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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도 Sep 21. 2022

시칠리아 시장에서 장보기


일요일 아침, 창밖으로 들리는 부산스러운 소리에 눈을 떴다. 우리 아파트  광장에서는 일요일마다 장이 선다. 6시가 되기도 전에 상인들이 물건을 나르고 장사 준비를 시작하고, 7시가 되면 이미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어 문전성시를 이룬다.  로컬 시장은 마치 어릴  시골 할머니 집에서   같은 그런 정겨운 모습이다. 싱싱한 과일과 야채를 늘어놓고  소리로 호객하는 과일 장사, , 신발, 손톱깎이, 도마, 행주 등등 잡동사니를 주렁주렁 매달아 놓고 파는 상인들의 모습에서 왠지 익숙한 정겨움이 느껴졌다.


1780년 괴테가 이탈리아 전역을 여행한 기록을 담은 <이탈리아 기행>에 묘사한 그때의 장날의 모습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아서 웃음이 난다.


장날이면 광장에 야채와 과일들이 산더미처럼 가득하고, 마늘과 양파들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다. 게다가 사람들은 하루 종일 소리 지르고 노닥거리고 노래 부르다가, 뭔가 던지고 서로 맞잡고 싸우고 환호성 지르고 끊임없이 웃어댄다. 공기가 온화하고 음식물 값이 싸서 살아가기가 수월하다.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이 자유로운 하늘 아래 있다.

<이탈리아 기행> 요한 볼프강 괴테


이탈리아에서 처음으로 가본 시장은 로마의 유명한 노천 시장, 캄포 데 피오리 Campo de’Fiori였다. 그때 이탈리아 친구는 이탈리아 시장에는 보이지 않는 룰이 많으니 조심하라며 두 가지 팁을 주었다. 한 가지는, 과일 가게에서 사기 전에 먼저 과일을 만져보면 안 된다는 것. 여기서는 손님이 과일을 만져보고 고르는 것이 아니라, 주인에게 사고 싶은 과일을 말하면, 주인이 봉지에 담아주는 방식이라고 했다. 손님이 멋대로 만져보면 과일이 상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허락 없이 만지면 쓴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두 번째 팁은, 사람이 많은 가게에서는 먼저 온 순서를 잘 기억할 것.이탈리아 사람들은 주문을 기다릴 때 우리처럼 일렬로 줄을 서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 순서를 파악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가게에 도착하면 기다리는 사람들을 잘 살펴보고, 내가 몇 번째 순서에 주문 할 수 있는지 알아두라고 했다.


시장에서 과일 하나 사는데도 이런 룰이 있다니, 신기하면서도 동시에 걱정이 되는 것이었다. 싱싱하고 아름다운 과일을 눈앞에 두고, 자연스럽게 손이 가서 만져보면 어떡하지 (이후에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그리고 사람들로 붐비는 가게 앞에서는 누가 먼저 왔는지, 잘 기억이 안나면 어떡하지(이건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이곳 동네 시장에 처음 왔던 날, 나는 시장의 활기에 신이 나서 돌아다니며 구경했다.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상인들의 힘찬 호객 소리, 흥정하는 손님, 동네 사람들끼리 반갑게 인사하는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그러다 내 발길은 색색깔의 싱싱한 과일 가게 앞에서 멈춰 섰다. 늦봄과 초여름의 제철을 맞은 에트나 지역 사과, 오렌지, 체리, 그리고 첫물로 나온 복숭아가 있었다. 아마 30분도 채 걸리지 않는 주변 농장에서 갓 수확해 왔을 작물들의 싱그러움이 전해졌다. 나도 모르게 복숭아를 하나 집어 코로 가져가 냄새를 맡았다.


순간적으로 나도 아차, 했고, 옆에 있던 남편은 놀래서 ‘헉, 너 뭐 하는 거야’ 하는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다른 손님을 상대하던 주인은 그런 나를 보고는 저벅저벅 걸어왔다. 아, 큰일 났다, 하고 혼날 준비를 하고 있는데, 주인아저씨는 갑자기 활짝 웃는 얼굴을 하더니 “어때, 냄새 좋지? 한번 먹어볼래?” 하고 시식까지 권하는 게 아닌가. 마치, 자신의 과일에 감탄을 하는 외국인의 존재가 자랑스럽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알게 되었다. 이곳에는 로마에서의 까다로운 룰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게마다 달랐지만, 대체로 과일을 사려고 하면 주인이 봉지를 나에게 건네주고, 내가 원하는 과일을 골라 담을 수 있었다. 특히나 과일, 치즈나 견과류 등 먹을거리를 구경을 하고 있으면, 주인들은 언제나 인심 좋게 시식을 권했다. 살 생각이 없어서 괜찮다고 하는데도, 덥석 내 손에 쥐어주는 경우도 있었다.


