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시 40분쯤 해변에 도착했다. 평소보다 조금 더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아직까지 한산하다. 벽에 걸려있는 가방은 10개쯤. 그 말은 물에 있는 사람도 10명 정도라는 의미다. 여기는 파도가 갑자기 거세게 변해서 모래사장 깊숙이까지 들어오는 경우가 있어서 사람들은 수영하기 전에 벽에 가방을 걸어둔다.
아직 바람이 차서 물에 들어가려면 예열이 필요할 것 같다. 모래사장에 블랭킷을 깔고 앉아 햇살을 쬐며 책을 조금 읽었다. 이때 뒤이어 도착한 롤라 할머니는 물이 아직 차가운데도 개의치 않고 한 번에 물속으로 들어가더니, 능숙하게 수영을 해서 금세 아주 먼 곳까지 가 곧 내 시야를 벗어났다.
롤라 할머니는 아주 귀여운 강아지 롤라를 데리고 매일 아침에 수영을 하러 온다. 할머니가 수영을 하러 들어갔을 때 강아지랑 놀아주다가 친해지게 되었다. 어느 날 내가 “이 해변에는 할머니들이 많이 오시네요.”라고 했더니, “젊은 사람들이야 다 일하러 갔겠지.”라고 했다. “그럼 할아버지들은요?”라고 묻자 “게을러서 그렇지 뭐.”라고 시원하게 답을 해주었다.
이곳에서는 수영을 하는 할머니들에게서 고수의 기운이 느껴진다. 할머니들을 보고 있자면 이들이 바다 수영을 얼마나 쉬운 것처럼 보이게 하는지 감탄하게 된다. 까마득하게 아주 멀리서 장거리 수영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고, 물에 둥둥 떠서 동네 반상회라도 하듯 삼삼오오 모여서 수다를 떨기도 한다.
반면에 나는 수영을 하는 모든 과정에 서툴다. 해변에 도착해서 입수를 하는 데까지 최소한 30분의 시간은 필요하다. 처음엔 차가운 바닷물을 대면하기 위한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모래사장에서 한참을 서성인다. 그다음엔 얕은 물가에서 몸을 반만 담그고 몸이 물의 온도에 적응하도록 기다렸다가 용기를 내서 한 번에 물에 입수한다. 처음 1분은 견디는 시간이다. 온몸이 오들오들 떨릴 만큼 추운데, 조금 지나면 물이 미지근해지고 조금 더 지나면 따스하게 느껴진다. 물이 다정하게 몸을 감싸는 느낌이 들면, 이제야 물을 즐길 준비가 된다.
얼마 전에는 파도가 엄청 세서 물에 떠있는 내내 물살이 얼굴을 내리쳤다(속된 말로 싸대기를 맞는다는 느낌). 물살이 뒤통수로 내리치고, 옆으로도 맞고, 얼굴 정면으로 파도가 덮치기도 했다. 바다수영의 하수인 나에게 이런 상황에서 물 위에 떠 있는 건 생존을 위한 발버둥이 된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수영을 하나 하고 주변을 둘러보다 보니 하수와 고수의 차이가 대번에 드러났다. 나 같은 하수는 파도에 겁먹고 긴장해서 몸이 경직되면서 물에 떠있는 일이 더 어려워지는데, 고수는 오히려 몸에 힘을 빼고 파도에 몸을 아예 맡겨버려서, 힘들이지 않고 파도에 휩쓸려 이리저리로 떠다니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마치 놀이공원에서 놀이기구를 타듯 거센 파도를 즐기고 있다.
계속해서 파도를 맞으며 눈이 따가워서 눈물이 나고, 물을 먹어서 속도 안 좋은데, 수영을 잘하는 남편은 얄밉게 옆에서 대자로 누워서 여유롭게 물에 둥둥 떠있다. 허우적거리는 나를 보다 못한 그가 한마디 했다.
“그러지 말고, 힘을 빼봐”
“그건 어떻게 하는 거야?”하고 물었더니 “그냥 몸에 힘을 빼고 누우면 돼.” 했다.
“말이야 쉽지. 무섭잖아. 귀에 물들어가는 느낌. 자칫하면 빠질 것 같은 느낌.”
“그게 중요한 거야. 그냥 믿어야 돼. 물에 빠지지 않을 거라는 거. 그렇게 믿어야 몸에 힘을 뺄 수 있어.”
그렇구나. 힘 빼는 기술은 괜찮을 거라고 믿는데서 시작하는 거구나. 뭐, 그래도 말처럼 쉽지가 않다.
꿀렁꿀렁이는 파도에 떠밀려다니다가 어지러워져서, 결국은 물가로 나왔다. 아직도 많은 할머니들이 수영을 하며 파도를 즐기고 있다. 물에서 자유로운 이들이 부럽다.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물속에서 존재할 수 있는 그들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예전에 내 삶의 반경에서 내가 부러워한 사람들은 공부를 잘하거나, 회사에서 처세술이 뛰어나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잘 관리하는 사람들이었다. 혹은 투자를 잘해서 재산증식을 잘하는 사람도 그렇고.
요즘 내가 존경심을 느끼는 일들은 완전히 결이 달라졌다. 일상이라는 필드에서 뛰어난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일상에서 나보다 훨씬 단단한 사람들이다. 바다에서 자유자재로 헤엄치는 그리스 할머니들이 그렇고, 유럽 도시에서 만난 무심하게 한손으로도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 동남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쌩쌩 달리는 차들 가운데서 쫄지 않고 오토바이를 타는 어른스러운 청소년들도 그렇다.
회사나 학교에서는 앞으로 벌어질 수 있는 수만 가지를 미리 걱정하는 것이 도움이 되었다. 겁이 많아서 몸을 사리고, 더 열심히 하고, 더 찬찬히 준비하는 것은 좋은 것이었다. 걱정이나 패닉이 나의 성공의 동력이었던 셈이다.
이들에게는 나에게 없는 바로 그 대담한 기운이 있다. 미리 걱정해서 뭐해, 닥치면 다 하게 되어있어. 그런 태도.
일상의 고수들은 내가 학교나 회사에서 본 성공만큼이나 대단한 것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책이나 이론이 아니라, 삶에서 몸으로 부딪혀 생긴 감각을 갈고닦아야 알 수 있는 것들이다. 학교와 회사를 벗어나 보니 그런 것들이 보인다. 일상의 하수인 나는 그들에 비하면 한참 아마추어일 뿐이라고, 갈길이 멀다고. 수영의 고수인 그리스 할머니들을 보면서 괜히 겸허해졌다. 수영에 힘을 빼는 기술이 필요한 것처럼, 인생에서도 몸에 힘을 빼고 살아야 하는 시간이 분명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