 서로는 특별하지만 서로가 필요한 특별함에 대한 욕구충족이 되지 않아서 이별을 할 수도 있다. 이렇게 객관적으로 특별한 사람을 선택해서 사랑하더라도 스스로의 선택에 들어가기에 객관적으로 특별한 사람을 특별하게 여기는 것도 주관에 포함시켜야 한다. 그래서 사랑에 있어서 고려할 것은 객관적인 특별한 사람이 아닌 주관적인 특별한 사람이다.
이제 단점이 보이고, 장점마저 단점으로 보인다면 사랑이 사라진 것일까?를 '사랑은 특별함'에 대입해 보면 단점이 아닌 객관적이든 주관적이든 연인, 결혼관계일 때는 특별하게 여기던 대상과 헤어지고 나서는 특별하게 여기지 않을 때, 이때는 '내'가 특별하다고 여기던 대상은 변한 게 없어도 '내'가 특별하게 여기지 않으면서 특별함을 잃게 된 거다. 이는 사랑함에 있어서 대상이 실제로 특별한가, 특별하지 않은가 보다 '내'가 특별하게 여기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거다.
특별한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닌 '내'가 특별하게 여기는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기에 만날 때는 그렇게 특별하던 사람이 헤어진 후에는 특별하게 여겨지지 않아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사랑은 내가 특별함을 느끼기 위해 하는 것'이라서 '내'가 특별함을 느껴야 가능하고 '내'가 특별함을 느낄 수 있게 만들어주던 대상과의 헤어짐에서 특별하다고 여기던 것을 특별하지 않다고 여기는 과정에서 '내'가 받을 감정의 후폭풍도 야기한다. 이 후폭풍은 대상을 특별하게 여기지 않음으로써 '나'도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며 배신감, 분노, 그리움등 다양한 감정을 경험하게 된다.
연인관계가 끝나고 난 뒤 해야 할 것은 특별한 존재를 잊는 것이 아닌 특별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다. 사랑했던 대상이 특별하지 않게 되는 게 아니라 '내'가 그 대상을 특별하게 여기지 않게 되는 것이다. '내'가 대상을 특별하게 여기고 사랑을 나눴다는 것은 그 대상을 사랑함으로써 '내'가 특별함을 느낄 수 있다는 믿음에서이다. 그래서 사랑이 끝나고 난 뒤 그 대상이 특별하지 않게 되었다면 그 대상을 더 이상 특별하게 여기지 않음과 동시에 대상을 통해 '내'가 특별함을 느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헤어짐 없이 특별하게 여기지 않게 되었다면 특별함이 부족한 것이기에 연인관계의 지속을 원한다면 서로의 특별함을 어떻게 충족해 줄 것인지에 대한 소통이 필요할 것이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 중 누구를 사랑해야 하는지는 정해진 답이 있다기보다는 자신의 선택에 달려있다. 여기서 선택해야 할 것은 '나'를 좋아하든, '내'가 좋아하든 '내'가 얼마나 특별함을 느낄 수 있는지이다. 개인의 성향에 따라 둘 중 어떤 것을 선택해야 '내'가 더 특별함을 느끼는지는 다르다. 그래서 극단적으로 보면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통해 '내'가 특별함을 아예 느끼지 못한다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무조건 선택할 것이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통해 '내'가 특별해지는 느낌이 아예 없다면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무조건 선택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극단적으로 치닫지 않는 이상에는 '내'가 평소에 무엇을 더 선호했더라도 현재 처해진 상황에 따라 '나'를 좋아하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 중 더 특별하다고 여겨지는 선택을 하게 된다. 결국 '나'를 좋아하는 사람과 '내'가 좋아하는 사람 중 정해진 답은 없고 더 특별하다고 여겨지는 선택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개인차는 있지만 여기서 파생되는 상황들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서 특별함을 느끼고 있어도 관계가 지속적으로 진전되지 않으면 '나'를 좋아하는 다른 사람이 주는 특별함에 영향을 받는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통해 특별함이 채워지는 성향이라면 남주기에는 '내'가 느끼는 특별함이 있고 '내'가 갖기에는 연애를 해야 할 만큼 특별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생기기 쉽다.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면서 생길 수 있는 특별함의 상실이라는 리스크를 감당하기 싫어서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통해 '내'가 특별함을 느끼는 것을 극단적으로 선택을 하면 어장만을 하기도 한다. 이때 어장을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기에는 '내가 특별함을 느끼게 해주는 사랑'임은 명백하다. 그러나 자신이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타인의 사랑을 이용한 사기를 중점으로 사회의 규칙에 따라 사랑이 있는 어장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서로가 죽일 것처럼 싫어하던 악연과의 관계가 지속되면서 미운 정이 쌓이고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어 대체 불가능한 특별함이 축적되면 악연은 반전되어 연인이 될 수 있다.
