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고 받는 속이고 속아주는 엔터테이너의 인간관계
미국에서 인기 스포츠 중 하나인 프로레슬링 (이하 WWE)
보통 링 안에서 1 대 1로 주먹질과 잡기를 통한 혈투를 벌이고, 핀폴로 누워 있는 상대가 3초 동안 일어나지 못하면 승리하는 방식이다.
필자가 처음 WWE를 봤었던 건 2002년,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학교 끝나고 집에 돌아와서 TV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SBS스포츠 채널에서 마침 WWE RAW 프로그램이 방송하고 있었다. 나에게 굉장히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첫 장면이 레슬러들끼리 링 안에서 피가 터지도록 싸우는 장면에 놀라웠다. 거기에 의자, 사다리, 테이블 등 각종 도구들을 이용한 폭력적인 행동들은 순수한 초등학생인 나를 자극의 세계로 초대했다. 이 외에도 타이탄트론에서 나오는 멋진 음악들과 선수 등장씬, 선수들끼리 자극적인 인터뷰 및 대화, 경기 도중 난입 하는 선수 등등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는 혼돈의 카오스, 그야말로 도파민 덩어리.
몇 번 보다 보니 자주 나오는 선수들은 익숙해져서 매일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트리플 H, 숀 마이클스, 제프하디, RVD, 존시나 등등 대단한 실력과 기술들을 가진 선수들이 많았다. 당시 좋아했던 선수는 스톤콜드 스티브 오스틴. 맥주를 좋아하시는 분이고, 뻑큐를 자주 날리셨다. 피니시 기술은 스터너. 상대 배를 차고, 뒤로 돌아 목을 누르는 기술. 이걸 맞고 상대는 정신을 못 차리고, 핀폴승을 거두는 그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나는 WWE를 잘 보다가 중학교 3학년 때 어떤 잡지에서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WWE 방송에 나오는 선수들의 인터뷰, 싸움, 난입들은 각본에 의한 연출이라는 것을...
그 사실을 알게 된 나는 굉장히 큰 배신감을 느꼈다. 그 모든 것들이 실제가 아니고 짜고 치는 연출이라고? 헛웃음이 나왔다. 나의 슈퍼스타들이 파이터가 아닌 연기자였다니... 실망감과 함께 진실을 알게 된 나는 WWE를 보지 않게 되었다. 그 후 WWE는 자극적인 연출보다는 순한 연출로 노선 변경, 기존 선수들의 은퇴로 인한 슈퍼스타의 부재 및 인터넷의 발전으로 점점 쇠락의 길을 걷고 있던 시점이기도 했다.
WWE와는 멀어진 지 꽤 오랜 세월이 지났다.
그러다가 몇 년 전, 메이플스토리라는 게임에서 "늘 있는 WWE"라는 밈이 인터넷에 떠돌게 된다.
이 밈이 생기게 된 계기는 "게임 운영사와 유저 간의 보상에 관한 신경전을 두고 이건 마치 각본 짜놓은 WWE 같다"라는 어느 커뮤니티 유저 댓글로 사람들의 공감을 받으며 밈화 되었다.
'어차피 보상 줄거지만 실랑이를 벌이는 모습'. 이른바 짜고 치는 고스톱.
결과가 정해진 것을 양측이 이해하고 싸우는 모습이 WWE라는 너무나 적절한 표현으로 나 또한 공감 갈 수밖에 없는 밈이었다.
이런 현상을 보며 인간들의 평소의 인간관계 또한 WWE 아닌가 생각했다.
나보다 어른과 대화할 경우 나의 생각만을 말해서 다툼 만들기보다는 입맛에 맞는 대답을 해야 할 경우가 종종 있다. 그래야 안 좋은 결과를 회피할 수 있다.
'이 어른은 나와 대화를 하고 싶다는 뜻이구나 그러면 어느 정도 맞장구 쳐주면 좋게 대화가 끝나겠지'
연인 관계에서도 마찬가지. 서로를 너무 잘 알아서 서로 싫어하는 이야기, 단어, 행동 등을 굳이 할 필요가 없는데 관심을 끌기 위해서 상대를 자극하는 행위. 그걸 아는 사람이 대체 왜 그러는가? 당연히 부정적 결론으로 도출되는 게 당연하다.
'잘 알고 편한 사이일수록 더 조심해야 한다'
단순히 내 감정을 들어내기 보다는 상대의 의도를 잘 접수하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필자는 불필요하게 내 입, 혀, 목이 아프게 타인과 대화하는 걸 원치 않는다. 그러나 인간사회에서 나는 혼자 살 수 없고, 돕고 돕는 주고받으며 속이고 속아주는 엔터테이너의 연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인생을 그리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상대의 눈빛, 표정, 말투, 호흡 등을 통해 이 사람이 연기를 하는 건지 진심으로 말하는 건지 어느 정도는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는 지혜가 생겼다. 나이가 한 살 한 살 먹을수록 더 크게 보이고, 나보다 어린 사람의 말이나 행동을 보며 나도 혹시 저런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았을까 하며 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보인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에 대한 혜안이 넓어졌다는 이야기니까.
인간관계에서는 서로서로 조심해야 하는 게 당연하다. 흔히 말하는 선 넘는 말과 행동을 하면 안 된다. WWE인가? 하고 접수 받을려 했던게 UFC로 진심 펀치를 맞고 쓰러질 수도 있다.
'난 진심 펀치를 날릴 수 있는 힘과 지능을 갖고 있지만 타인과의 관계를 위해 각본에 속아 주는 것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