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필 Oct 07. 2024

삶, 살아있음

사회의 살아있음

삶이란 무엇인가?

사람은 왜 사는지, '나'는 왜 사는지에 대해 궁금증을 가져본 적이 있는가? 다양한 사람들이 이에 대한 답으로 삶의 의미, 이유, 목적 등 자신이 살아온, 바라본 삶에 대한 고찰을 토대로 각자가 선택한 답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내'가 선택한 정답은 무엇인가?


개똥철학 선택 편은 직접적으로 정답을 알려주지는 않지만 이 물음을 하기 위해 쓰였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래서 그저 '나'의 선택을 바라고 '나'의 선택이 정답이라고 말하고 독자가 스스로 정답을 선택하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내'가 선택하는 정답에는 제한이 없고 각자가 선택한 정답이 있을 뿐으로 아무런 선택을 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정답이 된다. 그래서 물음에 대한 고민은 어렵게 접근할 필요는 없다. 


사람은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살아간다

글쓴이는 사람은 왜 사는지, '나'는 왜 사는지에 대한 답을 '사람은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살아간다'라고 생각한다. 살아있으면서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살아간다는 이 오묘하면서 단순한 말은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궁금증이 생긴 지 20년도 더 지나서 도달한 나의 답일 뿐 모두의 답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이 답에 도달하는 글쓴이의 글을 읽으면 당신이 정해놓은 답이 있든, 없든 앞으로의 답을 정하는 데 있어서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답을 찾기 위한 물음으로 바꿔서 다시 시작해보려 한다.


-'나'는 살아있음을 느낀 적이 있는가?


이 물음은 사실 고민할만한 물음이 아니다. 글을 접하고 있는 지금도 살아있음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듯 살아있음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망각하고 있다. 이런 자연스러운 망각으로 인해 '사람은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살아간다'라는 것을 '생존을 위한 삶', '살아있음을 느끼기 원해서 사는 삶'으로 인지하거나 느끼기 마련이다. 그래서 기본토대가 되는 '사람은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살아간다'라는 대전제는 사고를 하지 않는 이상 모순으로 느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생존을 위한 삶', '살아있음을 느끼기 원해서 사는 삶'에 대해 알아봄을 시작으로 모순으로 느껴지는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을 인지하고 이를 토대로 '나'의 살아있음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생존을 위한 삶, 살아있음을 느끼기 원해서 사는 삶 

'생존을 위한 삶', '살아있음을 느끼기 원해서 사는 삶'은 살아있음을 느끼는, 숨 쉬듯 자연스러운 현상을 본능과 욕구로 구분 지어준다. 이는 본능, 욕구, 이익의 관점이 공존하듯이 오로지 본능만, 오로지 욕구만 있다는 말이 아닌 어떤 부분에 더 많이 치우쳐져 있는가에 대한 방향성의 구분이다. 그리고 이 나눠진 방향성덕에 본능으로 살아가면서 욕구에 치우친 행동 했을 때, 욕구로 살아가면서 본능에 치우친 행동을 했을 때 느껴지는 모순을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살아간다'는 자연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다.


모순으로 느껴지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자연현상과 망각과 공존을 짚고 넘어가자면 뇌의 기억창고는 기억하고 있는 것들을 항상 들어내고 있지 않고 필요한 순간 꺼내서 사용한다. 이를 다르게 해석하면 지금 꺼내 쓰는 기억을 제외하면 나머지 기억들은 일시적 망각상태가 되는 것이다. 고로 기억과 지속된 일시적 망각상태의 공존이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살아가는 자연현상을 망각하게 만들어 '살아있음을 느끼지 않는다'는 모순을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모순으로 느껴지는 살아있음이 아닌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생존을 위한 삶, 살아있음을 느끼기 원해서 사는 삶은 무엇일까?


생존을 위한 삶 -살아남기 위한 삶

생존을 위한 삶은 본능이다. 이는 음식을 먹더라도 맛을 느끼기보단 살기 위해 먹는 삶이라고 볼 수 있고 본능에 치우친 삶을 사는 사람이 맛을 느끼기 위해 음식을 먹는 모순은 본능과 욕구가 공존하기에 가능하다. 그리고 생존을 위한 삶을 사는 사람은 삶을 느낄 겨를 없이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 태어난 김에 사는 사람등 생존이 삶의 목적인 것으로 삶을 느끼는 것보다 죽지 않고 살아 숨 쉬는 것이 우선시된다. 이를 삶에 의미가 없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는데 삶에 의미가 없는 것은 생존의 안정성은 있으나 삶에 의미가 없어서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지 않은 단계에 도달하는 것이고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아남기 위한 삶'을 사는 사람은 삶 자체, 존재하는 것 자체가 삶의 이유가 되기에 생존자체가 삶의 의미가 된다. 다르게 말하면 극단적으로 생존이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생존 자체가 삶의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생존이 보장된 태어난 김에 사는 사람을 '삶에 의미가 없다'라고 볼 수도 없는 것이 욕구가 아닌 본능에 치우친 자연현상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살아가는 중이라면 삶에 의미를 정하지 않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살아있음을 느끼기 원해서 사는 삶

