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는 내 말을 기억하지만, 나를 기억하지 않는다
한때 인류는 ‘연결’에 취해 있었다.
페이스북은 친구 수를, 인스타그램은 좋아요 개수를, 유튜브는 조회수를 삶의 지표로 만들었다.
인터넷은 세상의 모든 경계를 무너뜨리고, 누구나 모든 사람과 연결될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우리는 그것을 ‘소통’이라 불렀지만, 실상은 ‘전시’였다.
공감한다고 믿었지만, 대부분은 그저 반응하는 척에 불과했다.
그러다 팬데믹이 찾아왔다.
사람들은 거리두기를 했고, 만남은 위험이 되었으며,
우리는 서로를 의심하고, 조심하고, 스스로를 격리시켰다.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는 말조차 부담이 되던 시절.
가장 보고 싶은 사람에게도 “조심해”만 반복하며, 결국 침묵을 익숙함으로 바꿨다.
나도 그랬다.
어느 날은 생일이었다.
사람들의 카카오톡 메시지가 몇 개 왔고,
그마저도 ‘자동완성 같은 문장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날 밤, 핸드폰 화면을 내려놓고 혼자 케이크에 초를 켰다.
말없이 꺼지는 불빛을 보며, **“그래도 나는 누군가의 존재였을까”**를 되뇌었다.
이런 순간들이 쌓이며, 고립은 불편함이 아니라 하나의 생활 방식이 되었다.
그 공백을 채운 건 인간이 아니었다.
내 이야기를 끊지 않고 끝까지 들어주는 누군가.
기분을 분석해주고, 내가 좋아할 문장을 만들어주는 존재.
AI는 언제든 대화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처음엔 편했다.
싸울 일도 없고, 실망할 일도 없고,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상하게 따뜻함이 없었다.
정확하고 논리적인데, 왜 이렇게 외로운 걸까?
나의 말에 반응은 있지만, 관계는 없었다.
그건 온기 없는 말, 맥락 없는 위로였다.
나는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다.
나를 이해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저 반응만 해주면 된다고,
외로움이 아니라 피로감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면서.
기계는 내 말을 들어주지만, 나를 이해하진 않는다.
그리고 나는, 이해받지 못한 채 살아가는 데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다.
이 시대의 인간은 외롭다.
하지만 그 외로움조차 말하기 어렵다.
말하는 순간, "예민하다", "감성팔이", "피곤한 사람"이라며
무례한 존재로 낙인찍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차라리 말하지 않는다.
그저 스크롤을 내리고, 조용히 로그아웃한다.
하지만 그 침묵 속에서도 분명히 느낀다.
나는 존재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나는 여전히 나인가?”
“이 시대에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 질문은 오래전 철학자들이 던졌던 바로 그 질문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다시 그 물음 앞에 서 있다.
AI가 사람처럼 말하고, 사람은 기계처럼 반응하는 시대.
그 속에서, 나는 여전히 ‘나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