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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도 Sep 13. 2022

달리기와 4유로의 행복


여덟 번째 날


오늘도 새벽 6시 전에 일어나서 반나절 동안 일을 했다. 적은 시간이나마 일을 한다는 건, 일을 하지 않는 시간을 더 매력적으로 만들어준다. 온전히 자유로운 시간을 가질 때와는 다른, 긴장과 이완의 사이에서 오는 행복감이 있다.


이곳의 사람들은 여유롭지만, 게으르지 않다. 새벽 5시면 문을 여는 카페에서 아침을 시작하며 일터로 향하는 동네 사람들을 보지 않았다면 나 역시 몰랐을 것이다. 이 도시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수더분한 근면함.


아홉 번째 날


맛있는 점심 식당을 발견했다. 유대인 쿼터에 있는 아주 작은 가게인데, 매일 바뀌는 메인 파스타가 두 개 있고, 샐러드나 구운 감자 등의 사이드 디쉬를 만들어두고 파는 곳이었다. 골목을 지나가다 사람들이 줄을 서서 먹는 걸 보고, 뭔가 심상찮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안으로 들어가 봤다. 낡고 오래된 내부, 우리가 들어와도 눈길 한번 주지 않는 건조한 태도의 주인아줌마, 그녀 앞의 진열대에는 평범해 보이는 볼로네즈 파스타와 오일 파스타가 있었다. 12시가 조금 지났을 뿐인데 벌써 음식의 2/3 정도가 팔린 것으로 보아 동네에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맛집임이 틀림없다.


우리가 파스타 두 접시를 주문하자, 일회용 접시에 무심하게 음식을 담아 주고는 한 접시당 4유로이고, 돈은 다 먹고 내라고 했다. 밖에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 첫 입을 먹는데, 우와-라는 감탄이 저절로 나왔다. 어쩌면 이렇게 평범하게 생긴 파스타가 이렇게나 조화로운 맛을 내는지, 신선하고 간이 세지 않으면서, 안에 들어있는 재료의 맛이 다 살아 있었다. 한 여행채널에서 유명 셰프가 말했다. 여행을 가면 여행자가 아니라 동네 사람들을 먹이는 식당을 찾아가라고. 거기엔 좀 밋밋해 보이더라도 정직한 정성을 담을 가능성이 크다고. ‘집밥 같다’라는 말이 손님을 유혹하려는 맛이 아니라, 누군가를 잘 먹이고 싶어서 정성 들여 잘 만든 밥이라는 의미라면, 이 집은 백번 천번, 집밥 같은 곳이었다.



열 번째 날


집에서 10분만 걸으면 바다를 끼고 달릴 수 있는 산책로가 나온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곳에서의 첫 달리기를 했다. 그간 탄수화물을 너무 사랑한 대가로 한껏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달리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20분을 채워 달렸다. 옆으로 펼쳐지는 환상적인 뷰를 보면서 달리는 기분은 어떻게 설명할 수 없이 좋았다. 흐드러지게 핀 노란색 들꽃과 햇살이 닿은 바닷물의 표면은 반짝반짝 빛나고, 해안 절벽이 주는 아찔한 아름다움을 감상하며 달렸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사람들이 활짝 웃으며 ‘본 죠르노’하며 인사를 한다. 오전 8시의 산책로는 별로 복잡하지 않았는데, 반 정도는 우리처럼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었지만, 나머지 반 정도는 자전거를 타고 일터나 학교를 향하는 직장인과 학생들이었다. 이런 뷰를 일상의 배경으로 가진 사람들이 부러웠다.


러닝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베이커리를 발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진한 버터향의 갓 구운 베이커리 냄새를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원래 다 먹으려고 뛰는 거 아닌가. 안으로 들어가니 우리가 달린 바닷가의 해안 절벽을 감상할 수 있는 야외 테라스가 있었다. 동네 아줌마들이 수다에 열을 올리고, 중고등학생으로 보이는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있고, 할아버지와 손자까지 모인 가족도 보였다. 마치 동네 사랑방처럼 다들 이야기하느라 정신이 없다. 이들을 보면서 사람과 사람간의 교류라는 것이 서로의 마음을 소통하는 즐거운 것일 수도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회사에 다니며 바쁘게 살았던 지난 시간의 나에겐 사람들과의 만남은 종종 피하고 싶고, 성가신 것이기도 했었는데.


신기한 건 누구 하나 핸드폰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사람이 없다는 것. 나도 덩달아 핸드폰을 넣어두고, 그저 사람들을 구경하고, 햇살을 쬐고, 풍경을 가만히 바라봤다. 아무것도 안 하고 한참을 가만히 앉아있는 일은 이곳에서 와서 잘하게 된 것 중에 하나이다.


시간이 지나도 이 다정한 소란스러움이 그리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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