살아있음을 느끼기 원해서 사는 삶은 욕구이다. 이를 생존을 위한 삶의 본능과 구분 짓자면 먹는 걸 참을 때 본능은 살기 위해 먹는 것을 억제하는 반면 욕구는 선택적 욕구충족을 위해 참는 것이다. 본능의 방향성은 언제나 유전자 전달, 세포의 전달로 구성된 타고난 생존방식에 도달하고 욕구의 방향성은 언제나 자연적으로 생성된 욕구, '내'가 생성한 욕구를 충족하기 위함에 도달한다. 이는 본능은 억제하든 억제하지 못하든 생존방식이 되고 욕구는 참든 참지 못하든 지적능력의 발달로 형성된 삶의 방향성이 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살아있음을 느끼기 원해서 사는 삶을 다르게 표현하면 욕구충족의 삶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욕구를 생성함으로써 결핍이 생기고 다시 욕구를 충족하는 삶으로 삶의 목표, 목적을 생성함으로써 삶의 의미, 삶을 탐구하는 과정을 만든 삶이다. 결국 평생 지속되는 결핍과 충족이 아닌 끝이 있는 삶의 의미를 생성했을 때는 욕구가 충족됨과 함께 공허함이 생긴다. 욕구충족의 삶을 사는 사람이 이러한 공허함을 경험하게 되면 대부분 같은 방식으로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새로운 욕구를 생성하고 충족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이러한 경험을 토대로 살아있음을 느끼기 원해서 사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생존을 위한 삶보다 살아있음을 느끼기 원해서 사는 삶이 이상의 가치를 의미한다고 표현한다.


생존을 위한 삶, 살아있음을 느끼기 원해서 사는 삶

생존을 위한 삶, 살아있음을 느끼기 원해서 사는 삶은 이렇게 본능과 욕구로 구분 지어짐에도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살아가는 대전제에 속한다. 그리고 생존을 위한 삶, 살아있음을 느끼기 원해서 사는 삶을 더 많이 인지하고 있을 뿐 우리가 더 많이 지속하며 느끼고 있는 삶은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살아감이다. 너무나 익숙해서 망각하고 있는 살아있음을 느낀다는 것은 다시 잊어버릴 기억을 부여잡는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살면서 익숙한 살아있음을 한 번쯤 느끼거나 인지해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우리의 삶은 이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익숙한 살아있음- 자연현상

숨을 쉬는 것을 인지하기 전까지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일시적으로 망각하는 것처럼 살아있음의 느낌 또한 인지하기 전까지 일시적으로 망각한 상태로 살고 있다. 그래서 살아있음을 느끼려면 글을 읽는 것부터 책을 읽고, 밥을 먹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핸드폰을 보거나, 컴퓨터를 보거나, 일을 하거나 쉬거나, 잠에 들거나 깨어나는 것까지 살아있음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기만 하면 된다. 생존을 위한 삶, 살아있음을 느끼기 원해서 사는 삶은 그저 살아있음을 그나마 더 인지하고 있는 부분일 뿐 모든 삶은 자연현상이고 삶의 연장선상은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살아감이다.


생존의 개념인 '살아있다'가 단순한 생사여부라면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은 생사의 과정을 인지하고 느끼고 있다고 구분 지을 수 있다. 이 살아있음을 느끼는 과정은 일상의 삶부터 삶에 대한 인지를 극대화시키는 명상, 새로운 자극이나 쾌락등으로 다양하며 이를 포괄적으로 정리하면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은 자극과 반응으로 정리된다. 그리고 자극과 반응으로 정리되는 익숙한 살아있음에서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으로 반영된다. 이는 대화와 소통에서 시작되어 탄생하는 무수히 많은 이야기 그리고 이야기에서 다시 한번 쏟아져 나오는 대화와 소통의 연결고리까지 '나'의 비슷한 익숙한 일상부터 '나'와는 다른 삶의 이야기까지 사람들이 사는 다양한 이야기는 외부에서 전달하는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자극의 수단이다. 이 자극의 수단에서 발전된 연극이나 영화, 드라마, 만화부터 다양함 플랫폼들이 쏟아내는 각종 이야기는 다시 한번 '내'가 느끼고 싶은 자극에 따라 잔잔한 일상의 자극, 전개 중심의 자극, 개연성이 없는 쾌락 중심의 자극등으로 선호하는 자극이 나눠진다. 이를 토대로 살아있음을 느끼는 수단을 조금만 더 알아보자면 이러하다.


-경험적 살아있음, 비경험적 살아있음

경험적 살아있음은 실제 경험을 통해 즉각적으로 전달되는 자극을 느끼는 것이다. 반면 비경험적 살아있음은 실제 경험하지 않은 것을 통해 자극을 느끼는 것으로 목표를 설정하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 느끼는 자극, 실제로 일어나지 않을 일을 상상, 망상, 생각을 통해 느끼는 자극이다.


-고통/ 선택한 자극, 비선택 자극

마조히즘, 사디즘이 있는 것처럼 고통을 받는 것도 고통을 주는 것도 때로는 살아있음을 느끼는 수단이 된다. 그래서 고통은 선택적 고통과 비선택적 고통으로 나눠지는데 선택적 고통은 '내'가 선택했다면 어떤 자극도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수단이 되는 반면 비선택적 고통은 '나'에게 새로운 자극과 살아있음을 주기도 하고 '내'가 원치 않고 선택하지 않은 자극을 강제로 받는 것은 살아있음을 앗아가는 고통이 된다. 여기서 선택한 자극, 비선택 자극이 시사하는 바는 굉장히 크다. 간단한 예시로 몸에 같은 고통이 가해졌더라도 누군가는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이고 누군가는 원치 않는 고통을 받는 것이 된다. 이를 관계를 통한 살아있음으로 접근하면 '내'가 느끼고 싶거나 느껴야 한다고 여기던 살아있음을 타인이 앗아갔을 때, '내'가 느끼고 싶지 않은 살아있음을 타인이 주었을 때 '나'는 다른 수단의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한 저항을 하거나 살아있음을 느끼기를 포기하게 된다.