등이 있는데 이를 토대로 '내'가 좋아하지만 '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연인관계가 되기 위한 노력으로 꾸준하게 얼굴을 비추거나 연락을 하다가 적당한 타이밍에 연락을 끊으라는 이야기, 상대방의 이상형에 '나'를 맞추라는 이야기, 상대방의 관심사에 맞추거나 공통점을 찾아 동질감을 만들라는 이야기 등이 있다. 이러한 이야기의 대부분은 '내'가 특별함을 느끼기 위해 사랑을 표현하는 게 잘못은 아니더라도 그보다는 연인관계가 되기 위한 노력으로 '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 무작정 사랑을 표현하기보다는 특별함의 상실을 활용하거나 '나'로 인해 상대방이 특별함을 느끼게 만들거나 '나'를 특별하게 여기도록 만들라는 거다.
사랑의 본질에는 제한이 없다. 그래서 동물, 물질등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기에 '내'가 특별함을 느끼기 위해 하는 사랑이라면 짝사랑 또한 사랑이다. 그리고 각자의 사랑이 다른 것처럼 각자의 짝사랑 또한 다르다. 여기서 '특별함을 느끼고 있는가?'라는 물음에 짝사랑 중인 사람이 특별함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 짝사랑은 무엇 일 끼? 사랑은 특별함이고 짝사랑도 사랑인데 짝사랑하는 당사자가 원하던 특별함을 느끼지 못하는 모순이 생겨났다. 그래서 이런 모순은 왜 생기는 것인지, 짝사랑은 왜 하는 것인지를 짝사랑의 유형중 일부를 통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백마 탄 왕자는 상상 속의 존재하는 미지의 존재이다. 이 미지의 존재를 기다리는 것은 실존여부도 모르는 운명의 사람을 짝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는 사람은 언젠가는 만날 것이라는 특별함을 느끼며 기다리게 된다. 그리고 백마 탄 왕자 유형의 대개는 현실의 연애가 아닌 상상 속의 연애가 주가 되기에 연애경험이 적거나 없는 사람이 빠져들기 쉬운 유형이다.
현실보다 상상 속 특별함의 지속시간이 길어진 백마 탄 왕자 유형은 미지의 존재가 나타날 것이라는 특별함에 기대기보다는 미지의 존재를 기다리는 '나' 자체를 특별하게 여기게 된다. 그리고 '나' 자체를 특별하게 여기는 깊이가 깊어지면 애매한 특별함보다는 확실한 특별함을 요하기에 상상 속 인물이 나타나더라도 확실하지 않으면 백마 탄 왕자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는 특별한 존재를 기다리는 것이 아닌 '내'가 특별함을 느낄 수 있게 만들어줄 존재를 기다리는 것으로 상상 속 존재에 부합하는 대상과의 사랑에 실패하면 '나'는 특별한데 '나'의 특별함을 알아줄 사람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백마 탄 왕자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 현실 부정은 사랑이 '나'를 특별하게도 특별하지 않게도 하는 현실의 사랑과 특별한 사람보다는 특별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사실도 함께 부정하게 만든다.
