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접한 쪼랩만의 즐거움
대한민국의 고등학교 시절을 거쳐온 사람이라면 "대학만 가면 ~"으로 시작하는 어른들의 말씀을 지겹도록 들어봤을 거다. 연애부터 시작해서 대학에 가면 원하는 건 다 생기고, 문제들은 다 해결된다고 한다. 물론, 요즘에는 우스갯소리로 하는 경우가 더 많지만, 수많은 약속 중 딱 두 가지는 확실히 나에게 주어진다. 시간과 자유. 간단하게는 시간표를 마음대로 짤 수 있는 자유부터 시작해서 법적 성인의 신분으로 할 수 있는 선택의 자유까지. 강의가 끝난 후에 주어지는 시간(물론 과제에 치이면 생각이 달라지지만)과 모두에게 보장된 기나긴 방학들까지. 이 방대한 시간과 자유도에서 학업과 친구들, 동아리나 과생활을 다 고려해도 우리에게는 어떤 강의를 듣고, 어떤 분야를 공부할지, 개인 시간에 무엇을 할지의 선택은 남아있다. 전공 공부와 다른 일로 바쁘다고 해도 취미 하나 정도 천천히 가꾸는 걸 추천하고 싶다.
옛날 옛적부터 자소서나 원서를 준비하면서 취미생활란만큼 난감한 칸이 없다. 스몰토크에서도 단골 질문인 만큼 누구나 하나쯤은 갖고 있을 것 같으면서도 왠지 다른 사람 앞에서 취미를 공표하기엔 낯부끄러운 면이 없지 않아 있다. 괜히 멋진 취미가 아니면 말하기도 애매하고 들인 시간에 비해 실력이 허접하면 남한테 보여주기도 민망스러울 때가 있다. 이런 분위기에 익숙해지니 취미마저 하나의 스펙이나 생산적이고 쓸모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부담까지 느껴진다. 프로가 아니면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가 있지만, 정작 아마추어의 어원은 ‘애정으로 일하는 사람’이다. 내 전공과 진로에 대해서는 효율과 실력이 중요하지만, 자발적으로 하는 취미에 대해서는 마음 편히 엉망진창일 수 있는 소중한 자유가 있는 거다. 마음으로 평소에 관심 있던 분야에 대해 책 한 권을 사거나 수강권을 끊으며 시작해 보자.
나의 경우에는 ‘허접한 취미’가 도예다. 시작은 별거 아니었다. 고등학생 때 SNS에서 우연히 보게 된 어느 작가의 물레 영상이 굉장히 평화롭고 힐링될 것 같아서 막연한 로망을 가지고 있었다. 난 단순히 말랑한 흙을 가지고 힐링하기 위해 여름 방학에 공방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 결과 물레를 구경하기도 전에 한 달 동안 흙의 성질을 배우고 물레를 처음 배운 날에는 상체 근육통을 며칠 앓았다.
내가 상상했던 잔잔한 신체적인 힐링은 아니었지만 땀을 뻘뻘 흘리면서 느낄 수 있었던 정신적인 힐링이 오히려 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다. 도자기를 배우면서 가장 크게 다가온 점은 인풋에 대한 아웃풋이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실체란 것이다. 도자기를 시작할 무렵 바쁜 전공 공부와 막막한 랩 인턴 생활에 모르는 사이 많이 지쳤다. 단순 노력으론 턱없이 부족하고 주변의 도움이 있어도 별 성과가 안 나타나는 일이 지속되다 보니 막막하고 의욕이 떨어졌다. 실체가 없고 눈에 띄는 발전을 위해 하염없이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공부가 아닌 내 손 모양이 흙에 바로 반영되고 실수해서 다른 방법을 시도하면 곧바로 흙의 즉각적인 피드백이 온다는 점이 후련했다. 물론 도자기도 안 풀리는 날이 있지만, 반복적으로 연습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고칠 점이 명확하게 보인다. 결과와 발전 과정을 내 두 눈으로 확인하고 손으로 만질 수 있게 되니, 오히려 공부나 연구같이 추상적인 활동에 대해서도 투자한 시간과 노력의 힘을 믿고 다시 의욕을 재충전할 수 있었다.
게다가 도예를 배우면 스스로 훈련하는 과정이기에 다른 사람과 비교를 하고 싶어도 비교 대상 자체가 없다. 그냥 자기만의 페이스대로 천천히 발전할 수 있고 느리다고 타박하는 사람도, 내가 느리다고 느끼게 만드는 상대방도 없다. 나도 무의식적인 비교가 없는 게 이렇게 해방감이 클 줄 몰랐다. 마치 한적한 시내에서 따릉이를 탈 때는 바람을 맞으며 행복하게 달리다가 한강 자전거 도로에 진입하는 순간, 동호회의 "지나갈게요!"를 스무 번 들으면 괜히 뒤처지는 기분이 들어 페달을 빨리 밟게 되어 되려 지쳐버리는 듯이, 자신만의 페이스를 존중하는 건 성장을 막는 것이 아닌 덜 조급해지고 더 만족스러운 배움의 과정을 즐기게 해 준다.
돌이켜 보면 도자기를 하면서 깨닫거나 느낀 점들 모두 당연하고 진부한 내용일 수 있다. 굳이 취미생활을 가져야지만 배울 수 있는 점도 아니고 모두가 알고 있는 보편적인 상식일 수도 있다. 나도 지금 와서 보면 ‘남과 비교하지 말고 네 페이스대로 살아라’나 ‘성장은 선형이 아닌 계단식이다’ 같은 건 이미 알고 있던 것들이다. 그래서 이런 생각들이 마치 처음 발견한 것처럼 나에게 강력하고 신선하게 다가온 게 오히려 놀라웠다. 그만큼 내 경험을 통해서 뼈저리게 느끼고 깨닫는 과정이 필수적이란 뜻이다. 그리고 이런 경험은 전공과 전혀 무관한 취미를 가졌을 때 가장 효과적으로 할 수 있다. 학부생으로 내 일상이 된 학업이나 전공 관련 일을 하는 도중에는 기존 생각의 연장선만 느끼게 되지, 벗어나긴 쉽지 않다.
이렇게 평소에 관심 있던 취미를 시작하고 허락된 어설픔 속에서 간간이 나타나는 우연한 발견을 즐겨보는 건 어떨까. 바쁜 일상 속에 한두 시간 정도만 내어보자. 이 또한 진부한 이야기지만, 시작이 반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