살아있음을 느끼는 수단은 이쯤 알아보고 다시 익숙한 살아있음으로 돌아와 자극을 현대의 관점으로 이야기해 보자. 살아있음을 느끼는 자극을 현대에 맞춰 조금 더 나눠보자면 일상의 살아있음, 자극, 쾌락으로 구분지 어야만 한다. 사람에게 생존의 안정성이 보편화되고 삶의 질이 올라감에 따라 자극과 쾌락을 너무 쉽게 느끼는 사회가 되었다. 그래서 일상의 살아있음의 자극은 무미건조하거나 공허하게 느껴지고 자칫 잘못하면 불편하게까지 느껴진다. 이는 과도한 자극과 쾌락을 쉽게 느낄 수 있음에 따라 충분히 일상의 살아있음을 느끼고 있음에도 살아있음이 결여됐다고 느끼는 것이다. 이렇게 생긴 살아있음을 느끼는 자극의 인지부조화는 스스로 느끼고 싶은 자극이 무엇인지 가늠하기 힘들어지는 상태에 다다르게 된다. 이를 통해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대개는 쉽게 쾌락을 얻으면 얻을수록 일상의 자극은 무뎌지기 마련이고 커다란 쾌락을 반복적으로 얻다 보면 더 큰 쾌락만을 원하게 된다.


쾌락으로 물들어 일상에서 느끼는 자극이 무뎌지고 나면 '내'가 자연현상을 기반으로 정말로 원하고 바라는 살아있음을 느끼는 온전한 시간보다 원하지 않고 바라지도 않지만 오로지 극단적 자극, 쾌락만을 바라며 살아있음을 충족하려 하고 원치 않는 극단적 자극, 쾌락의 시간이 끝나면 정말로 원하고 바라는 살아있음은 충족되지 않았기에 역으로 공허함에 빠져들 것이다. 이는 대부분의 중독현상과 연결되며 살아있음을 느끼는 관점으로 보면 포괄적으로 자극중독자라고 본다. 


이미 사회가 손쉽게 쾌락을 얻을 수 있는 환경에 노출되어 있기에 사회의 흐름에 따라 극단적 자극과 쾌락을 거부하기란 힘들 것이다. 그럼에도 '나'에게 침투된 쾌락은 조절해야 하며 환경에 노출되어 거부하기 힘든 것이지 '내'가 스스로 어떤 자극을 느끼며 살 것인지는 선택사항이다. 그래서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익숙한 살아있음에 적응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쾌락만을 추구하다 삶이 피폐해진 사례만을 가지고 쾌락만을 추구하는 삶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 외의 사례도 있기에 '내'가 쾌락만을 추구하며 사는 것이 만족스럽고 그것이 '내'가 선택한 정답이라면 그렇게 살아도 된다. 다만 익숙한 살아있음을 느끼며 사는 것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그것을 경험한 뒤에 '내'가 느끼고 싶은 살아있음이 무엇인지를 선택해도 늦지 않을 거라는 거다.


'나'의 살아있음

'내'가 어떤 살아있음을 느껴왔는지는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내'가 선택한 것이다. 이를 인지하지 못했다면 '내'가 느낀 살아있음은 선택이 아닌 어쩔 수 없는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를 인지한 이후라면 '내'가 느끼는 살아있음이 '나'의 선택이라는 전제가 깔리고 그렇게 현재부터 미래를 향하는 '나'를 바라보면 앞으로 '내'가 느끼고 싶은 살아있음은 '나'의 선택으로 결정될 것이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느끼고 싶은 살아있음은 실로 방대하다. 그리고 이 방대함은 범위가 넓은 것이지 '내'가 느끼는 살아있음은 거창한 것이 아니어도 되고 거창할 필요도 없다. 다만 거창한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은 사람이 있기에 '내'가 느끼고 싶은 살아있음이 거창한 것인지, 그것을 선택하고 싶은지를 고려해야 한다. 이렇듯 모든 일에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한 것도 선택이며 모든 일에 살아있음을 느끼지 않고 익숙하게 여기며 잊어버리고 사는 선택이라서 어떤 선택을 해도 상관이 없다. 그런데 언젠가 삶이 무엇인지 궁금해질 날이 온다면 지금의 기억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길 바란다.


-'내'가 살아있음을 가장 많이 느꼈던 순간은 언제인가?


삶의 의미는 살아있음이며 살아있음을 가장 많이 느꼈던 순간이 삶의 의미가 될 수도 있다. 스스로 그 순간을 '나'의 삶의 의미라고 의미부여를 하고 그 순간을 다시 느끼기 위해 살아가거나 그 기억을 간직한 채로 살아가면 그 의미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많이 느꼈던 순간이 아니더라도 익숙함 중에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 주었던 순간이 있다면 그 기억이 무엇이든 간에 그 기억을 간직한 채로 사는 것은 삶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 순간은 비경험적이어도 되고 그것이 목표를 위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느끼는 살아있음 이어도 된다. 사람은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사는 것이지 살아있음을 가장 많이 느꼈던 순간을 위해 사는 것은 선택사항이라서 느끼고 싶은 살아있음이 비경험적인 살아있음인 사람도 당연히 있을 수가 있다.


이렇게 '내'가 선택하는 살아있음이기에 삶의 의미가 무너져 내리는 것은 정말로 조심해야 한다. 가지고 있던 살아있음에 대한 의미부여가 무너져내리는 것은 대개가 '내'가 느끼고 싶은 살아있음이 제대로 조율이 되지 않았을 때이다. 이때 조율이 되지 않는다고 스스로의 고민의 깊이보다 타인이 고민에 깊게 침투하게 내버려 둔다면 '내'가 원하지 않는 타인의 선택에 휩쓸리게 된다. '내'가 살아있음을 가장 많이 느꼈던 순간, '내'가 느끼고 싶은 살아있음을 가장 잘 아는 것은 '나'이다. 이것을 같이 고민해 줄 사람이 있다면 좋겠지만 대개의 사람은 '내'가 아닌 자신이 느끼고 싶은 살아있음을 토대로 고민을 들어준다. 그래서 무턱대고 타인이 침투되는 것이 습관으로 자리 잡게 되는 것은 정말 무서운 일이다. 