정말로 기다리던 운명의 짝이 나타나기만 하면 기다리던 자신도 특별해지고 그 이후의 사랑도 특별해질 것이기에 미지의 존재를 짝사랑하는 것을 원한다면 백마 탄 왕자 유형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다만 사람은 특별한 존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닌 '내'가 특별하다고 여기는 대상을 사랑한다는 것과 '내'가 특별함을 느끼기 위해 사랑한다는 기본전제를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만 현실적으로 '내'가 짝사랑하는 미지의 존재와 비슷한 유형의 대상이 존재하는지, '나'와 같은 유형의 사례가 있는지, '내'가 상상 속의 운명의 짝을 만날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등을 현실적으로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가늠해 봤을 때 실질적으로 백마 탄 왕자유형의 짝사랑을 원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미지의 존재를 짝사랑하는 것이 아닌 현실의 대상 중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내'가 원하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연인의 감정을 느끼는 대상이 확실히 정해져 있으나 정말로 혼자 좋아하는 짝사랑이 있다. 이 짝사랑은 크게 연인이 되기 위한 과정의 일부로 사랑의 완성, 완성되지 않음으로 끝나는 사랑과 연인이 되기 위한 과정과 무관한 사랑이 있다. 이 중 연인이 되기 위한 과정과 무관한 사랑이 짝사랑 러버이다. 짝사랑 러버는 얼핏 보면 팬심과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팬심은 팬으로서 대상을 사랑하고 그로 인해 '내'가 특별함을 느끼는 것으로 '내'가 원하는 특별함인 반면 짝사랑 러버는 대상을 사랑하면서 '내'가 느끼는 특별함이 '내'가 원하지 않던 특별함이라는 모순이 있다. 짝사랑 러버는 연인의 감정을 느끼는 대상과 연인이 되기 위한 일련의 과정이 아닌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내'가 느끼는 감정, 사랑을 이루지 못하는 '내'가 처한 상황 등을 특별하게 여기겠어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기에 오는 특별함이 강조된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면서 가슴 아프고 슬픈 감정을 느끼면서 특별함이 지속되고 감정이 극대화된 순간만큼은 비운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특별함을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짝사랑러버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이루어지기 위해서 사랑을 시작했으나 이루어지면 안 되는 모순을 간직하고 있다.
진정한 짝사랑 러버는 모순적인 특별한 감정을 느끼기 위해 애초에 '내'가 사랑받지 못해야만 사랑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짝사랑의 대상이 자신을 좋아하게 되면 '이 사랑은 가짜야', '내 사랑이 진짜야'등의 방어벽을 세워 부정부터 한다. 이는 짝사랑 러버로써 느끼던 모순된 특별함보다 모순되지 않은 특별함의 크기가 더 큰지 작은지 가늠하는 것이다. 그렇게 연인이 되는 방향성을 포기하고 짝사랑을 선택한다면 연인이 됨으로써 느끼게 될 특별함보다 짝사랑으로 느끼는 특별함이 더 크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느끼는 특별함은 특이하게도 '내'가 짝사랑을 끝내지 않는 이상 계속해서 느낄 수 있는 특별함으로 마음만 무거울 뿐 실로 안정적이다. 이는 사랑의 시작이 '내'가 특별함을 느끼기 위해 하는 것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자신이 원해서 진정한 짝사랑 러버를 선택하는 것은 옳은 일이지만 대개의 짝사랑 러버는 방어기제에 해당하기에 원치 않는 짝사랑으로 고통이 유지되거나 반복하려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마음을 갉아먹지 않는 선택을 해야 한다. '내'가 느끼는 특별함에 모순이 있다면 '내'가 원하는 특별함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버리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서로가 서로를 특별하게 여기고 있음에도 서로가 느끼는 특별함에 확신이 없어서 서로를 짝사랑으로 남겨두는 경우가 있다. 이는 관계를 지속만 하기에는 짝사랑의 고통이 동반되고, 먼저 나서서 관계를 발전시키기기에는 '내'가 느낄 특별함이 상실되는 것으로 고통, 상실을 감수하면서까지 느끼고 싶은 특별함으로 인식하지 못하거나 짝사랑의 특별함에 더 가치를 두는 것이다. 이는 사랑의 우선순위가 대상을 특별하게 여기기 전에 '내'가 특별함을 느끼기 위해 하는 것이어서 가능하다.
서로에게 마음이 있는 게 확실하기에 누군가 물꼬를 트면 간단히 해결이 될 것 같지만 당사장에게는 말처럼 쉽지만은 상황이다. 그래서 이러한 상황이 짝사랑으로 끝맺음이 되고 난 후에는 타이밍이 안 좋았다고 표현되기도 한다. 그리고 어려서 잘 몰랐다, 미숙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사람의 연애성향에 따라 종종 볼 수 있는 유형이다.
