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안방 옆에 연결된 정원으로 나가서 호스로 정원의 식물에 물을 주는 일이다. 집주인이 집을 넘겨주면서 이틀에 한 번쯤 물을 뿌려달라고 부탁했다. 아침의 건조한 공기 속에서 식물 잎사귀에서 메마름이 느껴진다. 호스에 물을 틀어 물줄기를 흩뿌리면 초록색 생명체들이 왠지 반가워하는 것 같고, 고마워하는 것만 같다.
아침은 이곳에서 시간을 보낸다. 차양막이 햇살을 막아주고, 공기는 아직 시원하다. 기분이 좋은 시간이다. 세이지나 마운틴 티를 내리고(그리스 사람들이 마시는 허브차인데 녹차보다 덜 쓰고 구수한 맛이 난다), 며칠 전 시장에서 사 온 것들로 간단하게 아침을 차린다. 엄청 달큰한 멜론에, 귀니에르 치즈에 크레탄 허니를 뿌리고, 오이나 토마토를 곁들인 다음에 마지막으로 계란 하나 추가. 어떤 날은 아침 일찍 수영을 갔다가 집 앞 베이커리에서 빵을 사서 곁들이기도 했다.
정원의 긴 테이블에 앉아 책을 펼쳤다. 버지니아 울프의 에세이 모음집 <존재의 순간들>을 읽고 있다. 그녀의 글은 분노를 머금고 있을때 더 명확해지고, 폭발적으로 다가온다. 그녀가 아버지와 오빠들과 함께 살면서 집안의 살림을 꾸리고 개인적인 독자로서만 존재하다가, 케임브리지와 런던의 지식인들의 모임인 ‘블룸스버리 Bloomsbury’를 만들어 활동하며, 자연스럽게 작가로서의 삶을 살게 되는 시기의 글이 인상적이었다.
나로서는 토론의 각 단계, 심지어 반 단계에까지 그렇게 집중하여 귀 기울여 보기는 처음이었다. 나 자신의 작은 화살을 가다듬어 날리는 데 그렇게 공들여 보기도 처음이었다. 그러다 내 기여가 받아들여질 때의 기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p160
논쟁은 분위기에 관한 것이든 진리의 본질에 관한 것이든 간에 항상 좌중의 한복판으로 던져졌다. 호트리가 한마디 하면, 버네사가 받고, 색슨이 받고, 클라이브가 받고, 토비가 받았다. 조심스럽게, 정확하게, 돌 위에 돌을 쌓아 올리듯 끝까지 논쟁 가운데 남아 있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것이 내게는 경이로운 일이었다. p161
그것은 암암리에 안심이 되는 것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생이 그런식으로, 만찬을 위해 차려입을 필요 없이, 추상적인 논쟁 가운데 흘러갈 수도 있음을, 내가 그토록 혐오했던 하이드파크 게이트 방식으로 결코 돌아가지 않을 수 있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p168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지금을 표현하는 문장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내가 밑줄을 그은 문장에는 그녀의 삶을 제약하는 것들과 그것을 벗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한 순간이 그려진다. 명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어도 한줌의 희망이 희미하게 떠오르는 순간.
다음에는 집 근처 커피숍으로 향했다. 크레타에서 지내는 일이 시칠리아보다 실질적으로 더 편하고 쉬운 점들이 있다. 우선 이곳에는 편하게 앉아서 일하기 좋은 카페가 너무너무 많다. 가보고 싶은 곳이 너무 많아서 매번 어디로 갈지 결정하기가 난감할 정도로. 공간의 영향을 많이 받는 나에게는 여기가 천국같다.
여름에 그리스에 온다면 프레도 에스프레소 Freddo Espresso나 프레도 카푸치노 Freddo Cappuccino를 먹어봐야 한다. 각각 아이스 아메리카와 아이스 카푸치노와 비슷한데 물과 우유의 용량이 적고, 진하게 농축된 그리스식 커피로 만들어진다. 로컬 사람들은 여기에 설탕을 넣어서 조금 달달하게 마신다. 쓰고, 달달하고, 시원해지는 그리스 여름의 맛이다.
저녁에는 어제 갔던 데멕이라는 와인바를 다시 갔다. 해변을 따라 야외 테이블이 늘어놓은 곳인데, 해변의 끝자락에 있어서인지 의외로 우리 같은 여행객은 별로 없고,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커피를 마시거나 술을 한잔하는 분위기였다(그렇다. 그리스 사람들의 커피 사랑은 정말 대단해서, 늦은 저녁에도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다.) 배가 별로 고프지 않아서 간단한 메뉴를 몇 개 시켜서 저녁으로 먹기로 했다. 페타 치즈를 넣은 그릭 샐러드와 다코스(러스크 브레드 위에 다진 토마토와 소프트 치즈를 올린 애피타이저)를 주문했다. 웨이터는 어제에 이어 다시 온 우리를 알아보고, 하우스 와인을 주문한 우리에게 와인잔이 넘치도록 가득 따라주었다.
넘치게 가득 찬 와인 잔, 그 너머로 보이는 바다, 붉게 물들어가는 노을, 해변의 프롬나드를 걷는 사람들에게서 풍기는 활기찬 에너지. 왠지 멀리서 찾은 내 보금자리같은 느낌이다.
여기다, 라는 느낌이 오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거기다 싸고 맛있는 와인까지 있으니 더 바랄 것이 없다. 이날 밤 우리는 사흘 뒤에 이곳을 떠나야 한다면 그건 너무 가혹한 일이 될 거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지내기 괜찮아요?” 에어비앤비 주인이 안부차 연락이 왔다.
“문제가 있어요.”
“무슨 일이에요?”
“여기가 너무 좋아요. 아직 떠날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렇게 우리는 일주일 더 숙소를 연장했다. 그다음은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했다. 이곳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말자, 그냥 그때그때 떠오르는 것들을 하자라고 생각했다. 아침에는 수영을 하고, 정원에서 아침을 먹고, 커피숍에 가고, 저녁에는 데멕에서 와인을 마신다. 그것을 골자로 하는 일상이었다. 매일매일 우리는 죄책감도 없이 이런 즐거움을 누렸다.
크레타의 이 작은 도시에는 그런 기운이 있었다. 몸속 세포까지 긴장이 다 풀리고, 느릿느릿 움직이다가, 꾸벅꾸벅 졸게 되는 편안함. 원래 느리고 게으른 여행을 하는 나이지만 그래도 여행이란 어떤 내면의 확장을 추구해야 한다라고 생각해왔던 나에게, 이렇게 단순한 즐거움에 머물러있는 여행은 새로웠다. 심플한 루틴이 주는 건강함을 느꼈다. 가만히 바다를 바라보는 시간이 마음을 청소하는 시간이라는 걸 배웠다.
그래서인지 책 한 권도 마저 읽지 못하고, 일기도 거의 쓰지 않을만큼 도무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시간이었는데도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정말 좋았다’라고 꼽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결국 여행이란 그때에 필요한 자기만의 천국을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