조율이 어려워 삶이 무너져 내린 후에는 삶 자체가 힘들고 지치고 공허하고 분노하고 우울하고 그 외 다양한 감정과 사고가 자리 잡게 된다. 정도에 따라서 '내'가 느끼고 싶은 살아있음에 다시 집중하고 몰입하면 해결되기도 한다. 그렇게 가볍게 해결될 정도로 무너져 내리면 다행이지만 정도가 무겁다면 일상의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부터 차근차근 채워나가는 것이 좋다. 물론 방법이야 개인차에 따라 다르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삶의 기반을 다져줄 기초공사와 같은 일상의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 하고 이를 토대로 '내'가 느끼고 싶은 살아있음을 추구해야 한다. 앞서 익숙한 살아있음보다 쾌락의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은 사람일지라도 일상의 살아있음을 느껴보고 느끼고 싶은 살아있음을 선택하라고 한 것은 삶의 의미가 쾌락으로 가득 차 있을 때 일상의 살아있음을 느껴보지 않은 채로 삶이 무너져 내리면 그만큼 삶을 다시 부여잡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선택할 수 있는 일상에서 느끼고 싶은 살아있음은 실로 다양하며 살아있음을 가장 많이 느낄 때가 산책할 때여도 좋고, 잠을 잘 때여도 좋고, 사람을 만날 때여도 좋고, 혼자 있을 때여도 좋고 뭐든 상관이 없다. 상관이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선택이 언제 바뀌어도 상관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선택하고 살아있음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양한 살아있음을 경험하면서 '내'가 느끼고 싶은 살아있음의 우선순위를 알아가는 것도 도움이 된다.


혹여나 선택한 삶에 만족하지 못하거나, 선택한 삶을 이뤄내지 못하거나, 선택한 삶이 맞지 않을까 봐 두렵거나, 걱정돼서 느끼고 싶은 살아있음을 선택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럴 때는 선택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 또한 하나의 선택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내'가 느끼고 싶은 살아있음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바로 '나'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느끼고 싶은 삶을 선택하는 것과 선택하지 않는 선택을 하는 것을 구분 짓고서 느끼고 싶은 삶을 선택해야 한다. '나'의 살아있음에서 꼭 기억해야 할 것은 '나'는 앞으로 어떤 살아있음을 느끼며 살아가고 싶은가?이다.


아름답지만은 않은 살아있음

사람은 생과사를 이야기하면 결국 아무 의미가 없는 것에 도달하게 되지만 우리는 생과사의 과정에 있기에 의미가 존재하고 살아있음을 느낀다는 것은 과정을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살아있음을 느낀다는 것은 때로는 아름답지만은 않고 다소 어두운 부분도 존재한다. 이 아름답지 않은 살아있음은 인류의 끝까지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을 수도 있으나 개선의 여지가 필요하며 충분히 개선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느끼고 싶지 않은 살아있음을 강제로 느꼈을 때

느끼고 싶지 않은 살아있음을 강제로 느꼈을 때는 비선택적 고통, 혐오적 차별, 타인이 '나'의 삶을 앗아가는 상황 등 육체적 타격이 없더라도 정신적으로 굉장히 커다란 고통을 받는다. 똑같이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이 아닌 거 같은, 혼자 동떨어진 느낌을 받거나 사회에 속해 있음에도 속하지 못한 듯 겉도는 느낌을 받는다. 


강제적인 자극이 지속되면 자기 혐오감에 빠지거나 대척점의 사람, 사회를 적으로 돌려 살아있음을 느끼려 한다. 오히려 생존이 보장되어있지 않은 상황이라면 생존을 위해 살아가는 삶에 수긍하기도 하며 그에 따른 안정감을 느낄 수도 있으나 생존이 보장되어 있을 때는 자기 혐오감과 적대감이 더 도드라져 삶에 반항하고 정신적으로 피폐해진다. 그렇게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사람이 나약하다기보다는 그러한 상황에서도 온전히 살 수 있는 사람이 강인 한 것이며 자신이 느끼고 싶지 않은 자극에 반복적으로 노출되었을 때 일어나는 현상을 비단 당사자의 잘못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부당한 차별을 받던 사람이 부당한 차별이 사라지고 정당한 차별만 남았음에도 정작 '내'가 느끼고 싶은 살아있음을 느끼지 못할 때, 느끼고 싶은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역차별로 권리를 주장해 삶에 반항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렇게 역차별로 권리를 주장하게 되는 것은 차별의 문제가 아닌 '내'가 원하는 살아있음을 느끼지 못했음에 대한 반항이며 지속된 부당한차별로 생긴 살아있음을 느끼는 수단을 정당한 차별의 상황에서도 지속하는 것이다. 대체로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는 수단에 대해 간섭, 관여, 방해를 받으면 거부반응이 일어난다. 거부반응으로는 폭력성이 없던 사람도 공격적, 폭력적으로 변하기도 하고 술을 마시지 않던 사람이 정신을 놓을 정도로 술을 마시기도 하고 멀쩡하던 사람이 공황, 불안을 겪기도 하는 등 범죄를 저지르지 않더라도 자신이든 타인이든 타락의 방향성을 가지게 된다. 이 과정 또한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한 저항으로 볼 수 있고 타락의 방향성으로 가지 않기 위해선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다른 수단을 미리 갖추고 있거나 타락이 아닌 다른 방향성의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새로운 수단이 필요하다. 그래서 이를 역차별로 치부하기보다는 사회가 나서서 '내'가 느끼고 싶은 살아있음을 찾을 수 있는 수단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살아있음을 느끼지 못할 때

