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질문을 강요하는 것은 아니고 저처럼 연기를 전공하신 분들이 한 번쯤 들어봤을 질문이 있거든요.
"그 많은 대사를 어떻게 다 외워요?"
그러게요. 그 많은 대사를 도대체 어떻게 외우는까요? 저도 이 질문을 처음 들었을 땐 짧은 입시용 독백들만 외우고 있던 터라 하다 보면 외워진다고 얘기하곤 했어요. 그것도 말이 하다 보면 외워지는 거지 암기에 취약한 편이라 외우기 버거웠는데 밥 먹고 대본 보고 밥 먹고 대본 보고 며칠을 연습하다 보면 어느새 외워지더라고요? 오히려 반대로 공부를 잘하는 친구가 똑같은 질문을 하자 의아해서 얘기했죠. "아니 네가 공부하면서 외우는 양이 이것보다 더 많은데 네가 나보다 더 잘 외울걸?" 그러자 친구가 "그냥 외우기만 하는 건 쉽지. 뭐 외워서 발표하는 것도 어려운데 그걸 연기까지 하면 얼마나 대단한 거야?"라는 대답을 해줘서 그제야 이해했어요. 그래요. 머리가 좋은 친구는 대본 외우는 건 쉬운데 외워서 말하는 과정과 더 나아가 표현하는 과정에 대해서 대단하다고 느끼고 있었어요. 저처럼 암기를 못하는 사람들은 외우는 거 자체만으로 버거울 수 있는데 말이죠.
그렇게 입시가 끝나고 대학교를 다니던 중 다른 느낌의 질문을 들었어요.
"대사 외우는 게 힘들어요. 선배는 어떻게 외우세요?"
같이 연기를 배우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대사를 외우는 게 힘들다는 얘기를 듣자 이게 뭔가 싶었어요. 저보다 머리도 좋고 공부도 잘하는 후배였거든요. 그래도 버겁다고 느낄 수 있겠구나 싶어서 "나도 암기가 취약해서 어려워"로 시작해서 서로 어떻게 외우고 있는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아, 이 아이는 연습보다 노는걸 더 좋아하는구나'라고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어릴 때 아니면 언제 노냐며, 다 경험이고 너에게 재산이 될 거라며 좋게 좋게 얘기했죠.
사실 사람마다 대사를 외우는 방법이 다르니까 조금 더 쉬운 방법이나 자기에게 알맞은 것을 찾기 위한 똑똑한 질문이었는데 당시에는 제가 스스로 대사를 외우는 방식을 몰랐기에 알려줄 수가 없었어요.
놀랍게도 제가 대사를 외우는 방식을 알게 된 건 대사를 제대로 외우지 않았을 때였어요.
'나 대사 어떻게 외운 거지?'
제가 연기를 처음 배웠을 때로 거슬러 올라가 그때의 선생님께서 너무 잘 알려주셨는데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게 "작가가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을 담아 쓴 희곡인데 대사 한 글자도 틀리지 마라"라는 거였어요. 유독 저에게만 그렇게 해주셔서 감사한 이유가 제가 난독증 같은 게 있는데 한 글자에도 신경 써서 정성을 담다 보니 연기를 할 때 도움이 많이 되었던 거 같아요. 굳이 제가 겪는 증상을 얘기하자면 무의식적으로 글을 제멋대로 읽는 거예요. 제대로 읽는지 확인하기 위해선 말하면서 읽고 적힌 글과 내가 말한 게 맞는지 틀린 지 확인하면서 읽는 거죠. 그래서 저 스스로도 대본을 외울 때면 토씨 하나 안 틀리려고 집착을 많이 하는 편이었어요.
그런데 제가 잡생각을 많이 하던 어느 날 그러면 안 되는데 대본도 제대로 외우지 않고 무대에 올라갔어요. 처음으로 '대사 틀리면 어떡하지'란 생각이 들어서 긴장도 하고 걱정도 했죠. 그런데 다행히도 생각보다 공연을 더 잘 마치고 나니 '나 대사 어떻게 외운 거지?'가 되었어요. 이게 어떻게 가능한가 봤더니 제가 인물에 접근하는 방식 덕분에 대사를 외우는 게 아니라 대본을 보면 대사가 외워지는 거였어요.
-사람마다 인물을 연기하기 위해 대본을 분석하는 방법은 다르겠지만 경험이 없으신 분들을 위해 분석하는 방법을 간략하게 적어보자면 작가 분석, 시대 분석, 대본 분석, 인물분석, 관계 분석, 연출 분석 등이 있어요. 그리고 인물을 구현해내기 위해 말하고 표현하는 부분에 치중하신 분이 있는 반면에 저는 분석에 치중하는 편이라고 보시면 될 거 같아요. 대사 하나를 하더라도 최대한 더 많은 걸 찾으려고 노력하는 거죠. 뭐 물론 스스로 연기를 못한다고 생각한 덕분에 선택한 방법일 수 있겠네요.-
대본 분석이 아닌 일상생활로 예를 들자면 "오늘만 먹고 내일부터 다이어트할 거야"라는 친구가 내일은 어떤 핑계를 대며 먹을지, "아 너무 힘들어 술은 이제 지긋지긋해 다신 안 마신다"라는 지인이 어떤 말을 하며 또 술을 마실지, "오늘 차가 막혀서, 진짜 내일부터는 안 늦을게요"라는 직장동료가 다음엔 또 어떤 핑계로 지각하게 될지 외우지 않아도 저절로 예측이 되잖아요. 그것처럼 대본이라는 한정된 틀 안에서 인물의 과거를 분석하고 왜 이런 말을 했을까를 이해하면 저절로 대사가 나오는 거예요.
그렇다고 아예 외울 마음이 없는 게 아니라 똑같은 분량의 대사여도 예전에는 대본을 500번 봤다면 그걸 알게 된 이후로는 100번 정도로 줄어든 거죠. 오히려 분석을 통해 인물을 구현하는 것에 집중하고 토씨 하나 안 틀리려고 집착하지 않아도 어느새 대사는 외워지는 거였어요. 크나큰 단점으로는 암기를 너무 적게 한 상태에서 집중이 깨지면 순간 백지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이 있기는 해요.
그 후에는 "대사 어떻게 외워요?"라는 질문에 "저는 암기를 못해서 대사 안 외워요. 대본 보면 외워져요."라는 아리송한 대답을 하게 되었죠. 그런데 이렇게 배우가 대사를 외우는 당연한 일을 궁금해하거나 대단하게 보는 사람도 있듯이 자신이 몸담고 있기에 당연한 것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대단하다고 느낄 수 있잖아요. 일례로 저에게 처음 연기를 알려주셨던 스승님께서는 입시기간이 되면 아이들을 위해 마다하지 않고 보충수업을 해주시는데 제 입장에서는 정말 대단한 일이지만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을 하세요. 이렇듯 저는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말은 남들의 시선이나 통장에 돈이 얼마나 찍히느냐 보다 스스로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지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달라지지 않나 싶어요.
이제는 "그 많은 대사를 어떻게 다 외워요?"라고 묻는 분들에게 대답 대신 이렇게 여쭤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