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열닷새 May 03. 2023

인생 첫 라이스 보울

설렘과 두려움 그 어딘가의 도전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이천이십일년 팔월의 어느 날, 오래간만에 효진언니를 만났다. 코로나가 한창이었던 시기여서 만날 지 말 지를 한참을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을 때 약속을 잡았다. 그동안 너무나 답답했고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게 참 많았다.


 뭘 하면 좋을지 여러 후보가 나왔다. "한강에서 따릉이를 타자", "이태원에서 샐러드 식당을 가자", "시청에 있는 미슐랭 족발집을 가자", 그러다 나중에는 "일산 호수공원에 놀러 가자"까지 각양각색의 일정을 만들었다. 결국 언니가 점심에 고기를 먹는 걸 부담스러워하는 듯하여 이태원에서 샐러드를 먹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흘러 약속 전날, 샐러드 가게가 사라진 것 같다는 언니의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검색해 보았다. 웬 걸, 아무리 찾아봐도 정말 그 가게의 정보가 나오지 않았다... 검색 결과는 블로그 리뷰뿐...


 우리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듯 다시 어느 식당에 가야 할지 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언니가 라이스보울과 아사이볼 식당을 찾아냈고 "그래 건강식으로 먹자!" 싶어 단번에 OK 했다. 안 그래도 유지어터인 데다가 어느샌가 고기를 먹고 나면 왠지 속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고기만큼이나 싱싱하고 산뜻한 음식이 좋아지는 것 같다. (아직 고기'보다' 좋은 것은 아니다.)






경리단길에서 라이스 보울을 먹다


 용산 역에서 만나 버스를 타고 경리단길로 가는 길. 스콜같이 내리던 비는 거의 멈췄었다.  그렇게 약 15분을 달려 내린 정류장에서 지도 어플을 보며 올라간 곳엔 '바리'라는 표지판만 있을 뿐 가게가 없었다. 당황한 우리는 결국 가게로 전화했고 가게 위치가 달라졌다는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알고 보니 식당은 정류장에서 훨씬 가까운 곳에 있었다ㅎㅎ


 깔끔한 외관에 조용한 분위기. 건강한 음식을 대접하는 곳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처음 먹는 라이스 보울과 아사이볼, 어떤 맛일지 상상하며 메뉴를 정했다. '고추냉이 더블아보카도볼'(리뷰에서 멸치볶음이 맛있다고 했는데 정말 신의 한 수였다.)에 연어를 추가했고 후식은 상큼한 과일을 먹고 싶어 '아사이볼 과일토핑'에 치아시드 추가로 정했다. 라이스 보울에는 귀리밥, 아보카도, 햄프시드, 아몬드 등이 들어갔고 아사이볼에는 크랜베리, 블루베리, 바나나 등이 있었다. (언니가 계산하고) 주문한 뒤 자리에 앉아 기다리니 창문 뒤로 남산 타워가 눈에 들어왔다. 비가 내려 분위기가 더욱 오묘했다. 



고추냉이 더블 아보카도 볼

 배가 등에 달라붙겠다(오후 두 시가 넘었기 때문에)고 생각할 즈음 음식이 완성되었다. 처음 음식을 보고 생각한 것은 '아 이거 간에 기별도 차지 않겠구나...'였다. 1년이 넘는 다이어트에도 위가 줄지 않은 나는 걱정부터 됐다. 그리고 첫 라이스 보울을 먹은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었어?!" 


 먹으면서 언니랑 "맛있다"는 말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다. 한 숟갈 뜨고 "맛있다", 또 "맛있다" 했나 보다. 자칫 밋밋할 수 있는 맛이 볶음 멸치로 적당히 짭짤하고 적당히 달달했다. 그리고 아보카도의 단단하지만 물컹한 식감과 견과류의 오독함이 잘 어우러졌다. 물론 까슬까슬한 귀리밥이 단연 최고였다. 연어는 살짝 비린 맛이 나긴 했지만 크게 신경 쓸 정도는 아니었다.


 아사이볼을 먹을 차례, 사실 라이스 보울보다 아사이볼을 훨씬 기대했다. 워낙 과일을 좋아하기도 하고 아사이볼은 맛을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두근두근 기대되는 첫 수저를 뜨고는 역시 기대와 실제는 반대라는 생각을 했다. 아사이볼은 뭐랄까 말로 표현하기 힘든 맛이었다. 과일 빙수 맛인데 얼음이 초코로 되어있는...? 바나나와 잘 어우러지는 맛이었지만 다른 베리류 과일과는 오묘했다. 그래도 맛있게 잘 먹었다!


 기분이 좋아지는 음식이었다 ;)


 힙한 카페 '피클피클'에서 디저트를 먹은 후 집에 가는 길에는 적당한 노을이 해방촌의 건물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 모습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진 찍을까?" 소리가 절로 나왔다. 드문드문 요즘 '갬성'을 담은 가게가 눈에 띄었다. 다음에는 이런 조그만 가게들을 둘러보자는 다짐을 도장처럼 가슴에 찍고 발걸음을 옮겼다.






처음은 두렵다


 효진언니와의 이태원 나들이는 아주 아주 성공적이었다. 요즘 '도전'이라는 개념에 많이 무뎌졌다. 새로운 음식, 새로운 식당이 두렵다. 실패를 최소화하려고 무던히도 노력한다. 카카오맵, 네이버 플레이스 등 리뷰를 훑고 제일 '안전한' 메뉴를 정하곤 한다. 김영하 작가가 그런 얘기를 한 적 있다. 여행을 가면 일부러 제일 어렵고 해석하지 못할 이름의 음식을 시킨다고. 그것 또한 새로운 추억이고 도전이기 때문에 맛이 있을지, 없을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이야기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지금까지 다른 사람의 의견에 너무 의존적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식을 먹고 맛이 없었으면 실패한 것이 아니고 그저 다음에는 그 음식을 먹지 않으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니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은, 아니 많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도전을 즐기자 내 시야와 입맛이 눈에 띄게 넓어졌다. 평생 모르고 살았을 맛을 깨닫는 일이 많아졌다. 이 날도 어쩌면 매일 먹던 그런 음식, 고기 또 고기로 하루를 채웠을지 모른다. 그런데 언니 덕분에 새로운(심지어 건강한) 음식을 접했고 좋은 사람과 함께 감정을 공유하며 담소를 나누는 훌륭한 식사 시간을 가졌다.


 이 이후 어머니 생신을 축하하며 이탈리안 음식을 먹었다. 평소 크림 파스타라고 하면 이름만 들어도 고개를 저으시던 아버지께서 이 날 크림 파스타를 처음 드셨다. 60 평생 한식만을 고집하며 살아오신 분이라 제발 한 번만 드셔보라고 외쳐도 도통 듣지를 않으셨다. 그런 아버지께서 "처음 느껴보는 맛"이라며, 며칠 뒤에는 부모님 두 분이서 브런치를 드셨다고 한다. 언니는 나에게, 나는 부모님께. 이렇게 주위 누군가 도전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게 참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부모님 세대는 우리처럼 다양한 음식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기에 앞으로도 부모님의 도전을 도와 드리거나 같이 도전하는 시간을 자주 가지려고 한다.


나도 더욱 적극적으로 도전하고 또 '실패'해야지.

작가의 이전글 힘빼는 연습 중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