살아있음을 느끼지 못할 때는 사람이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방증이다. 뇌사의 경우 생명유지는 가능하나 살아있음을 느끼지 못하고 사망판정에 이른다. 사망판정의 경계에 있는 식물인간의 경우에도 살아있음에도 살아있음을 느끼지 못한다. 이를 느끼고 싶지 않은 살아있음을 느꼈을 때와 연결 지어 생각해 보면 생존본능은 있으나 생존함에 따라 극심한 고통이 지속되는 사람에게 안락사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일은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어렵다는 것에 도달한다. 이때 존중할 수 있는 것은 살아있음의 고통이 한계를 넘어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지 않을 때의 선택이다. 이 선택에 대한 존중에도 따져봐야 할 것은 많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죽을 만큼 힘들어서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지 않은지와 현재 처해진 죽을 만큼 힘든 상황이 배제했을 때도 과연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을지의 가정이다. 이 가정을 미리 해놓고 충동이 제외된 상태에서 미리 고통의 상황에서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선택에 대해 서명해 놓았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이 또한 고통이 쳐해 진 상황에서는 판단하기가 어렵다. 충동에 의해 죽음을 찾는 것은 일시적이며 불가능해 보이던 고통이 사라진다면 살아있음에 감사할 것이다. 이 어려운 선택에서 고려해야 할 것은 오히려 고통에서 벗어난 후에는 온전한 살아있음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는가?이며 사람의 목숨에 값어치를 매겨서는 안 되지만 살아가는 데 있어서 현실적으로 경제적 여건이 되는가, 느끼고 싶은 살아있음을 느끼며 살 수 있는가, 원하는 살아있음을 찾을 수 있는가를 물어보아야 한다. 다만 이 모든 과정을 선택할 수 없는 것이 생존한 상태로 살아있음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선택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비단 선택할 수 없는 상태에 처해진 사람이 아닐지라도 살아있음에 대한 인지를 차단하고 느끼지 못할 때는 고통이 있든 없든 삶을 느끼고 싶지 않은 상태이며 살아있음에도 삶을 포기한 상태이다. 그렇게 물리적으로 살아있음에도 살아있음을 느끼지 못하는 산송장,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사람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며 물리적 죽음만을 기다리게 된다. 그럼에도 간혹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나는데 진심 어린 말 한마디, 역경에서 자라나는 꽃 한 송이, 생명의 탄생, 강하게 생명을 갈구하는 에너지, '내'가 누군가의 생명에 필수불가결한 존재가 되는 등 다시금 살아있음을 느끼게 된다면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살아간다. 그런 기회만 온다면 고통이 사라졌을 때의 반응과 같이 살아있음에 감사할 것이다. 이는 '나'의 의지로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일상의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에 대한 방증이다.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지 않을 때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지 않을 때는 의미부여가 된 죽음과 궤를 같이하는 오해를 사기도 한다. 그러나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지 않을 때는 의미부여가 된 할복, 투신자살, 모방자살,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한 저항반응으로 충동적 자살에 이르는 것과 다르다. 명예를 건 결투처럼 죽음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닌 의미가 없어서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당사자의 입장이 아닌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면 다소 극단적이거나 충동적으로 볼 수 있지만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지 않을 때는 충동적이지 않고 서서히 살아있음이 완벽히 차단된 상태에 도달되었을 때를 자살, 죽음으로 생각하고 있기에 때에 다다라서 죽는 것이다. 이 안타까운 죽음을 함부로 이야기하거나 개인의 자살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아니다. 자살하게 되는 것은 개인의 영향보다 사회적인 영향을 더 많이 받기에 죽음과 자살의 궤를 달리해서 소통해 나가며 사회전체가 개선을 해나가야 한다. 서서히 자살로 도달하는 과정이 있다는 것은 충동적이지 않다는 것이기에 개인보다도 사회의 노력에 따라 예방이 가능하다는 것이 전제가 된다.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지 않음에 서서히 도달하지 않고 충동적인 죽음을 선택하는 경우라면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다. 살고 싶은 마음과 죽고 싶은 마음이 공존하는 것은 죽을 만큼 고통스럽고 힘든 상황인 것이며 거기서 죽음을 고민한다는 것은 그만큼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은 욕구가 강하다는 반증이다. 살아있음을 격하게 느끼고 싶은 마음에 죽음을 선택하는 모순은 마치 언제나 살아있음을 느끼고 있음에도 살아있음을 망각하는 모순과도 유사하다. 그러니 죽을 만큼 힘든 마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나 자신'과 사회와 소통해야 한다. 삶의 의미에는 각자의 정답이 있는 것처럼 사회의 정답이 있는 것이지 사회는 정답이 아니기에 무엇이 힘든지 소통하지 않고, 저항하지 않고, 반항하지 않으면 '나 자신'도 사회도 모를 수가 있다. 언제나 죽음을 고민하다가 일상의 살아있음을 느끼게 되었을 때 살아있음이 얼마나 감사한지를 기억해두어야 하며 이때는 자살에 대한 고민이 아닌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한 고민이 더 어울릴 것이다. 살아있음이 익숙해진 만큼 살아있는 것이 당연하더라도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지가 않다.


자극/윤리

고통이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은 선태적 자극, 비선택적 자극에서 말했듯이 시사하는 바가 굉장히 크기에 혼동해서는 안된다. (여기서 사용하는 윤리라는 표현은 윤리에 국한되지 않고 '내'가 생각하는 세상에서 가장 바른 가치관, 정의로움을 상징하는 표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여기서 혼동하면 안 되는 것은 윤리적 자극과 비윤리적 자극이며 윤리적인 것과 비윤리적인 것을 확실하게 구분 지어야 한다는 거다. 이를 확실히 구분 짓지 않고 윤리를 배제한 상태로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하면 모든 행동은 정당해진다. 


