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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도 Oct 23. 2022

자동차 대신 당나귀를 타는 그리스 마을

이드라 Hydra 섬의 풍경


여름에 그리스 섬을 여행한다면, 숙소를 정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낮시간 동안(적어도 12시부터 4시까지) 작열하는 햇살을 피해 집안에서 시간을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여름의 지중해를 방문해서 한낮의 타들어가는 더위를 경험하면 알게 된다. ‘시에스타’라는 개념은 게으른 삶의 방식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필요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그들은 아침 일찍 하루를 열고 아침에 해야 할 일들을 하고, 오후에는 실내에 머무른다. 낮잠을 자거나, 휴식을 취한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한낮의 뜨거움이 물러간 뒤의 선선한 공기를 즐기며 늦도록 야외에서 시간을 보낸다.


지금껏 머무른 곳 중에서 가장 좋아했던 숙소는 이드라 Hydra섬의 언덕 위의 집이었다. 이드라는 작은 섬으로 차나 오토바이 같은 교통수단을 일절 사용하지 않고, 당나귀를 이용하며 옛날 방식으로 살아가는 섬으로 유명하다. 해변에서부터 언덕을 따라 동네가 형성되어 있는데, 우리는 그 언덕의 중턱쯤에 있는 가정집을 일주일간 빌렸다.


아테네에서 쾌속 페리를 타고 1시간 반을 달려 이드라에 도착했을 때, 선착장에서 호스트 아저씨는 당나귀 ‘페넬로피’와 함께 우리를 맞아주었다. 당나귀를 그렇게 가까이서 본 것은 처음이었는데, 이상한 일이지만 뭔가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나는 한눈에 페넬로피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5살이라는 페넬로피는 당나귀로서는 어엿한 숙녀의 나이였는데, 정말이지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강아지에게 다양한 표정이 있는 것처럼, 그녀도 다양한 표정을 갖고 있었고, 처음에는 조금 낯을 가리고 쑥스러워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제법 가까워져서 내가 가까이 가면 내 품으로 머리를 들이밀며 포옥 안겨들곤 했다.



우리가 갖고 온 캐리어 가방 두 개를 보더니, 호스트 아저씨는 덥석 우리의 가방을 받아 들어 능숙하게 페넬로피의 등에 있는 밧줄에 고정을 시켜 가방을 묶었다. 하나에 17킬로쯤 되는 무거운 가방이라 미안하고 걱정스러운 눈빛을 하자 호스트 아저씨는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보통 당나귀들은 20킬로의 곡물 가마니 두어 개는 거뜬히 메고 걷는다고 했다. 집까지 올라가는 10여분 동안 우리 옆으로 짐을 실어 나르는 당나귀들이 스쳐 지나갔다. 우리 반대편에서 내려오는 한 당나귀는 임무를 다 하고 홀가분한듯한 얼굴로 내려온다.


호스트 아저씨는 연신 동네 사람들과 ‘어이’하고 친근하게 인사를 했다. 페넬로피가 올라가다 조금 밍기적 거리는 발걸음을 하면 아저씨는 “아이, 아이, 페넬로피이!” 하고는 엉덩이를 살짝 찰싹 두드리고, 그러면 페넬로피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 속도를 올렸다.



요리조리 난 좁은 골목을 따라 걸어 올라 드디어 집에 도착했다. 대문에서부터 너무도 예쁜 색감이 눈에 들어왔다. 햇볕에 바랜 회색빛 돌담에, 초록색 대문, 벽을 따라 주렁주렁 늘어뜨러진 오렌지색 꽃과 덩굴이 보인다. 대문을 열면 차양막이 드리워진 널찍한 마당이 나온다. 한쪽으로는 풍성한 레몬나무가 늘어서서 하루의 몇 시간쯤은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줄 것 같다.