연인이 되기 위한 과정과 무관한 짝사랑 유형들의 공통분모는 짝사랑을 놓지 못해서, 놓지 않아서 특이한 방식으로 특별함을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원치 않는 짝사랑을 하는 중이라면 특별함이라는 강박에서 벗어나 '내'가 사랑으로 인해 특별해지기도 하고, 특별해지지 않기도 하는 것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지 않고 '내'가 사랑 앞에서 특별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강박에서 벗어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끊임없이 자신을 속여야만 할 것이다. 그렇게 '내가 나를' 속이다 보면 원래 원하던 특별함과는 거리가 먼 특이한 방식의 특별함으로 대체해 특별함을 유지시키려 할 것이다. 그럼에도 잘못된 사랑은 없기에 강박적인 짝사랑을 원한다면 그건 그저 개인의 선택이 된다.
이 의문에 대해선 앞서 이야기했으나 행복하기 위해 사랑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행복하지 않은 사랑을 하는 사람이 여전히 의문일 것이기에 추가적인 고찰을 하겠다.
행복을 추구하는 사랑은 사랑의 3요소 중 정신적 충족에 해당하며 사람에 따라 정신적 충족이 사랑의 요소에서 중요하지 않거나 중요하더라도 대체되어 충족될 수 있다. 고로 행복이 없어도 사랑의 기본전제인 특별함은 유지가 된다. 이는 사랑이 행복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닌 특별함을 느끼기 위해 하는 것이고 만약 행복하기 위해서 사랑한다고 여긴다면 행복한 것을 특별하게 여기기 때문이라는 것으로 정리된다.
사회의 의미부여가 사랑은 행복하기 위해서 하는 거라고 정의하기에 행복하지 않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에 대해 의문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사랑에 행복이 따라갈 수 있는 것이지 행복하기 위해서 사랑하는 것은 옳지 않다. 기본전제인 본질적 사랑은 '내'가 특별함을 느끼고자 하는 것이기에 행복하지 않아도 '내'가 특별하게 여기는 부분의 여지가 남아있다면 연인관계는 유지된다. 이는 제삼자의 입장에서 헤어져야 한다고 보는 관계여도 법적으로 제재를 가해야 할 경우만 아니라면 그 관계가 유지되는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고 결과적으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헤어지는 것보다 더 특별하기 때문이다. 행복하지 않은 관계가 유지되는 것은 그것이 자신이 선택한 사랑이기에 문제 삼을 필요가 없다. 다만 그렇기에 더더욱 정말로 원하는 선택인지는 생각해봐야 한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좋은 쪽으로만 향해야 한다는 생각에 행복이 필수요소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행복으로 갔을 때의 사랑은 행복이 있는 사랑인 것이지 좋다, 안 좋다는 사람마다 다르다. 행복이 없으면 안 좋은 사랑이 아닌 행복이 없는 사랑인 것이다. 행복이 있든 없든 사랑의 방향성은 특별함을 향하기에 행복이 있음에도 안 좋은 사랑이 있고 행복이 없음에도 좋은 사랑이 있다.
과거에는 당연하거나 좋다고 생각했던 사랑이 지금에 와서는 안 좋다고 정의되는 것처럼 사랑은 사회의 의미부여의 영향을 받아 '내가 특별함을 느끼기 위한 사랑'이 아닌 '나보다 상대를 더 특별하게 여기는 사랑'만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의 방향성에 따라 '내'가 특별해지기 위해 무언가를 소유한다는 개념으로 사랑자체를 남성만이 소유할 수 있을 때도 있었다. 그때의 사랑을 맞다 틀리다가 아닌 사랑의 유형중 하나로, 그 당시의 사회가 추구하는 사랑이 지금과 다를 뿐이었다고 생각해 보자. 그리고 이를 토대로 사랑을 소유하고 싶은 사람과 소유되고 싶은 사람이 만난다면 그 사랑을 부정하기란 쉽지가 않다. 그리고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지던 사회에서는 부정할 필요가 없다.
상대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으로 돌아섰음에도 상대를 특별하게 여긴다면 행복을 떠나 사랑은 유지된다. A가 일방적으로 특이한 사랑을 하고 B는 그 특이한 사랑을 힘들게 여겨서 관계에 대해 부정적이고 행복하지가 않다. 이때 A가 일방적으로 자신의 특이한 사랑이 특별하다고 강요하더라도 B가 특별함을 느낄 수 있는 다른 욕구로 대체되어 충족되면 관계가, 사랑이 유지된다.