윤리가 배제된 정당한 행동의 예)

학교폭력을 행하는 학생에게 왜 폭력을 저질렀냐는 물음에 학생은 "아무 이유가 없다"라고 답할 수가 있다. 여기서 실제로 별다른 이유 없이 단지 폭력을 통해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었고 그래서 폭력을 행했을 뿐일 수 있다. 그렇게 반복적으로 일정한 폭력이 익숙해지면 살아있음을 느끼지 못하게 되고 더 큰 자극을 받기 위해서 폭력의 수위는 점점 더 강해진다. 살아있음의 관점에서 이 행동은 정당하다. 단지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었을 뿐이다. 비단 폭력뿐 아니라 약탈, 방화, 테러, 살인, 강간을 저지르는 사람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 행하게 된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있으나 포괄적으로 보면 별다른 이유 없이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한 것으로 정리된다.


윤리의식이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비윤리적 행동이 잘못이라고 여기는 것이 당연한 만큼 비윤리적인 사람의 입장에서는 윤리의식이 없기에 본인의 행동이 정당하다. 이 말인즉슨 사회가 윤리적 자극과 비윤리적 자극을 제대로 구분 지어놓지 않은 상태에서는 사회가 구성됨에 따라 생기는 윤리를 포함해도 이미 제대로 구분되어 있지 않기에 이를 개인의 관점으로 전환하면 윤리가 포함되었든 배제되었든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비윤리적 행동을 저지르는 것에 대한 개인의 정당성을 옳지 않다고 단정 지을 수 없어진다는 거다.


이러한 상황에 쳐 해졌을 때 사회를 탓할 수도 없는 것이 생존보다 윤리의식을 먼저 자리 잡는 세상은 존재할 수가 없기에 이를 제대로 구분 짓지 못한 사회를 탓할 수도 없다. 이는 존재해야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고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어야 윤리의식이 자리 잡는 것이 세상의 구조이기에 모두가 동의하는 완벽한 윤리가 존재할 수 없음을 말한다. 그럼에도 사회의 관점에서 잘못됐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비윤리적 행동, 잘못됐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는 비윤리적 행동, 윤리의식이 있음에도 사회가 잘못됐기에 그에 따라 행해지는 비윤리적 행동등 사회문제로 도달하게 되는 비윤리적 행동을 배제할 수가 없다. 윤리가 빠진 법 앞에서 법대로 하라는 것은 비윤리적 행동을 수긍한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나마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수단으로 윤리, 비윤리를 통틀어 타인이 느끼는 살아있음을 앗아가는 타락한 가해자들을 제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당해진 가해자

사회는 타인이 느끼는 살아있음을 앗아가는 가해자를 제지하는 방안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은 가해자를 법적으로 제재할 수 없으면 별다른 방도가 없는 상황이라는 거다. 잠재적 가해자라고 하더라도 심지어 이미 직접적으로 가해를 했더라도 법적으로 제재할 수가 없어서 제지하지 못하는 상황이 빈번하게 발생함에도 대처방안으로는 법적으로 가해자를 제지하는 것뿐이다. 이 또한 강제적인 제지에 대한 사회를 겪어왔고 무분별한 경찰의 권력남용을 막기 위한 수단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한 긴리와 의무가 양극화되는 것에서 파생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 양극화는 이미 많은 문제를 시사해 왔음에도 해결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사람들은 권리를 누리기 위해 앞장서서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 스토킹만 보아도 스토킹 피해자가 이미 일상생활이 힘들어졌어도 확실하게 법적으로 제지할 수 있는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가해자를 막을 수가 없는데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양극화를 통해서 경찰의 권력남용만 막았을 뿐이지 권력이 높은 사람이 권력남용하기에, 권리를 가진 사람이 권리를 남용하기에 유리한 조건이라는 거다. 이렇게 법적으로 제지할 수 있는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스토킹, 권력남용을 일정 부분 수용할 수밖에 없는 것은 같은 맥락이다. 그리고 이것은 가해자의 개인적 관점으로는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서 정당한 것이기에 사회의 방향성과 합쳐지면 사회가 수용하고 있는 정당한일이 되어버린다.

 

살아있음의 의무, 권리

무분별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선 권리와 의무에서 이야기했던 권리와 의무의 비중을 균형 있게 맞추는 것에 윤리가 포함되어야 한다. 의무의 범위가 아무리 넓어지더라도 그만큼 권리가 늘어나 남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윤리적으로 허용가능한 범위가 정해져야 한다. 그래서 윤리를 제외한 개인의 관점으로 정당하더라도 사회에 속한 이상 사회의 윤리적인 관점에서는 개인도 그것을 정당하게 여기면 안 된다. 이것이 무너지면 천부인권에 해당하는 모든 사람이 서로 존중하는 것은 그림의 떡이 되고 천부인권이 무너짐과 동시에 기본권도 무너지고 존중할 사람과 존중하지 않을 사람이 나눠질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선 권리와 의무에서 윤리는 기본바탕이 되어야 한다.


