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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도 Apr 05. 2023

로마의 아침산책


시차 적응을 못한 탓에 새벽 4시쯤부터 깨어있었다. 어젯밤 읽던 책 <이탈리아 기행>을 다시 집어 들었다. 괴테가 1786년에 20개월 동안 이탈리아 전역을 여행하며 쓴 글인데, 고루한 책 표지와 다르게 상당히 재밌다.



18세기의 이탈리아를 상상하게 되는 재밌는 코멘터리가 많다. “뭐라고 해도 꼭 필요한 화장실이 없어서 여기 사람들은 상당히 자연 상태와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다.” 라던가 “이들은 늘 바깥에 나와 있으며 무사 태평하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이 민족이 볼 때는 모든 것이 다 괜찮고 좋다.”라거나. 역시 이탈리아인은 오래전부터 이렇게 낙천적으로 살아온 민족인 것이다.


춥고 어두운 독일의 날씨와 대비되는 따뜻하고 일조량이 많은 이곳의 날씨를 부러워하며 “내가 이곳 기후를 우리 집을 둘러쌀 만큼 가죽 끈으로 싸 갈 수 있다면”이라고 한 부분에서도 웃음이 나온다.


커피숍이 문을 여는 6시쯤에 나가서, 커피를 마시고 이른 아침 산책을 할까 고민을 하고 있는데,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제 집주인이 아침에 직원이 와서 조식을 준비해줄 거라고 했는데, 지금이 그 시간인 것 같다. 문을 살짝 열었더니, 주방에서 커피를 내리던 그녀가 우리를 발견하고 “오오-“ 하면서 반가운 체를 한다. '아나'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녀는 콜라지오네(조식)를 지금 먹을 건지 묻는다.


이탈리안 조식답게 커피와 달콤한 페스츄리 하나 정도겠거나 하고 방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큰 상을 가득 채운 음식이 배달됐다. 커피와 주스, 치즈 파니니, 달콤한 베이커리와 쿠키, 요거트까지.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준비해준게 보인다. 발코니에서의 로마의 아침 공기를 맡으며 먹는 콜라지오네라니, 맛이 없을 수가 없다.



아침을 먹고 집을 나섰다. 콜로세움을 지나는데, 아무래도 요즘 관광객의 수가 예전 같지 않아서인지, 늘 줄이 길게 늘어선 입구가 한산했다. 오늘 아침에 읽은 책에서 괴테가 콜로세움에 대해 극찬한 것이 생각나면서, 한번 들어가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콜로세움에 도착했다. 이것을 보고 나면 다른 사물은 모두 작아 보이고, 그 거대한 모습을 마음에 담아 둘 수 없을 정도이다.

<이탈리아 기행>



콜로세움은 현존하는 가장 큰 규모의 고대 건축물로, 원래 글래디에이터 경기나 로마 비극 같은 연극이 올려지는 대규모 원형극장이었다. 하지만 중세 초기에는 더이상 극장으로 쓰이지 않고, 사람들이 거주하는 집으로 이용되거나, 종교적 혹은 군사적 공간으로 쓰이기도 했다고 한다.


원형극장이 전적으로 그 효력을 발휘한 것은 고대 시절뿐이었다. 그때의 민중은 지금의 민중 이상의 개념이었고, 사실 원형극장은 민중 스스로에게 커다란 감명을 주고, 민중 자신을 최고로 여기게끔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콜로세움을 나와서 로마 포럼으로 걸어갔다. 고대 로마 시민의 삶의 중심부였다고 하는 이곳에는 중요한 정부 빌딩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고, 부유해 보이는 저택과 템플도 있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 어디에 시선을 두더라도 자연과 건축물의 조화로운 아름다움에 취하는 곳이 고대 시민들의 일상의 중심지였다니. 이탈리아에서는 아름다움이 가볍고, 피상적인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진지한 추구 대상인 것 같다. 그래서인지 괴테는 로마에서의 시간을 매우 즐긴 것 같다.


위대한 것과 아름다운 것을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숭배하는 것이 나의 천성이다. 이렇게 훌륭한 작품들을 보면서 매일, 매시간 이러한 기질을 갈고닦는 것은 행복하기 그지없다.