한 번은 견과류 집에서 피스타치오를 사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7-8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가게의 견과류 통을 지나가면서, 그 안에 있는 넛츠를 하나씩 집어 먹고 있었다. 그렇게 한 바퀴 돌고 나서 만족스러운 얼굴로 다시 견과류 통으로 손을 뻣으려는데, 그때 그제서야 이를 본 아이의 아빠가 아이의 손을 찰싹-하고 때렸다. “돈도 안 내고 그렇게 집어 먹으면 어떻게 해! 먹고 싶으면 돈을 내고 사 먹어야지!”라며 혼을 낸다. “더 먹고 싶어?”하고 아이에게 묻자, 아이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본 주인아저씨는 봉지에 한주먹만큼의 넛츠를 담아 아이에게 건넸다. “얼마예요?”라고 묻는 아이 아빠에게 주인아저씨는 무심하게, 괜찮아요- 하고는, 아이를 향해 귀엽다는 듯이 윙크를 했다.



이곳에서 장을 보는 일은, 시칠리아에서의 많은 것들이 그렇듯, 느긋함이 필요한 일이다. 사람들로 붐비는 가게에서 장을 볼 때 특히 그렇다. 도착한 순서대로 주인의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데,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뒤에 기다리고 있어도, 주인은 손님의 주문을 받을 때 서두르거나 재촉하지 않았다. 손님은 하나씩 묻고 확인해가면서 물건을 사고(이 토마토는 어때요? 이 사과 중에 어떤 것이 달죠? 복숭아는 언제쯤 나올 예정이에요?), 그러고 나서는 흥정까지 한다 (에구, 많이 샀으니까 사과 두어 개 더 끼워줘요). 이런 대화가 오갈 때 뒤에서 기다리는 사람들 중 어느 하나 '아, 거 좀 빨리빨리 좀 하지-'하는 얼굴의 사람들이 없다.


그들은 분명 이런 기다림의 시간이 당연하다고 여기며 살아왔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들이 기다리는 일에 너그러운 이유는 우리 동네에 유독 마음이 넓은 사람들이 많이 살아서가 아니라, 이들은 누구든 재촉받지 않고 물건을 고르고, 궁금한 것을 묻는 시간이 당연히 주어져야 한다고 믿으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이런 공동의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가능한 광경을 보면서 나는 내 장보기를 되돌아봤다.


동네 마트에서 줄을 서서 계산을 기다릴 때 나는 종종 마음이 불편했다. 계산대에서 남들보다 시간이 지체되는 사람이 있으면, 줄을 선 무리 어딘가에서  짜증 섞인 한숨이 들려왔다. 암묵적인 비난이었다. 그래서 나는 혹시라도 물건 가격이 잘 못 찍혀도, 뒤에 기다리는 사람들의 눈치가 보여 그냥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넘어가곤 했다. 우리에게 마트에서 기다리는 일은 당연한 일이 아니었고, 앞에 사람에 의해 지체되는 시간은 곧 내 시간의 낭비라고 여겨졌다. 그 대안으로 나는 종종 온라인으로 장을 본다. 클릭 한번으로 누구 하나 대면하지 않고도, 오렌지와 사과를 내 주방으로 들일 수 있다. 쉽고 편리하다.


하지만 시칠리아에서의 전통적인 장보기를 경험하면서 이것이 덜 편리할지라도, 더 로맨틱하다고 느껴졌다. 파는 사람과의 교류 사이에서 좋은 음식 재료를 발견하고, 제철 과일을 만나며 계절의 변화를 피부로 느끼고, 함께 장을 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공동체를 몸소 느끼는 것. 느긋하게 기다리면서 서로의 차례를 존중하는 사람들과 시장 상인들의 푸근한 인심. 그들은 마치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타인에 대한 연민이 살아 있는 도시는 좀 더 살만한 곳이 된다는 사실 말이다.


다가오는 일요일에도 동네 사람들은 어김없이 이곳에 모여 시끌벅적하게 장을 보겠지. 나는 여기서 내 인생 최고로 맛있는 토마토와 복숭아를 만났다. 지중해의 햇살을 받으며 착실하게 영근 복숭아를 한입 베어 물자 달콤한 과즙이 입안 가득 흘러나왔다. 아,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달큰한 복숭아를 입에 물고 느릿느릿 시장을 구경하고 싶어진다. 따뜻한 정겨움이 살아있는 이들의 삶이 조금 샘나게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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