윤리의 기본바탕에는 법 위에 권력, 돈, 지위, 이해관계, 인간관계가 있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단순히 권리를 가진 사람의 개인적인 문제가 아닌 비윤리적으로 권리를 가지려고 하는 사람도 포함된다. 사회가 권리중심의 사회가 되고 특정 집단의 권리만 커졌을 때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넘어가려는 권리를 가진 사람을 네 편 내 편 나눠서 편을 들어주어서는 안 된다. 누가 봐도 윤리에 어긋났음에도 편을 들어주게 되면 가진 사람입장에선 이용가치가 있기에 같은 편이 되겠지만 이용가치가 없어지면 편을 들어주던 사람을 언제든 버릴 것이다. 눈앞의 이익,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잘못된 것을 지지하게 되면 운이 특출 나게 좋지 않은 이상 미래의 살아있음을 앗아가는 행위가 될 것이다. 조삼모사처럼 눈앞의 자극, 쾌락을 얻기 위해 미래의 살아있음을 앗아가는 행위의 정당성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사회는 대처방안이든 대체방안이든 문제에 도달하기 전까지의 과정이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한 과정임을 직시해야 된다. 눈앞에 닥친 상황에 대처하고 예방하는 것도 좋지만 이러한 현상을 만든 상황자체를 개선해야 한다. 문제에 도달하기 전까지가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한 과정이라는 것은 어떤 방향성이든 '내'가 느끼고 싶은 살아있음을 느끼는 결과에 도달한다는 거다. 그래서 과정자체를 사람들이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사회의 방향, 교육에서부터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다양성의 교육과 '내'가 느끼고 싶은 살아있음을 찾게 해주는 교육등을 포함하고 비윤리적인 사람이 살기 좋은 사회가 아닌 윤리적인 사람이 살기 좋은 사회를 추구해야 한다.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윤리적인 사회는 관념적인 윤리가 아니며 단순히 도덕적이고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면서 살아간다는 의미와 달리 비윤리적 사고를 하는 사람도 사회의 소속감을 우선으로 생각할 수 있게끔 해야 한다.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다양한 방향성의 대체방안을 제시해 줌으로써 사회에서 어긋나지 않으며 개인의 정당함이 아닌 사회에서 정당한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환경이 되어야 한다. 관념적 윤리에서 벗어나 살아있음의 윤리를 바탕으로 윤리의식을 제외하더라도 의무를 다하여 권리를 얻고 싶게끔, 개인이 사회에 스스로 포함되고 싶게끔 만들어야 한다. 결국 의무와 권리에서 필요한 것은 부, 명예, 권력등 권리를 얻기 위해 아무리 노력해도 행해야 하는 의무가 존재해야 하고 권리를 얻기 위해 아무리 노력해도 얻을 수 없는 권리에 대한 사회적 잣대가 필요하다.


사회의 살아있음

-개인의 살아있음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로써 개인이 살아있음을 느끼는 모든 방식은 적합하며 정당화된다. 그런데 그것이 사회에 포함되면 정당화되지 않을 수 있다. 사회의 흐름에 따라 수용범위는 달라지겠지만 언제나 사회의 수용범위로 한정된다. 이 사회의 수용범위에 개인의 살아있음이 한정되는 것은 생존이 아닌 살아있음을 느끼는 구조가 사회의 기능으로 유지되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며 사회가 없고 문명이 없으면 어차피 생존을 위해 살아가야 할 것이다.


사회의 흐름 속에서의 개인은 생존의 시기부터 누군가의 생존을 컨트롤해도 된다는 신분제도와 같은 시기, 태어날 때 정해지는 것이 아닌 사람으로서 평등한 시기로 나눠볼 수가 있고 평등의 시기는 아직 진행 중이다. 자신의 살아있음만 강조하면서 타인의 살아있음에 피해를 주는 것이 정당화되던 시기와 달리 평등의 시기가 자리매김을 하고나서부터는 점차 타인의 살아있음을 앗아가는 사람을 제재하고 있다. 그래서 개인이 느끼고 싶은 살아있음은 사회의 수용범위를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아무리 뛰어난 개인이라도 인류의 역사를 합친 것보다 뛰어날 수는 없기에 그에 따른 지불로 스스로를 제재해야 한다. 반면 그렇다고 사회가 항상 옳은 것도 아니기에 변화가 필요하다면 개인의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방향성이 아닌 사회가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방향성을 전제로 다양한 부분을 고려한 후에 새로운 집단, 사회를 형성해야 한다.


-사회의 살아있음

사회의 살아있음은 사회전체가 반영된 살아있음으로 사회전체가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한 흐름은 거대한 파도와도 같다. 이 파도와도 같은 사회의 흐름은 개인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어서 몸을 담그기 싫은 파도일지라도 몸을 맡겨야 할 때가 있다. 그렇게 좋든 싫든 몸을 맡겨야 하는 파도는 관점만 다를 뿐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한 방향성이라는 것만큼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 방향성이 달라지지 않는 이유는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살아간다는 사실은 인지하지 않더라도 생존과 더불어 본능적으로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비교적 최근인 소확행과 더불어 워라밸이라는 파도의 흐름을 시기와 관점에서 보면 사회가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제시한 하나의 방향성이라고 볼 수 있다. 이 흐름에서 파생된 워라블이나 조기은퇴, 반퇴등에 대한 이야기들이 있으나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함이라는 본질을 빠트린 채 어떤 게 옳은지 아닌지, 맞는지 틀린 지는 아무리 이야기해도 모두의 정답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결국 이야기해야 할 것은 워라밸이라는 새로운 삶의 방향성을 잡은 이들에게 워라밸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이냐 아니냐, '내'가 느끼고 살이 있음이 맞느냐 아니냐이다. 원하는 것이 뭔지도 모른 채 파도에 휩쓸린 이들을 한대 묶어 그렇게 살아서는 집도 못 사고 부자도 될 수 없다고, 놀면서 집도 원하고 부자도 되길 원한다며 일반화해서 질책하기에는 집이 없고 부자가 아니어도 잘 사는 사람을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는 이들을 한대 묶어 질책하는 사람의 삶의 방향성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마다 느끼고자 하는 살아있음과 삶의 방향성이 다르다는 것이다. 집을 안 사도, 부자가 아니어도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사람에게 집과 부자를 강요하는 것은 사회가 집과 부자를 꿈으로 삶으라고 현혹하고 가스라이팅이하고 있는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사회는 워라밸이라는 거대한 흐름을 막아선 부자라는 현혹과 가스라이팅을 하기보다는 아직도 근로기준법에 어긋나는 초과근무, 연장근무로 죽거나 죽어나가고 있는 사람을 살펴보아야 한다. 다르게 보면 부자가 되어야만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것보단 부자가 아니어도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것이 더 바람직한 사회일 것이다. 이는 워라밸이든 워라블이 든 일만 하든 어느 한편을 옹호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닌 살아있음을 느끼는 수단이 다르기에 다양한 방법으로 살아있음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만약 워라밸이라 지칭하는 사람이 일에 따른 보수가 주어지는 곳에서 일을 하지 않고 보수만 바라는 것은 부당한 것이며 노력 없는 대가, 권리만 있고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이다. 워라밸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하지 않고 돈을 달라는 것이며 마치 강도와 다름없다. 한쪽의 권리만 올리고 의무를 줄이는 잘못된 양극화에서 파생된 것이므로 균형을 맞추기 위한 개선이 필요하며 이 모든 과정은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에 대한 중요도가 올라가는 사회의 거대한 흐름이다. 흐름은 사회적으로 상위계층일수록 존중받는 수직구조에서 사회적인 영향, 계층을 제외하고 서로가 존중할 수 있는 수평구조로 가고 있으며 현재는 온전한 수평구조가 될지 말지의 단계이다. 


