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지 않는 시대, 존재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단순히 살아 있는 생물학적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는 유일한 존재,
즉 ‘현존재(Dasein)’라 불렀다.
현존재는 스스로의 삶을 묻고,
죽음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존재다.
이 질문 가능성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이라고 그는 말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점점 그 질문을 잃어가고 있다.
우리는 존재하기보다 반응하고,
사유하기보다 업데이트하며,
관계 맺기보다 피드에 뜬 감정에 맞춰 살아간다.
AI는 감정을 분석하고, 나의 기호를 학습하고, 내가 좋아할 답을 미리 준비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속에서 나는 나를 더 잃어가는 감각을 느낀다.
우리는 하이데거가 말한 것처럼,
항상 타인의 시선 속에서 나를 규정하며 살아간다.
내가 누구인지는 나 혼자 정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판단과 사회의 기준 안에서 정체화된다.
그런데 이제, 그 시선은 더 이상 사람만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AI 알고리즘의 평가 기준에 따라
자신을 꾸미고, 말투를 바꾸고, 감정을 설계한다.
“이 말이 더 클릭을 부를까?”,
“이 표정이 더 반응을 끌까?”
모든 판단은 점점 나를 중심으로부터 멀어져 간다.
결국 나는 선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선택은 이미 누군가에 의해 디자인된 것이다.
하이데거는 또 하나의 중요한 개념을 이야기했다.
실존하는 인간은 죽음을 자각하는 존재라고.
죽음은 단지 생명의 끝이 아니라,
삶을 의식적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가능성의 한계선이다.
죽음을 자각하는 순간,
우리는 오늘을 선택하고, 책임지고, 의미 있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죽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외로움, 불안, 고독과 같은 실존적 감정은
'치유해야 할 오류'나 '최적화할 대상'이 되었고,
그 불편함은 곧장 기술로 대체된다.
불안은 명상 앱이 줄여주고,
우울은 감정 분석 알고리즘이 정리해 주며,
AI는 나의 상태를 진단하고, 위로의 문장을 자동 생성한다.
하지만 그렇게 위로받을수록 이상하게 마음이 허전하다.
아무도 나를 잘못된 존재라고 말하지 않지만,
나 역시 진짜 존재하는 것 같지 않다.
실존주의는 끝났는가?
아니, 끝나지 않았다.
다만 더 이상 말해지지 않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다시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할 때,
실존은 조용히 제 자리를 찾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