예쁜 테이블보가 깔린 야외 테이블을 지나 집 안으로 들어가면, 그리스식 주방이 가장 먼저 보인다. 빈티지 그린 색의 찬장 위에는 그리스식 전통 그릇과 물병이 장식되어있다. 집 내부에는 최소한의 창문만을 내어서인지 신기하게도 한낮에도 실내는 서늘했다. 그래서 40도를 웃도는 뜨거운 날에도 집안에서는 편히 지낼 수 있었다.


주방 옆 거실의 테이블에 앉으면 앞마당을 향해 난 창이 보인다. 나는 하루의 반나절을 주로 이곳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레몬 트리 잎이 하나 둘 흩날리고, 동네의 길고양이가 종종걸음으로 지나가고, 한 번씩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는 빨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온 세상이 평화롭게 느껴졌다.



집의 뒤편에는 뒷마당으로 연결되는 문이 나오는데, 그곳이 페넬로피가 오전 밭일을 끝내고 오후의 시간을 보내는 곳이었다.


페넬로피는 어떤 일을 하나요,라고 물었더니 주인아저씨가 그녀의 하루 일과를 말해주었다. 오전 6시면 아저씨와 함께 올리브 밭에 가서 일을 하고, 더워지기 시작하는 12시가 되면, 함께 집으로 돌아와서 밥을 먹고 그늘에서 좀 쉬고, 오후 4시쯤 되면 근처 풀밭에 풀어놓는다고 했다. 그러면 뛰어 놀만큼 놀다가 저녁에 돌아온다고 했다. 근무 시간이 합리적이네요, 하고 웃었더니, 섬사람들에게 당나귀는 일꾼이자 가족이에요,라고 당연하다는 듯 답한다.


이드라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섬이지만, 돌아보면 나는 이 집안에서 보낸 시간을 조금 더 좋아했던 것 같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언덕을 내려가서 수영을 하고, 돌아와서 앞마당의 테이블에서 아침을 먹었다. 수영으로 노곤해진 몸이 햇살 아래에서 마음껏 늘어질 수 있었다.


거실에서 오후에 느릿한 시간을 보내다가 늦은 오후가 되면 마당에서 어둑어둑 해가 지는 풍경을 구경했다. 어떤 저녁에는 간단하게 야채 몇 가지를 사 와서, 주인아저씨가 주고 간 직접 만든 올리브유에 마당에서 가져온 레몬을 뿌리고, 페타 치즈를 곁들여 그리스식 샐러드를 해 먹었다.



어떤 저녁에는 해변으로 내려가 밥을 먹고, 바다 앞에서 젤라또를 먹거나 와인을 홀짝이며 평화롭게 잠든 바다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먼 북소리>에서 여름의 그리스 해변에서의 시간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라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수영을 하고 해변에서 누워있다 보면, 눈 깜짝할 사이에 한 두 달이 지나있다고 말이다. 몇 번의 그리스 여행을 하며, 나도 그 말에 완전히 동감한다.


다른 도시에서는 하루에 한 페이지도 넘는 일기를 쓰지만, 그리스 섬에서 나의 일기는 일주일이 지나도 한 장을 넘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기록할 만큼 많은 일이 일어나지도 않고, 그저 하루의 해를 따라 해변과 집을 오가며, 중간중간 말없이 바다를 바라보는 일만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의 말처럼 가장 영구적인 쾌락은 종종 가장 단순한 것에서 비롯되는 것 같기도 하다. 그저 주변 세계의 아름다움에 완전히 몰입해서 경험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스 섬에서는 가득 채우지 않은, 단순한 일상에서 행복할 수 있다는 걸 배운다.


이드라 섬에는 아름다운 해변과 눈부신 풍경이 있다. 하지만 그곳에 젖어들어 살아보면, 화려한 아름다움 뒤에는 세상의 복잡한 뉴스, 정치적 문제와는 상관없이 천천히 느리게 흐르는 시간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 정적인 시간에 몰입하는 경험만큼 만족스러운 경험을 나는 알지 못한다. 레몬 나무가 있는 언덕 위의 집, 그 소박한 공간에서 보낸 느린 시간을 나는 아직도 종종 그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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