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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도 Sep 18. 2022

시칠리아의 멍때리기 달인들

아침에 눈을 떴는데 컨디션이 별로 좋지가 않다. 평소 대부분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일주일에 2-3일 정도만 외부 활동을 몰아서 하는 나 같은 집순이에게 매일 밖으로 나갔던 지난 몇 주간이 버거웠나보다. 더 이상은 무리라고 내 몸이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오늘은 휴식의 날로 정했다. 집 밖에 나가지 않고 침대에 누워서 뒹굴뒹굴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뭔가 마음이 불편하다. 침대에 누워있는데도 뭔가 마음 한구석이 불안했다. ‘여행하러 왔는데 뭐 하는 거야. 방에 누워있는 건 집에서도 질리도록 해왔잖아.’ 하고 스스로를 꾸짖는 것 같다. 쉬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들었다. 느리게 천천히 이 도시를 여행하기로 해놓고도, 나는 지금 내가 이 여행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묻고 있다. 이놈의 ‘최선’에 대한 강박. 이런 망할 성실함.


이 불편함은 퇴사 후에 느꼈던 불안과 닮아있다는 생각을 했다.


퇴사를 하기 전에는, 회사를 가지 않아도 되면 이제껏 못했던 것들을 실컷 하면서, 아주 맘 편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낼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퇴사를 하고서 생각처럼 신나게 놀 수 없고, 마음이 불편했다.


나는 회사를 가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만끽하기는커녕, 혼자서 길을 잃은 느낌이었다. 무언가 상당히 잘못되었고, 내가 무언가를 잘못하고 있는데 그게 뭔지 잘 모르겠는, 이상한 불안감에 떨었다. 그런 생각이 들면 하루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채 불안하기만 하다가 끝나버렸다.


그러다 보니 퇴사 후의 삶은 내 안의 불안을 들여다보는 일에 많은 시간을 썼다. 그리고 그것이 ‘최선’에 대한 강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항상 무엇이든 열심히, 최선을 다하며 살아야 한다고 들어왔다. 그게 학생 때는 공부였고, 졸업한 이후에는 회사에서 하는 노동이었다. 그러다 보니 무언가를 열심히 하지 않는 시간은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 누가 뭐라 하지 않더라도 죄책감이 드는 것이다.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한 사회의 의견을 내면화한 결과였다.


오늘 결국 집 밖으로 한 발짝도 안 나가고, 뒹굴뒹굴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이루지 못하고, 오후에 집을 나서 집 앞 커피숍에 갔다. 지난 2주의 경험상 대체로 무슨 문제가 있든 밖에 나가서 햇볕을 쬐면 좀 나아졌다. 시칠리아의 햇살에는 그런 묘한 치유력이 있다. 햇살을 받고 앉아있으면, 따스함이 기분 좋게 온 몸에 퍼지면서, 불편한 마음이 조금 수그러들었다. 크게 보면 내 문제가 별것도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들면서.


커피숍에 도착하니 늘 보던 익숙한 얼굴들이 보인다. 20대로 보이는 한 남자는 오후에 늘 이곳에서 맥주를 마셨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병. 그걸 다 마시면 그냥 앉아 있는다. 주변에 아는 사람이 지나가면 반갑게 잠깐 대화를 나누지만, 곧 다시 자리에 앉아 멍하니 있는다. 옆자리엔 80대로 보이는 할머니 할아버지 커플이 있다. 그들은 커피 한잔을 마시고 나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심지어 서로 대화를 하지도 않고 그냥 앉아있다. 다들 가만히 앉아서 멍 때리기의 달인들이다.


지루해 보이지도 않고, 편안해 보인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 상태가, 다른 무언가를 하는 일의 대안이 아니라, 그 자체로 만족스러운 행위인 것 같다.


이곳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무슨 의미이길래 이렇게 당연한 듯이 편안할 수 있을까. 적어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생산적이고, 의미 있는 시간’의 반대말을 아니라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그들에게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은 적극적으로, 즐겁게 하는 무엇인 것도 같다. 알다시피 그들은 그게 먹는 일이 되었든, 사람들과의 대화가 되었든, 지금의 즐거움을 확실히 챙기는 시칠리아인들이니까 말이다.


노토를 떠난지 한참이 지난 지금에서야 나는 묻는다. 왜 노토 사람들은 그토록 먹는 문제에 진지해진 것일까. 혹시 그것은 그들이 삼백 년 전의 대지진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후손이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사하라의 열풍이 불어오는 뜨거운 광장에서 달콤한 피스타치오 아이스크림을 먹는 즐거움을 왜 훗날로 미뤄야 한단 말인가? 죽음이 내일 방문을 노크할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와 현재를 즐기라는 카르페 디엠은 어쩌면 같은 말일지도 모른다.

김영하 <오래 준비해온 대답>


김영하는 <오래 준비해온 대답>에서 시칠리아의 도시 노토를 여행하고, 그들이 지금 당장의 즐거움을 취하는데 진지한 이유는, 대지진을 경험한 후손이기 때문이라고. 그들은 늘 죽음을 가까이 두고 있어서, 진지하게 현재를 즐긴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서로 다른 질문을 하면서 살고 있는 걸까. 나는 강박적으로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지금 즐거운 상태인지. 그 즐거움은 어디에 있는지. 지금의 즐거움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 묻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멍 때리기 프로같은 그들을 경외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안 한다’는 말은 어폐가 있다. 그들은 그저 생산적이거나, 돈을 버는 일을 안 할 뿐이지, 정말로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아니다. 이 시간은 어떤 의미도 될 수 있다 - 눈앞의 풍경을 감상하며 내면세계를 고양하는 것일 수도, 혹은 머릿속으로 철학적인 고민을 하는 것일 수도, 그게 아니더라도, 그저 잔잔히 여유를 즐기는 시간일 수도 있다. ‘생산적’이라는 굴레를 벗어나면, 많은 일들이 의미가 있다.


불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런 시간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생각해보아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꼭 퇴직이나 퇴사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비어있는 시간을 경험하게 된다. 그 시간을 잘 보내려면 뭔가를 하지 않으면 나태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문득 이곳에 이렇게 오래 머무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많아서 다행이다. 아무 의문 없이 회사에 가고, 월급을 받고, 무의식적으로 내 가치를 그 돈과 연결 지어 만족을 느끼며 살았던 삶보다, 지금 이렇게 멈춰 서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의 의미를 깊이 들여다보는 지금이 나에겐 더 중요하게 느껴진다.


이렇게 시칠리아의 멍 때리기 달인들에게 비어있는 시간의 의미를 배워간다. 있는 그대로의 현재를 즐길 줄 아는 그들을 보며, 따라 하고 싶은 것들이 하나씩 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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