과거에 주인과 노예로 나눠져 있을 때는 주인은 사람이지만 노예는 사람이 아닌 물건이었다. 개인의 생존과 삶을 정당하게 통제하는 사람이 존재했다는 얘기다. 물론 지금도 노예라는 신분만 없을 뿐이지 비슷하게 개인의 생존과 살아있음에 대한 통제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방향성이 그때처럼 수직구조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고 수평구조로 점차 바뀌어가고 있다. 애석하게도 아직까지 바뀐 수평구조가 한쪽으로 치우쳐지기는 한다. 사장이 갑질하던 시기도 있었지만 알바가 왕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고 선생의 권한이 크던 시기가 있었지만 지금은 학생의 권한이 커졌다. 한쪽으로만 치우치는 것은 권리만 있고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이 익숙한 수직구조의 삶을 누리는 일부 사람의 영향이 크다고 예상되며 그로 인해서 이 방향성의 과정이 지금은 다소 불안정하지만 결국에는 수평구조를 향하고 있다. 염두해야 할 것은 과정의 불안정이 권리만 누리던 이들에게 직접적으로 향했을 때 권리보다 의무가 상대적으로 많던 이들이 힘을 합치지 않으면 최상위계층의 권리만 누리던 일부의 사람과 수평구조를 바라는 다수의 사람이 언젠가는 피 터지는 싸움을 벌일지도 모른다는 거다.


거대한 파도는 수평구조를 향하는 흐름과 함께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타인의 살아있음을 앗아가려는 타락한 사람을 배제하려는 흐름도 있다. 배제 대상은 미투 가해자, 학폭가해자등이며 자신의 살아있음을 위해 타인의 살아있음에 피해를 주는 행위를 가한 사람에게 잘못을 인정하기를 바라고 경우에 따라서는 살아있음을 제재하거나 앗아가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이것은 수직구조에서 생성되는 두려움과 암묵적인 룰이 판치고 있을 때보다 수평구조일 때 더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이 흐름에서는 타락한 그들에게도 존중이 필요한가?라는 의문이 들 수 있는데 이를 천부인권과 연결 지으면 천부인권은 인격체를 위한 것인가 인간이라는 동물을 위한 것인가를 고민을 통해 타락한 그들의 행동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정확히 파악하지 않고 구분 지어지지 않으면 천부인권에 근거해서 인격체가 형성되지 않은 모든 인간을 존중해야 하며 그것은 다수의 히틀러를 존중하고 있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서 얼마큼 관용하고 존중하고 제재해야 하는지는 현 사회의 몫이지만 앞으로의 사회에서 우선시해야 할 것은 다수의 히틀러가 타락을 통한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이 아닌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그 외 다양한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어 하는 사회이다.


삶, 살아있음을 마무리하며

살아있음을 느끼는 범주는 굉장히 넓어서 개똥철학에서 다뤘던 내용은 극히 일부이며 다른 관점으로 보면 전문적으로 연결되는 것도 있을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이기에 전문적인 지식으로 보는 것도 좋으나 그것보다는 있는 그대로 접근해 보길 바란다. 때로는 어른의 시선으로는 보지 못하는걸 아이의 시선으로 발견하는 것처럼 아는 것이 많아져서 보지 못하는 것도 있는 법이다. 사회의 규격에 맞춰 '나'의 살아있음을 찾기보단 아이처럼 '나'의 살아있음을 먼저 찾기를 바란다. '내'안의 아이의 시선으로 살아있음을 찾아도 기존에 사회의 규격에 맞춰 살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아서 알아서 다시 사회의 규격에 맞춰서 살 것으로 예상되기에 사회의 규격에 맞추는 것은 그 후에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에 대한 전문가는 없으나 명상을 하거나 몰입을 하거나 종교적 믿음등 전문가라고 말할 수 있는 이는 있을 것이다. 전문가를 자처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 의도를 확정 지을 수는 없으나 확실한 것은 삶을 느끼는 전문가가 있다면 그가 느끼는 정해진 정답이 아닌 각자가 느끼고 싶어 하는 정답의 길을 열어주고 선택하게 해주는 사람일 것이다. 그렇기에 살아있음의 의미를 알고자 하는 것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살아있음을 알고자 하는 것이며 그것이 타인이나 사회의 살아있음에 영향을 받은 후에 어떤 선택을 할지도 '나'의 선택이 되어야 한다. 


살아있음을 가장 많이 느꼈던 순간은 언제인가? 

당신이 원하는 살아있음은 무엇인가?

앞으로 어떤 살아있음을 느끼기를 선택할 것인가?

사람은 왜 사는가, '나'는 왜 사는가 당신이 선택한 정답은 무엇인가?

이전 25화 사랑은 특별함에 대한 고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