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혼주의자는 만들어진다

비혼주의자 탄생비화

by 아가씨


나는 관계망이 좁은 편이다. 아주 가까운 사람들에게 관대한 반면 낯선 사람들에겐 잘 기회를 주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좀 박한 편인 나와 달리 (얼마 전 차단한 카톡 친구가 백 명 가까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함께 사는 뽀는 누구든 그렇게 싫어하지 않는다. 새 사람을 만나는 것도 오히려 좋아한다. 생김새는 고양이 같이 생긴 게 꼭 성향은 강아지 같다. (난 반대다) 나는 뽀의 그런 점을 대단하다고 여겼고 따듯하고 상냥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남자를 만난다고 하면 그 점이 오히려 염려스러웠다. 나는 뽀가 얼마나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사람인지 안다. 하지만 뽀가 만난 남자는... (이후 생략)


그런 뽀에게 최근 남자 친구가 생겼다. 태어난 년도로 따져보면 두 살 연하인 남자다. 아직 실물은 못 봤고, 사진으로만 만났다. 근데 사진으로도 제법 뽀와 잘 어울렸다. 상성이 맞아 보인달까. 뽀는 늘 사람의 장점을 먼저 본다. 그리고 그런 장점이 있는 사람을 힘껏 좋아하게 될 걸 알기 때문에, 나는 늘 뽀가 자기 반만이라도 사랑이 많은 남자를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남자가 그런 모양이다. 맨날 집에 돌아오는 뽀에게 위스키 한 병, 꽃 한 다발, 그리고 내게 들려줄 이야깃거리를 한 아름 안겨주는 거 보면 말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어제 같이 아침 운동을 가려고 준비하는데 뽀가 입을 삐죽거리며 (장난칠 때 이런 표정이 나온다) 그러는 것이다.


- 나 ㅇㅇ이랑 결혼할 거야.


나는 솔직히 조금 당황했지만... 웃어넘겼다. 그리고는 "해봐ㅎㅎ"라고 말했다. ("꼭 해ㅎㅎ"라고도 말하고... "언제 해ㅎㅎ?", "빨리빨리 해 ㅎㅎ"라고도...)


결혼, 그건 이미 20대 초반에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었다. 사랑은 좋다. 지금도 사랑하는 사람과 잘 만나고 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굳이 결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저 언제든 지금처럼 사랑할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것도 없고, 그거야 말로 제일 좋은 거라는 생각이 점점 든다. 그래서 난 사랑과 결혼을 동일시하지도 않고, 결혼을 사랑의 결실이라거나 엔딩이라고도 생각하지도 않았다. 가끔은 오히려 사랑을 방해하는 것 같기도 해서, 만나는 사람과 결혼하는 상상도 자제하려고 한다. (어렸을 땐 중매를 이해 못 했는데, 지금은 애초에 '결혼 상대'를 찾아서 만나는 게 오히려 연애하다 결혼하는 것보다 더 합리적인 것 같다)


대학에서 만난 몇몇 절친한 친구들과 결혼 없는 미래에 대한 상상을 공유해왔다. 꽤 구체적인 상상일 때도 있었지만, 사실 대부분은 정말 ism으로, 목적으로 존재했던 것 같다. 내 안에 의심도 늘 있었다. 친구들과 정말 공동체를 이룰 수 있을까? (그건 결혼보다 더 좋은 게 확실한가!?) 다행히 지금은 다들 자기 방식대로 그 생각과 근접해지고 있지만 말이다.


선언은 했지만 확신은 부족했던 내게 결혼 생각을 확실히 접게 한 건 뽀였다. 뽀와 함께 사는 건 정말 편안했다. 그리고 늘 새롭고 즐거웠다. 우린... 너무 잘 맞는 것이다. 5년을 함께 살면서 한 번 크게 다툰 적도 없다. 기억하기로 빈정이 상한 것이 딱 한 번 있는데, 그때도 각자 방에 문을 닫고 들어갔다가 "잠깐 (따라) 나와..." 하고 금방 풀었다. 이렇게 잘 맞는 상대를 찾으니 저절로 결혼에 대한 생각이 쏙 사라졌다. 언제든 뽀와 이렇게 살 수만 있다면 좋을 것 같았고, 내 유언장을 뽀에게 맡겨도 좋겠단 생각도 들었다. 비혼주의자는 어떤 이상향에 대한 기대보다, 또 수년간의 공부, 그리고 백번의 결심보다 '지금 이 상태로도 좋다...'라는 확신이 있을 때 탄생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하고 있는 일이 잘 풀리면, 차를 사서 파주에 있는 3층짜리 타운하우스로 이사 가자고 진지하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 공용 공간을 넓게 만들고, 한 층씩 나눠 쓰며... 애인도 친구도 데리고 오는 웰커밍 한 집으로 만들자고 말이다. 좀 변태 같지만, 우리 둘 다 내 본가에서 기르는 강아지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함께 강아지를 키우는 상상도 해본 적이 있다. (미래에 가족사진을 찍는 다면 아마 여자 둘에 개 한 마리가 있겠지... 딱 거기까지 생각했다)


하지만 우린 어느덧 30대 초반이고. 결혼 적령기를 지나고 있다. 뽀가 새 사람을 만났기에, 앞으로 생각이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겠다. 사람은 저마다 고유한 세계가 있어서 어떤 사람을 깊이 만나다 보면 내 세계도 반드시 넓어진다. 하지만 세계가 넓어질 땐 반드시 그 경계가 한 번씩 깨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나와 뽀는 지금 서로의 세계를 공유하고 있고, 이 세계 속에서 우리는 비혼주의자로 살 수 있겠다고 확신하지만 앞으론 또 어떻게 될지 모른다. 뽀가 새 남자 친구와 정말로 결혼하는 날이 올 수도 있다. 그래도 뭐... 솔직히 괜찮을 것 같다. 하지만 그것만은 확신할 수 있다... 나랑 살 때보단 재미가 없을 거라고... (눈물 흘리는 거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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