제삼자의 입장에서는 둘의 관계가 헤어져야 할 상황으로 보이지만 당사자에게는 행복이 아닌 특별함을 위해서 헤어질 수 없는 것이다. 법적으로 제재를 가해야 할 상황에 쳐해 지더라도 B가 그 상황을 특별한 사랑으로 여긴다면 둘은 사랑하는 관계이다. 이는 당사자가 당장의 특별함만 찾으려 할 뿐 쳐해 진 상황보다 더 특별한 사랑이, 대상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특이한 사랑을 유지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이는 마치 '나'를 속이며 원치 않던 특별함을 얻기 위해 짝사랑을 하는 것과 유사하다. 그러니 정말로 '내'가 원하는 사랑이 맞는지 알아보기 위한 노력과 '내'가 느끼는 특별함에 모순이 있다면 '내'가 원하는 특별함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버리는 것이 아닌 쟁취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사랑은 연인, 가족, 집단의 관계를 넘어 동물, 사물등 그리고 스스로를 사랑하는 사람까지 통틀어 '내'가 사랑하는 무언가가 많으면 많을수록 대체할 수 있는 특별함이 많아지고 '내'가 노력한 만큼 특별함을 느낄 수 있는 환경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해 '나'를 먼저 사랑하라는 말에는 동의할 수가 없다. 사랑은 '나'를 특별하게도, 특별하지 않게도 만드는 것인데 무조건적으로 '나'를 특별하게 여기라는 것은 짝사랑에서의 강박처럼 좋지만은 않다는 거다.
'내'가 특별함을 느끼는 것은 개인의 특별함과 사랑의 특별함을 분리해서 6가지 요소 중 욕구를 충족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나를 먼저 사랑하라'는 말은 개인의 특별함을 충족하자는 것인지, 사랑의 특별함을 충족하라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어느 쪽이든 '나'에게 필요한 요소를 충족해야지 무작정 "나를 먼저 사랑하라"라고 하면 개인, 사랑의 특별함도 분리하지 않은 채 사랑만을 외치며 개인, 사랑의 특별함을 동일시 여기게 된다. 그 말을 따른 사람들은 착실히 잘 수행해도 시작점 자체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시작해서 동일시된 '나'먼저 사랑하기에 실패하게 되면 새로운 상실감만 생긴다. 애초에 '나'를 사랑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면 굳이 받을 필요가 없던 정신적 고통을 누군가의 '자신만의 정답'에 휩쓸려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자신을 사랑하며 특별함을 채우고 있는 사람을 부정하는 것이 아닌 사람마다 특별함에서 채우고자 하는 요소가 다르다는 것이다. '나'를 사랑하라는 주장은 개인의 특별함을 먼저 충족하라는 얘기이고 개인의 특별함을 충족한 사람이 더 매력적일 테니 타인에게 특별하게 느껴질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을 원하지 않는다면 사랑이 없어도 개인의 특별함으로 살아도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고로 '나'를 먼저 사랑하라는 말은 '나'의 특별함을 타인에게 기대지 말라는 말에 가깝다. 그렇다는 것은 반대로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타인에 의해 특별해질 수 있으며 그러한 형태로도 충분히 제대로 된 사랑을 할 수 있다는 반증이 된다. 그리고 개인의 특별함을 무시한 채 사랑의 특별함만을 충족하다 보면 '나'의 특별함의 권한을 모두 타인에게 넘겨줘버리게 되니 그것은 분명히 조심해야 한다.
사랑의 특별함으로 강조되는 것은 정신적 충족이든 물질적 충족이든 육체적 충족이든 간에 '내'가 원하는 요소의 특별함을 채우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특별한 대상을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특별하게 여기는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며 사랑은 '내'가 특별함을 느끼기 위해서 한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서로 사랑하지만 정작 사랑을 받은 사람이 없는 상황, 사랑은 받았는데 정작 '내'가 느끼는 사랑은 없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사랑하는 순간 당신은 이미 특별한 존재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니 사랑하라, 다만 적어도 당신이 원하는 사랑이 무엇인지는 알고서 사랑하라.
당신은 어떠한 특별함을 충족하고 싶은가?
당신은 원하는 사랑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