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지런한 새 한 마리가 잠을 깨운다.
이불속에서 눈을 감고 그 소리를 듣고 있다.
새의 지저귐은 단순한 목소리가 아니다.
목적이 분명한 언어다.
누구를 향해, 어떤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상상의 나래를 펴고
새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넘나든다.
이불 밖으로 얼굴을 살짝 꺼낸다.
햇빛과 내 얼굴이 만난다. 따사로운 볕이다.
아침이 왔다.
옆에는 아직도 아내가 자고 있다. 쌔근쌔근 자는 모습이 아기 같다.
뽀뽀를 할까 말까 고민하다 엉덩이를 토닥토닥.
"이제 일어날까?"
밥 하기가 귀찮다. 에라 모르겠다, 대충 먹자.
잡곡 식빵을 팬에 살짝 굽는다.
신선한 야채를 씻어 손으로 찢는다. 흑임자 드레싱을 살짝 얹는다.
후다다닥 스크램블 에그를 만들고 치즈를 꺼낸다.
마지막으로 과일 몇 가지를 깎으면 아침 준비 끝.
깜빡했다!
아내가 좋아하는 사과 잼을 꺼내 예쁜 그릇에 옮겨 담는다.
또 깜빡했다!
커피 머신 앞으로 달려간다.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미지근한 카페라떼를 만든다.
꼼꼼이가 완전 깜빡이가 되었다.
슬프기도 하고 좋기도 하다.
둘이 마주 보며 별로 차린 것 없는 아침 식사를 한다.
"여보, 우리 참 많이 변했다. 그치?"
산책을 나가야겠다.
마당을 살피고 동네를 걷는다. 나지막한 뒷산을 함께 오른다.
땀방울이 맺힐 듯 말 듯 덮지도 않고 춥지도 않다. 더 힘차게 걷는다.
나란히 걷지 않고 앞뒤로 걷는다. 서로의 걸음을 방해하지 않는다.
발걸음 소리로 아내와 나의 간격을 재어가며 너무 멀어지지 않게 한다.
너무 멀어졌다 싶으면 이야기를 건네는 척, 발걸음을 멈춘다.
동네가 한눈에 보이는 곳, 그곳에 서서 우리 집을 찾는다.
조그마한 우리 집. 넉넉한 우리 집.
아이들은 도시 속에서 잘 지내고 있을까? 세상을 잘 이겨내고 있을까?
뒷 주머니 속에서 낡은 리코더를 꺼낸다.
눈을 감고 리코더를 연주한다. 바람을 타고 노래가 흘러간다. 노래에 내 마음을 함께 보낸다.
오른쪽 주머니에서 메모지와 파란색 펜을 꺼낸다.
스케치하듯 나만 알 수 있는 글씨로 글을 재빨리 써 내려간다.
시가 내게로 왔다.
오후에는 나들이를 하기로 했다. 아내와 산을 다시 내려간다.
아침에 남겨둔 설거지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다.
어떤 옷을 입을지 고민이다.
청바지와 셔츠를 입는다.
아내는 나이에 맞지 않는 옷이라며 핀잔을 준다.
다른 옷으로 갈아입을까 하다 '나이에 맞지 않으면 뭐 어때?'라는 생각이 든다.
청바지와 셔츠를 입고 당당히 집을 나선다.
사무엘 울만은, 청춘은 마음가짐이라 하지 않았던가.
나는 아직 청춘이다.
용기와 열정과 영감이 살아서 꿈틀 되는 청춘 중에 청춘이다.
왕청춘이다.
섬진강 줄기를 따라 드라이브를 한다.
여기가 좋겠다.
소리 없는 강물이 넘실넘실 넘어올 수 있도록 창문을 모두 내린다.
아내는 의자를 뒤로 젖히고 아직 다 읽지 못한 소설책 한 권을 꺼낸다.
다행이다.
아내의 마지막은, 혹시 내가 없더라도 책 한 권이 함께할 것이다.
아내가 외롭고 힘들 때 책은 항상 곁에 있어 주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힘껏 뛴다. 바짓가랑이를 걷고 물속으로 들어간다.
작은 물고기들을 신나게 쫓아다닌다.
우르르르 도망가는 모습이 아이들 같다.
아이들이 그립다.
나는 술래잡기하고 싶은데 물고기들은 자꾸 숨바꼭질을 한다.
재미없게.
아내를 향해 손을 흔든다.
오랜만에 아내 이름을 크게 불러본다.
처음 만남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나를 향해 손을 크게 흔들어 주는 사람.
그리고 마지막에도 나에게 손을 크게 흔들어 줄 사람.
눈물이 핑 돈다.
다행이다. 우리가 함께 할 수 있어서.
메기 매운탕이 먹고 싶다.
아내는 매운탕 속에 들어있는 메기 대가리를 싫어한다. 무서워한다.
아내에게 무엇이 먹고 싶은지 물어본다. 대답은 언제나 같다.
"오빠 먹고 싶은 걸로 먹자."
내 나이가 몇 개인데... 아직도 오빠라고 부르는 아내.
나는 아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몇 가지 보기를 얼른 만들어낸다.
"1번은 산채비빔밥과 파전, 2번은 피자와 파스타, 3번은 닭볶음탕, 어떤 게 좋아?"
"진짜 오빠 먹고 싶은 걸로 먹자."
보기마다 반응했던 아내의 눈빛과 표정을 헤아려 아내가 원하는 메뉴를 감으로 찍는다.
"피자와 파스타가 좋겠다."
"사실, 피자랑 파스타가 먹고 싶었는데..."
정답을 잘 찍었다. 지금까지 함께 살면서 쌓은 내공이다.
전문가는 아니어도 준전문가는 된 것 같다.
"피자는 페페로니로 하고 파스타는 토마토, 로제, 크림 다 맛있어 보이는데..."
"피자는 페페로니로 하고 파스타는 당신이 좋아하는 쉬림프토마토로 하자."
우리가 자주 다녔던 포비의 키친이 떠오른다.
아직도 그곳보다 맛있는 페페로니 피자를 찾지 못했다.
포비 아저씨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어디에선가 피자를 굽고 있을까?
아님 뽀로로와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뽀롱뽀롱 섬으로 갔을까?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전화가 울린다. 딸이다.
엄마랑 데이트를 했다고 하니 부러워한다.
나중에 둘만 데이트를 하자고 몰래 약속을 한다.
언제나 그랬듯이 오늘 하루를 재잘재잘 풀어놓는 딸.
수고했다고, 잘했다고 응원을 해 준다.
그리고 보고 싶고 사랑한다고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아들이 생각난다. 전화를 걸까 말까 생각하다 그만둔다.
전화기에 자꾸만 눈이 간다.
내 맘을 알아차리고 금방이라도 아들 전화가 울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