어제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카쵸 에 페페’가 맛있기로 유명한 레스토랑 Roma Sparita에 왔다. 여유롭게 즐기려고 일부러 점심시간을 비켜간 애매한 시간에 왔는데도 테이블이 거의 다 차있다. 카쵸 에 페페와, 해산물 뇨끼, 그리고 전채로 삶은 강낭콩 스튜를 시켰다.



바로 이거다. 딱 적절하게 짜고, 맛있게 느끼한 이 맛. 이 레스토랑을 처음 알게 된 계기는 앤써니 보대인 Anthony Bourdain의 여행 다큐멘터리 No Reservations 로마 편을 통해서였는데, 그는 이런 환상적인 음식 앞에서 칼로리 운운하는 사람들과는 상종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게 기억난다.


옆 테이블에 앉은 중년 커플이 말을 걸어왔다.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에서 왔다는 이들은 남편의 정년퇴직을 축하하기 위해 왔다고 했다. 로마에 일주일 머무르고 나서 토스카나 지역으로 이동해서 이탈리아 시골 풍경을 보고, 쿠킹 클래스를 들을 예정이라고 한다. 전형적인 미국 중산층의 여행 루트였다. 막상 와보니 너무 좋아서, 이제 회사를 가야 하는 것도 아니니, 2주 만에 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냐며 비행기 표를 바꿀까 생각 중이라고 했다.


그들은 우리가 둘 다 집을 떠나 홍콩에서 살고 있다는 걸 듣고, 자신의 딸도 그렇게 용감했으면 좋겠다고 하더니, 자신의 대학생 딸이 대학에서 전공을 3번이나 바꾸었고, 완전히 길을 잃은 것 같다고, 여전히 졸업하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르는 딸이 걱정된다고 했다. 왠지 내 부모님도 동네의 한 식당에서 장성한 딸이 여전히 뭐하고 살지 모르는 것 같다고 옆자리 사람들에게 신세한탄을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시차 적응은 여전히 못했고, 또다시 4시에 눈을 떴다. 동이 트고 나서 주섬주섬 챙겨 입고 마지막 로마의 아침을 산책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유럽여행을 할 때 로마를 경유해서 가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가 이렇게 시차 적응이 안 된 새벽에 일어나 관광객들로 뒤덮이기 전의 한적한 도시를 탐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른 시간의 고요한 로마를 걷는 일은 언제나 유쾌하다. 판테온이며 광장의 분수대를 지나며 천 년 전, 이천 년 전, 똑같이 이 길을 걸었을 사람들을 상상한다. 지금의 나와 다르지 않게 소소한 걱정들 - 돈 걱정, 건강 염려, 가족들 걱정을 했겠지. 지금 나는 거기에 더해 더 중요한 걱정을 하고 있다. 로마에서의 마지막 커피는 어디에서 마실 것인가?


판테온 옆에 있는 La Casa del Caffe Tazza d’Oro의 커피가 유명하다고 들었는데, 나는 커피보다 마리토쪼Maritozzo를 먹어보고 싶었다. 마리토쪼는 브리오쉬 빵 사이에 생크림을 채운 것으로 로마 사람들의 클래식 아침메뉴라고 한다.



도착하니 아침 6시가 조금 넘은 시간, 카운터에서 주문을 하자 직원은 “잠시만” 하더니, 뒤의 주방에 “마리토쪼 나왔어?”라고 묻는다. 그때 막 만들어진 빵이 영롱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긴장되는 마음으로 한입을 베어 물었는데, 깜짝 놀랐다. 따뜻한 브리오쉬 빵 가운데 있는 크림은 우리에게 익숙한 생크림과는 달랐다. 별로 달지 않았고, 생크림의 질감보다 더 쫀쫀하고, 크리미 하지만 우유의 신선함이 가득 살아있었다. 감동적인 맛이다. 떠나기 전에 먹어보길 잘했다.


이제 슬슬 산책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가서 짐을 찾아서 기차역으로 갈 시간이다. 나폴리행 기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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